단 한 번도 네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니.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마는, 나는 진실로 너를 애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사랑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선생님은 저를 사랑하셨잖아요. 아껴주고, 예뻐해 주셨잖아요.

 

 

 매우 유감이구나, 나는 단 한 번도-, 인생을 통틀어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이런 쓸 데 없는 장난은 그만치고 나를 좀 풀어주렴.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처럼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신 분께서 사랑을 해보신 적 없다니요. 저는 알아요. 선생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며 위대한 분이신지요.

 

 

 너는 네 마음대로 만들어낸 라는 환상에 너무 붙잡혀 있는 것 같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지금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 않니.

 

 

 거짓말 치지 마세요, 지금 여기에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선생님. 아니, 주란씨. 여기에는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요. 이제는 마음껏 말해주세요. 나를 사랑한다고. 마음 속 깊이 연모하고 있다고. 오직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나는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선생님에게 주란이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일이지. 지금이라면 선생님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단다, 단미야. 이런 장난 그만치자.

 

 

 선생님,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세요? 항상 웃어주시던 선생님이잖아요. 제가 장난을 치거나 실수를 해도, 괜찮다 웃어주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어주셨잖아요. 그 때마다, 선생님의 손바닥에 입 맞추고 싶다고 얼마나 생각했던지. 그 부드러운 손을 핥고 손톱 끝을 깨물어주고 싶다고, 얼마나 바랐는데.

 

 

 하, 하지 마!

 

 

 왜요,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설명해주셨잖아요. 이렇게 선생님 손에 입 맞추는 건 왜 안 되는 일이죠?

 

 

 하지 마, 징그러워!

 

 

 징그럽다니, 아 참, 선생님이 싫어하실 만한 벌레나 쥐 같은 건 여기에 없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아니야! 나는 지금, 네 혓바닥이,

 

 

 간지러우세요? 선생님, 저는 지금 정말 황홀해요. 꿈에서나 했을 법한 일들을 지금 제가 하고 있다니요. 선생님도 지금 괜히 그러시는 거죠? 창피해서.

 

 

 그런 거 아니야, 최단미! 놔 줘, 제발.

 

 

 왜, 왜 화를 내세요. 손목, 별로 아프지 않게 묶었는데. , 혹시 화장실에 가고 싶으신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의자랑 연결해놓은 자물쇠를 풀어드릴게요.

 

 

 대체,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단미야. 혹여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거니?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잘못한 게 있다뇨. 선생님은 제게 모든 걸 가르쳐 주셨는걸요. 제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가르쳐주셨어요.

 매일 보는 하늘이 얼핏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것, 봄을 맞이하여 움트는 신록의 파릇한 솜털 빛깔, 여름 날 소나기가 내린 후 반짝거리는 빗방울과 무지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냄새, 얼핏 고요해보이지만 얼음 아래서 쉬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이요. 모두,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깨닫게 된 거죠. , 선생님을 만나 다시 태어난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런 선생님을, 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선생님? 지금 왜 우시는 거예요? 제가 너무, 선생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기쁘신 건가요?

 

 

 제발, 나를 놔줘. 난 너를 오직 한 명의 학생으로 보았을 뿐, 아니, 내가 모두 잘못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단미야.

 

 

 선생님이 뭘 잘못하셨어요. -그래요, 그 때는 저도 섭섭했어요. , 저 말고 다른 학생의 이마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셨죠?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저는 그 날이 똑똑히 기억나요. 아아, 마침 그 날은 눈이 내리고 난 다음 날이었어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같은 눈이 사락사락 내렸던 그 다음의 날. 게으름뱅이처럼 태양은 늙은 빛만 힘없이 교문 위로, 운동장 위로 던져냈죠. 선생님은 그날 여느 때와 같이 갈색 머리카락을 품위 있게 땋아 올린 채, 그 날씨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카멜 색 스카프를 두르고 계셨어요. 동그란 진주 귀걸이가 선생님의 귓불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죠. 선생님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었어요. 천천히 걸어 교탁 앞에 서신 선생님께선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제게 가장 먼저 미소를 띠우신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셨어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 이름 부를 때 목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 지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 말이 조금 어긋났네요.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오시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눈을 마주치고 학생들의 건강을 봐주시기도 했어요. 특히나 그 날은, 태양빛은 느릿하고 밤새 쌓인 눈 덕에 얼어붙은 공기와, 귀가 아플 만큼 찬바람이 불어 무지 추운 날이어서, 코를 훌쩍거리는 학생들의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죠. 선생님은 유난히 코를 훌쩍거리던, 맞아요, 박소진이라는 그 이름, 일부러 쉴 새 없이 소리를 내가며 선생님의 관심을 끌려던 그 아이에게 다가가셨어요. 그리고는 자상하게 허리를 굽히며 그 계집애의 이마에 부드러운 손을 대셨죠. 망할 계집애. 아픈 척 요란스럽게 코나 훌쩍거리던 그 계집애까지도 선생님은 자애롭게 돌봐주신 거예요, 그게 선생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신 채요. 그 순간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저는 선생님의 그런 자상한 모습까지 모두 사랑하는 거니까 이해해 드릴게요. 속인 사람이 잘못이지 속은 사람은 잘못이 아니잖아요?

 아, 그 소진이라는 얌체요? 걱정 마세요. 지금은 코를 훌쩍거리지 못할 거예요. 훌쩍거릴 코가 있어야 그런 소릴 내지 않겠어요?

 

 

 너, 대체 소진일 어떻게 한 거니? 소진인 네 친구잖니!

 

 

 그딴 앨 친구로 둔 적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만약 그 계집애가 제 친구라면, 어떻게 친구의 연인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죠? -혹시 선생님, 그 애랑 뭔가 더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 없겠죠? 지금 제가 착각하는 거 맞죠?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선생님은 정말 순수한 걱정에서 그렇게 행동하셨을 뿐, 선생님이 사랑하는 건 저 뿐이라는 걸 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걸요. 아아,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선생님을 독점하고 싶었어요.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목덜미에서 좋은 향기를 맡고, 이렇게-,

 

 

 그, 만해! 지금 뭘 하는 거야!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저도 이제 다 자랐으니,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이 꽤 컸거든요. 그리고 책에서 봤는데, 이렇게,

 

 

 그만, 제발, 단미야!

 

 

 선생님께서 이런 목소리를 내실 줄 몰랐네요. 여긴 아무도 없는데, 아직 저에게 맨몸을 보여주시기가 부끄러운가 봐요어머, 우시는 거예요? 좀 창피하실 순 있겠지만, 이제 우린 하나가 될 텐데요. 그렇다고 선생님을 결코 괴롭히거나 울리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제가 옷을 잘 가다듬어 드릴게요.

 

 

 건드리지 마!

 

 

 선생님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내시기도 하네요. 항상 저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줘서 그런지, 이런 목소리도 두근거리긴 하는데 저한테 화내시는 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선생님.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우린 이제 곧, 하나가 될 거니까.

 

 

 대체, 대체, 내가 뭘, 어떡해야 풀어줄 수 있는 거니, ?

 

 

 아, 묶인 데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건 얼마든지 풀어드릴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 혹여나 어디로 가버리시거나 할까봐 이래놓은 거예요. 선생님은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거 같으니까. 후후, 물론 그런 모습도 너무 귀엽지만요.

 

 

 아무, 아무데도 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냐니요. 당연히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그렇죠.

 

 

 사, 사랑은, 사랑은 이런 게 아냐. 이런 게 아니라구!

 

 

 어머, 아까 선생님은 이제껏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이런 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죠?

 

 

 너, 너야말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내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죠. 선생님은 지금 나와 이런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사랑이 뭔지 모르셨을 테니까요. 오직 나와의 사랑만이 선생님 생애 단 하나 있을 사랑이니까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피곤하신 거예요? 눈을 감는 걸 보니 그러신가 보네요. 물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울고 소리치셔서 목이 마르실 것 같은데.

 

 

 -필요 없어.

 

 

 하긴, 선생님께는 저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럼 저만 좀 마실게요. 어휴, 목이 너무 말라서.

 선생님, 주무실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선생님도 저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까지요. 선생님은 듣다가 잠드셔도 돼요.

 

 

 그런 쓸 데 없는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정확하게 기억나요, 처음 선생님을 봤던 날. 전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을 지독한 위선자에 잔소리만 해대는 깐깐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사실 그 이미지는 선생님을 보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어요. 정말, 후후, 정말 웃기지만 전 그 사건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을 싫어하는 편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날. 그 사건이 있었던 그 날 이후 제 생각은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아니, 제 세계가 일변해버렸죠. 모두, 선생님 덕이에요.

 그 날 아침, 나는 또 관심과 애정을 빙자한 어머니의 학대 끝에 등교할 수 있었죠. 이렇게, 제가 어머니의 행동을 학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선생님 덕인데, 후후, 계속 이렇게 선생님 칭찬만 하다 보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그냥 계속 이어갈게요. 아무튼, 제 교복 속은 항상 보랏빛과 푸른색, 붉은 색과 노랑들이 서로 섞여 향연을 벌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교복에 가려지는 부분만 건드렸거든요. 그런데, 정말 아무도 제가 그렇게 어머니께 학대당한다는 걸 몰랐을까요? 하긴, 아무도 학교 이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긴 한데, 그쵸. 매일 있다시피 한 일이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날,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보건실로 데려가서 약을 바르고 안아주기 전까지는요.

 

 

 그건, 그건 교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그 당연한 일을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해해요. 누구도 학교 이사장의 치부를 건드려 그만 두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그치만, 그치만 선생님처럼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내 얘길 들어주고, 그건 사랑이 아닌 학대라고 말해주고,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 사람은 이제껏 한 명도 없었어요. 선생님, 선생님. 나는 그때야말로 선생님이 하늘이 제게 내려준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처럼 훈육을 빙자한 학대를 더 이상 사랑으로 생각지 않게끔 말이에요. 선생님, 그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요, ?

 주무시나 보네요. 그래도 계속 말할래요. 선생님께 줄곧, 내 사랑을 고백할 때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선생님. 나는 그 날 세상이 일변하는 걸 겪었어요.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죠. 선생님의 배려로 하루종일 보건실에 있다가 조퇴를 할 때, 집으로 가는 길을 걸을 때, 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날, 일찍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언제나와 같이 때릴 줄 알았지만 도대체 무섭지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와 앉은 창가에는 청춘기를 지난 햇살이 천천히 금파金波 무늬를 새겼고, 거실의 괘종시계가 규칙적으로 초침을 건너는 소리가 음악으로 귓가에 고였어요.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던 그 집의 형태와 소리와 분위기가, 그저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되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나도 알아. 이런 짓,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누울 때마다 선생님 생각에 숨이 막히게 가슴이 아프고, 매순간 선생님 생각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리고, 잠들면 언제나 선생님 꿈을 꿔요. 참았어요. 아주 많이 참았다구요. 이런 짓, 선생님이 싫어할 거고 나를 진저리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도 생각했지만 어떡해요.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았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내 숨결조차 증오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님이 내 곁에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미칠 것 같은데. 차라리 선생님을 만나지 말 걸, 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알지 못했더라면, 그냥, 금이 가버린 돌 같은 예전의 심장을 평생 가지고 살았더라면 이런 행동, 이런 생각도 안 했을 거란 거, 모르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어떡해요. 이미 알아 버렸는걸. 선생님은 이미 독처럼, 내 심장과 내 폐부, 뇌까지 깊숙하게 스며들어 떼어낼 수가 없는 걸.

그러니까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생님이 내 온몸 곳곳에 퍼진 걸 느낀 지금 이 순간보다 조금만 더, 그래서 그냥 완벽하게 행복한 이 순간에 내 생을 다할 수 있도록,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너, 지금 무슨 소릴,

 

 

 아, 역시. 잠들지 않으셨구나. 아까 물, 마시지 않길 잘하셨네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채단미.

 

 

 아실 텐데요, 선생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제 슬슬 잠이 오는 걸 보니, 약효가 점점 퍼지고 있나 봐요. 선생님, 선생님 무릎에 기대어서 잠이 들어도 돼요? 아마 곧 있으면 여기로 다른 사람들이 찾으러 올 거예요. 선생님의 불쾌한 기분은 곧, 해결이 되겠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는 거예요, 선생님. , 자꾸 눈이 감기네. 선생님 무릎이 참 따스해서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선생님.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래요. , 선생님한테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싶으니까.

 선생님, 부탁 하나만 더 들어 주실래요?

 

 

 -싫어.

 

 

 아, 역시. 그래도 듣고 나면 들어주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선생님, 잘 자라고 해주세요. 우리 단미, 잘 자라. 내 생을 통틀어 우리 어머니도, 단 한 명의 사람도 하지 않았던 말. 잘 자라고, 한 마, 디만.

 아, 잠이 너무 온다. 선생님, 혹여나 내가 잠, 들어도, 깨우지, 말아 주, 세요. 선생님. , 생님. -, ,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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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banera_

 “여기 있다. 사이비로써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자들이다. 어서 끌고 가라.”

 

 

 분명 낯설어야 하는 목소리였으나 애통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익숙하다 못해 그립기까지 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가물어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다정하게 미소 짓는 범신의 얼굴이 시계 안에 가득 찼다.

 

 

 “약조는 지키었다, 아가토. -준호야.”

 

 

 언제나 불퉁하게 내뱉거나 저를 내려다보듯 하는 그 얼굴이라, 한 번이라도 다정하게 웃는 낯을 보고 싶다 했건만 저를 따스하게 바라보아주는 눈이 이리도 슬프기 그지없으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방금 전까지 마귀에게 붙들려 있던 몸, 기나긴 구마 의식에 지쳐 나가떨어진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열린 문, 무정한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그 문으로 병졸들이 몰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그 달빛 너머, 비통한 눈빛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숙부-, 치헌의 얼굴을 감기는 눈 너머로 선명히 그려내면서도.

 

 

 “호조 참-, 치헌아.”

 

 

 바스러질 듯 꽉 깨물린 어금니 새로 오열을 억누르던 치헌이 오라를 받는 범신을 말없이 주시한다. 끌려가는 제가 어찌될지 그 끝을 빤히 알면서도 김범신 베드로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온화한 그 눈에 다정한 웃음까지 띄워내며 범신은 치헌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치헌아. 걱정 마라. 준호는 괜찮다. 그 아이는, 우리와 연관된 이가 아니다. 그러니-, 숙부인 네가 잘 설득해 다오. 괜히 나 따라 오지 않게끔. -나는 괜찮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것은 오직-, 그 아이를 따라 가지 못했다는 것뿐이었건만. 내가 준호를 살릴 수 있었다니, 나는 그것으로도 너무나 충분히 이 삶을 보상받았다.

 

 

 잇지 못했던 순간들을 숨소리 사이로 삼키면서 범신은 고개를 숙이고 기도문을 왼다. 그 차분한 모습에 치헌은 결국 눈을 감고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린다.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 겁에 질린 눈으로나마 검은 돼지를 안아 들어 달려가는, 검은자위가 또랑한 아이조차 제 시야 안에 감겨들지 못하게끔.

 

 

 

 

 며칠 전, 처음 범신의 말을 듣고서 치헌은 들고 있던 술을 그 얼굴에 쏟아 부을 뻔 했다. 아니, 믿기지 않아 되묻는 것이 먼저였겠지만 그 진지하고도 강건한 표정에 의심은 저만치 밀어두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는 하나밖에 안 남은 제 조카를 서학이라는 사지로 몰아넣은 범신에게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로 억눌러본다.

 

 

 “그래서, 내 손으로 조카를 끝장이라도 내라는 거냐. 이 새끼야.”

 

 

 엄격하지만 항시 아랫사람들을 따스하게 굽어보는 인격자라는 평을 받는 치헌이었다. 그런 치헌의 새로운 모습에 범신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음을 흘릴 뻔 하였으나 금시로 표정을 다잡고 주먹을 쥔다. 왼손에 잡힌 동백선이 부르르 떤다. 두터운 붓으로 그린 짙은 수묵화를 닮은 얼굴에 기나긴 침묵이 여백을 채운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나-, 오래 살다 보니 최치헌 네놈한테 욕도 들어보는 구나.”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펼치지 않은 동백선에는 여전히 가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만치나 오래 살았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나를 잡아가다오, 치헌아.”

 

 

 동공의 흔들림이 멎었다. 의문과 당혹이 서린 눈빛에 범신도 떨리는 눈을 조용히 마주한다.

 

 

 “네 조카, -, 아가토를 살리려면 그 수밖에는 없다. 내가 마음대로 네 조카를 데려간 게야. 그리하자. 그리하면, 준호는 살 방도가 있을 게다.”

 “설명을 좀 해보아라. 대체 무슨 말이냐, 너는.”

 

 

 오랜 벗의 진솔한 어투에 조금씩 분노는 삭아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납득한 것도 아니었다.

 

 

 “설명한다고 네가 이해나 하겠냐마는, 네 조카를 살리는 수는 이뿐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 놈한테 잡혀 죽든, 밀고를 받은 병졸들한테 끌려가든, 준호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다.”

 

 

 단숨에 술잔을 들이킨다.

 

 

 “-이 부근 서학도 명단이 밀고 되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나와 준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도.”

 

 

 온화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둥글고 고운 눈썹 아래 속눈썹이 긴 민 눈이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으나, 연지를 바른 입술만이 피처럼 붉어 마치 그림 속 여인이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육조대로 어스름 녘, 여인은 겁도 없이 범신의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동지사 어르신이 맞으신지요.”

 “그러하다만, 뉘시오?”

 “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사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오천 냥이니, 보름 후 술시까지 주 선비님 댁 앞에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굳이 주 선비, 즉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집을 언급했다는 것은 적어도 제가 서학도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도 모르게 백단향이 나는 그 밤 속 준호가 떠오르자 등골이 섬뜩하게 곤두서는 느낌이었으나 부러 느긋하게 한숨을 쉰다.

 

 

 “어허, 오천 냥밖에 부르지 않았다니 심히 섭섭하나 다행이라고 해도 좋겠구나. 더 필요하지는 않느냐.”

 “-여전하네요, 그 구역질나도록 뻔뻔한 모습은.”

 

 

 돌아보는 장옷 사이로, 저를 쳐다보는 눈에는 시커먼 악의만이 차있었다.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명징한 눈. 어렴풋한 기억을 자극하는 그 홍채와 마주하다 말고 범신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 나를 알더냐.”

 “여전히, 저만 올곧으시고 저만 높으신 사람이군요, -, 범신.”

 

 

 그리도 청일했던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느끼게도 하는 악의에 찬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가 두개골 안으로 뭉뚱그려지며 단 한 번도 삭히지 못했던 목소리와 겹쳐진다. 범신은 동백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떠올리면서도 제 안에서 20여 년간 한 순간도 지운 적 없던 하나의 이름을 끌어올렸다. 그 이름이 입술에 올라앉은 순간 범신은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찌해야 준호를 살릴 수 있는지 그 길이 제 앞에 환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비록, 제 길이 가시면류관을 쓰고서 십자가를 짊고 가야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초희.”

 “잊으셨다 해도 가증스러웠겠지만, 그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이름이 썩 달갑지는 않습니다.”

 

 

 둥글고 선했던 인상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져버렸다. 아까와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로도 완전히 달라진 그 표정 그대로, 여인은 눈을 가늘게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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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기억 속에서 너는 항상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교복을 입고, 단정한 감람색 넥타이를 늘어뜨린 채 칼날 같이 잘린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등은 언제 누구 앞에서도 굽힌 적 없이 당당했지. 미친개로 소문난 수학 선생에게 잘못 걸려 뺨을 두 대나 얻어맞을 때에도 무너지지 않은 너를 보며 나는, 가끔 가끔, 고아하게 반듯한 네 등을 활처럼 구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에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얗고 얇은 도자기 잔에 자연스러운 입술 자국을 손가락으로 지워내며 눈가에 품위 있는 웃음을 얹는다. 그 미소에 건너편에 아무렇게나 걸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은 입술 한 쪽 끝을 비틀어 올리며 반대로 잔 손잡이를 손가락에 걸치고 한 모금, 소리 나지 않게 차를 마신다.

 

 

 “별 일이네, 박묘란. 네가 나를 보자고 할 줄이야.”

 “나야말로 제나 네가 이렇게 순순히 나와 줄 줄은 몰랐지.”

 “안 될 건 뭐람. 이럴 줄 알았음 수갑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히스테릭한 웃음을 쿡쿡 흘리나 싶더니 일순 몸을 숙여 눈을 맞춘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새까만 눈. 단 한 번도 타인을 포용한 적 없을 것 같은 암흑 속에 오롯이 깃든 것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박묘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기쁜 걸,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균형을 잃은 입술이 사소하게 흐트러진다.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네가 반응할 때마다, 나는 어찌할 바를 잘,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네가, 친구라고 여겼던 이가 있기나 했을까. 목덜미에 간신히 닿을 만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믿기지 않을 만큼 짙은 검은색. 너무나 새까매 오히려 푸른 염료가 담기지는 않았을까 의심하게 하는. 아무렇게나 구겨 입은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이 열려 있었고, 네가 구색이나마 맞춘 넥타이를 한 날에는 전교생 모두가 그날은 복장 검사가 있겠거니, 하고 다시 한 번 더 제 교복을 돌아보곤 했었지. 누구에게도 관심 없는 눈을 하고 단 한 번도 제 밖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너를 나는, 복도에서든 교실에서든 그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자주자주 넘겨다보았다.

 

 

 “이래봬도 우리 같은 학교, 같은 반도 한 적 있지 않았어? 사회에서 더 자주 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묘란의 한 마디에 흔들렸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심연을 닮은 눈으로 잠깐 허공을 바라보던 제나는 털썩, 카페의 소파에 기대며 담배 곽을 꺼낸다. 가느다란 손가락 새 익숙하게 한 개비를 엮은 뒤 흘끗 묘란에게도 곽을 기울였다가 거두며 느슨하게 웃어 보인다.

 

 

 “건강 생각해서라도 너는 끊어.”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구나. 그래, 나는 괜찮으니 너는 펴도 돼.”

 

 

 가볍게 농담을 건네나 싶더니 묘란의 허락에 불을 붙여 푸른 연기를 내뱉는다. 끊은 뒤 담배 냄새를 그리 반기지 않던 묘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나가 피우는 이 담배 냄새는 어딘지 옛 기억을 모호하게 자극하는 그리움이 있었다.

 

 

 “제나야, 서제나. 참 얄궂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상대방에게 한다기보다는 반쯤은 제게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제나도 잠자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생에 너와 내가 엮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린 듯 완벽한 모범생과 동시에 그린 듯 완벽한 날라리. 야간 자율 학습을 끝마치고 가는 길, 서둘러 집에 가기 위해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휘황한 피어싱들을 자랑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찰나의 시선. 너는 낯선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임을 확인하면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술 끝에 물린 담배에 열중했다. 가로등조차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오직 가늘게 비추이는 달빛만이 파르라니 떨리는 연기 속을 유영하며 네 단정한 옆모습을 유려하게 떠오르게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패싸움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어디서 요란하게 얻어터지고 오기라도 한 건지 입술 끝과 눈두덩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너와 마주하기도 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하게 시선을 돌리던 너는, 눈앞에 디밀어진 손수건에 놀라지도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었지.

 

 

 “, .”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직까지 긴장과 갈증이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날것의 숨소리와 살기로 뭉친 눈빛.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형형하게 빛나는 그 공허한 동공과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켜냈다. 사실 욕설 한 마디쯤, 아니 따귀나 주먹 등 거친 몸동작 한 두 개쯤은 각오하고 내민 손수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단 한 마디의 욕설이나 행동 없이 그 무심하고 나른한 안정(眼精)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곤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제 얼굴을 조금 정리하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살기와 나른함이 공존할 수 있지, 싶었지만 머리카락을 닮아 심연을 모아둔 네 눈은 그렇게도 모순적이면서도 독특했다.

 

 

 “고맙다, 반장.”

 “-, .”

 

 

 내가 반장인 건 알고 있었구나,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으로 잠깐 너를 돌아다보고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반사적인 미소를 지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하고 금세 시들기는 했으나. 닦아낸 손수건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너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나를 보고 그제야 처음으로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말을 꺼낸다.

 

 

 “이거, 빨아서 돌려줘야겠지?”

 “? , ? , 아니, 그게, 그렇게, -근데, , 저기, 상처는, 괜찮아?”

 “-이 정도야 뭐, 밴드 붙이면 될 걸.”

 

 

 우리 학교의 누구라도 보면 믿기지 않아 할 대화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더듬다니, 그리고 네가 이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가다니. 내 기억 속 너는 무엇과도 섞이지 않을 것처럼 검푸른 머리카락만큼이나 철저히 세계를 무시해나갔고, 어떤 사람도 네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동시에 누구도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게끔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네가, 이렇게나 무구하고 무해한 목소리로 말을 잇다니.

 

 

 “그래도 약은, 발라야 하지 않을, .”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나 허둥대며 말을 더듬는 너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웃기기도, 귀엽기도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매일 아침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하얀 블라우스, 목 끝까지 채운 단추에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넥타이에 정확한 각도를 유지하는 이름표. 한 올의 삐침도 없이 칼처럼 정리 된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꼼꼼함과 완벽함으로 일을 척척 처리해내는 너를, 아무리 학교 일에 무관심한 나라도 모를 리 없다.

상냥한 말투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공명정대한 너는 바꾸어 말하면 누구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 너와 나는 평생을 낮과 밤으로 나뉘어 만나지 못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 날의 일은 나에게도 뜻밖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을 잊게 해주는 것은 몇 개 없었지만, 슬슬 끊을까 하던 담배가 그나마 위안이 되곤 했다. 학교 근처지만 재건축 들어갈 예정이라는 낡은 상가가 몇 개나 들어선 그 골목은 낮에도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외로운 곳이었고, 그곳이야말로 담배를 태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남에게 들키는 것 자체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나의 삶을 살아본 적 없이 이해할 생각도 없는 타인에게 공허한 설교를 듣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조금 급한 듯한 낯선 발소리를 듣곤 새로운 곳을 또 찾아야 하나, 지겨운 생각에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들어보자 달빛이 네 뒤로 가로놓였다.

 

 

 하얗고 가는 달빛이 그날따라 왜 그리 휘황했던지. 교복 블라우스 카라를 벨 듯 단정한 머리카락에 덧씌워지는 달빛은 화관 같기도 하고, 번진 날개 같기도 해서 우습게도 조금, 안심해버렸다. 너라면, 그래 너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란 근거도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마주침.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고요라 할지언정 나는 네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다. 메트로놈처럼 단정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교복 단화 소리. 그 소리가 낡은 골목길에 울려 퍼질 때에는 아주 잠깐, 네가 오겠거니,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미소가 입술 끝에 허름하게 흐르곤 했다.

 

 

 그날은 너를 기억했던가. 굳이 기억하자고 한다면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뺨을 두어 대 얻어맞고, 그리고 집에서는 이미 나조차 포기해버린 나를 들들 볶으며 소리나 내지르던 그런 날들. 끝없이 파고드는 운동화 끄트머리로 지구의 파편을 멸망시키고 싶다고 뇌까리며 나는 오직 단순하게 너를 기다렸다. 그저, 달빛보다 환하게 저를 비추려던 나를, 비우고 기대고 또, 바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 얼굴에는 어떠한 흔적도,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내가 기대한 것이라고는 단순히,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 그 얼굴, 오직 그뿐. 그렇게나 나는 단순하게도, 그리고 위대하게도 너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무엇과도 바꾸지 않고 바꿀 수 없을 너를,

 몇 번이고 떠올려보고, 몇 백번이고 내가 기다려 본다.

 

 

 오직 달랐을 테고, 완전히 변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을 통틀어 나는 너를 떠올리지 않고서-, 단 한 번도 기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너와 나는 달랐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만이 나를 살려주던 시대가 있었다.

 

 

 

 

 한동안 학교 끄트머리에서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정도로 한 사람은 우등생으로 이름이 올라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학교에 잔디구장 하나를 지었다거니, 그 학교 출신 유명 인사 이름을 딴 건물을 지었겠거니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입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스쳐 지나기를 반복했으나-, 방학만 되면 핫핑크 색 머리카락 사이 아무렇게나 담배 연기를 흩날리며 교내를 활보하는 한 사람과 염색 기 하나 없이 단정하게 쓸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옷차림을 자랑하는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유대감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상상도 못했지, 서제나 네가 서미나의 딸일 줄은.”

 

 

 가볍게 쿡쿡 웃는 제나의 안광이 서늘하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엷게 내뱉으며 제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나야말로, 설마 네가 설표회의 무남독녀 후계자일 줄 꿈에나 상상했겠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다. 아주 담백하지만은 않은 그 시선 속에는 독살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한 낯선 감정들이 넝쿨을 감는다. 서제나와 박묘란.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곁눈질로만 바라보다 사회에 나가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그 네 개의 안정 안에 똑바로 담게 된다. 그 안정 속, 두 사람의 홍채만이 아닌 다른 물건-이를테면 달빛조차 되튀지 않도록 곱게 재를 먹인 총신 같은 것-까지 휩싸인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여전히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카락 점점이 박혀든 음영은 달빛이 엿보였다 사라지는 그림자는 분명 아니었다. 누구의 혈흔인지 모를 그 암적색 액체들은 탐욕스럽게 머리카락을 삼키고도 제나의 흰 뺨까지 튀어 있었다. 묘란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턱선에 맞추어 단정히 자른 머리카락은 드물게도 흐트러져 군데군데 핏방울이 뭉쳐 하얀 셔츠 위에 거친 흔적을 남기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를 겨눈 총구를 멈칫하게 하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제나?”

 “박묘란...?”

 

 

 어두운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또렷하게 울렸으나 여전히 총은 거두지 않은 두 사람 중, 먼저 손을 거둔 것은 묘란이었다. 빛을 잃지 않은 시계 안에 제나의 형체를 깊이 가두며 저도 모르게 생긋, 입술 끝을 끌어올린다.

 

 

 “서제나, 서미나. 추리 좀 할 걸 그랬어. 그래, 네가 우리 학교에 온 것도 사실은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경찰청장의 딸이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묘란의 목소리에 제나도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웠던 듯 나른한 미소를 흐트리며 총신을 거두었다.

 

 

 “내가 할 말이지. 하기야, 설표회 차기 회장님께서 경찰대에 진학할 거란 상상이나 했겠냐?”

 “우리 할머니의 안목을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할게.”

 

 

 가볍게 대답한 뒤 입고 있던 재킷의 주머니를 뒤진다. 그러나 찾던 물건이 나오지 않는 듯 가볍게 혀를 차는 묘란에게 제나는 자연스레 다가가 그 입술에 제 담배를 물려준다. 입술에 담긴 끄트머리가 젖어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문 묘란 또한 고개를 제나 쪽으로 기울이며 담뱃불을 빌린다.

 

 

 “몸에 안 좋을 텐데.”

 “총보다 더 안 좋을 리가.”

 

 

 우문현답이었다. 궁색한 말 붙이기조차 되지 않는 제 말에 제나가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자 묘란도 소리 내어 따라 웃었다. 이내 두 사람의 웃음은 합창이 되어 어둠만이 똬리를 튼 공간에 별을 심는다. 허리를 꺾어가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가며 신나게 웃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학창 시절에 체력 점수가 좋았지?”

 “왔다 갔다 했지. 내가 1등하면 다음번엔 네가 1, 그리고 또 다음번엔 내가 1등하고 그랬잖아.”

 “맞아. 제나 네가 공부는 안 했어도 체력 시험은 항상 잘 보긴 했어.”

 “-자기변명 같지만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반항이었어.”

 

 

 달빛이 내려앉는 붉은 핏자국이 말갛게 지워진 제나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묘란이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늦은 일탈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그 말에 묘란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말을 들은 묘란의 친구들은 백이면 백,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돌아다보거나 혹은 농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사실은 이만큼이나 적확하게 제 심경을 표현해준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래볼까. 시작은 뭘로 하면 좋겠어?”

 

 

 놀란 입술에 다시 웃음을 피워 물었다. 묘란의 물음에 제나는 조금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린다.

 

 

 “아하하, 이건 어때? 네가 경찰이 되는 거야. 아주아주 충직하고 성실한 경찰. 이거야말로 널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일탈 아니겠어?”

 

 

 못 견디겠다는 듯 말 사이사이에 터지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대답해준 제나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던 묘란은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 그것보다 조금 더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데.”

 

 

 여전히 겨우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제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다가 그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든다. 학창 시절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여느 사람에 비해서는 색이 옅은 그 입술 곁, 한없이 입술에 가까운 그 뺨에 입을 맞춰본다.

 

 

 “경찰청장 딸과의 연애는 어때.”

 

 

 그 때 내가 뭐라고 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이 조금은 바뀐 미래가 되었을까. 다시금 담배 연기를 입술 새 가늘게 뿜어내며 멍하니 네 손가락을 바라본다. 제 턱에 닿았을 때처럼, 여전히 가늘고 뼈대가 곧은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으로 대체 몇 명이나 죽여 댄 거야.”

 “살인은 취향이 아니었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어?”

 “네가 죽인 한 사람은 알고 있는데.”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받침에 둔다. 엉뚱한 소리라며 웃어넘기려던 제나는 여전히 제게 시선이 박혀있는 묘란에게 눈을 깜박인다.

 

 

 “내가 별 짓은 다했어도 사람 죽인 적은 없는데. -죽도록 팬 놈이 진짜 죽었냐?”

 “내 마음을 그 때 한 번 죽이긴 했어.”

 

 

 쓸쓸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폭소를 터뜨릴 뻔한 제나였으나 진지한 상대방에게 어색하게 입술을 굳힌다.

 

 

 “-, 언제 내가 네 마음을 죽였다고 그래.”

 

 

 그러다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자 묘란이 흠칫 고개를 든다.

 

 

 “제나야!”

 “? -, , 말해.”

 

 

 마실 타이밍을 놓치고 눈만 깜박거리는 제나에게 묘란이 웃어준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단려한 분위기는 그것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한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조사, 그냥 여기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는 거지?”

 “-그래.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이미 내 권한을 지나간 거야.”

 “서울시 경찰청장인 네게 권한이 지나갔다는 건 그냥 말장난으로밖에 안 들려. 정말, 여기서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나야말로, 박묘란. 네 스스로 설표회 자료를 넘겨준다면 어떻게든 너만큼은, 아니, 최대한 형량을 낮게 잡도록 힘써볼게. -묘란아, 제발.”

 

 

 한 때 그리도 갈망했던 시선들이 이제야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닿지 못하는 평행선 위 새겨지는 그리움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슬픈 한숨처럼 뒤따라 붙는 제나의 마지막 말에 묘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한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좀 더, 빨리 불러주지 그랬어. 그렇게.”

 

 

 참 듣고 싶었던 내 이름. 묘란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내 이름. 다른 사람에게 불리는 그 이름과 다를 바가 없는 자음과 모음이지만 네가 불러줄 때마다 내 이름은 무지개, 보석, 이슬 같은 것들을 닮아간다. 사무치게 아름다우며 단지 네게 속해있을 뿐인, 오직 네게 불러짐으로써 완성되는 네 속의 나.

 

 

 그러나 나는 네 이름을 부르길 원치 않았다. 내 입속을 뒹구는 네 이름은 어린 날 먹었던 솜사탕보다도 달콤하여, 그렇게 내 혀를 다디달게 녹여놓고도 돌이켜보면 그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들어버렸으므로. 네 이름이 달콤한 것인지, 네 존재가 사랑스러운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 이름을, 나는 끝의 끝까지 부르지 않길 바랐다. 내 생애의 끝자락에서조차 결코.

 

 

 -제나와 묘란은 서글프게 녹아드는 침묵 속에서 끝끝내 서로를 갈구하며,

 

 

 재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앞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서로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입술 끝에서 흐르는 선혈을 선명히 자각하면서 묘란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그럴 수 없으니, 너 또한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눈가에 어리는 눈물이 단려하게도 제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주름지는 눈가에 웃음과 눈물이 촛농으로 무너졌다.

 

 

 “제나야, 서제나. 내 생을 통틀어, 단 하나 남았던 내-, 연모.”

 “말하지 마, 묘란아.”

 “이제야 마음껏 불러주는 구나, 내 이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지만 웃음기가 가득하다. 눈물이 그렁한 눈에는 마찬가지로 제 입술 너머 피를 뚝뚝 떨구는 제나가 사진처럼 박혀들었다.

 

 

 “나는 결국 네 찻잔에 독을 넣지 못했고, 너도 결국 내게 권한 담배에 독을 넣지 못했구나.”

 

 

 너를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노라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떨리는 손으로 결국은 찻잔을 바꾸어 놓았다. 그건, 참으로 행복하고도 황홀하게도, 너 또한 마찬가지였구나. 내 귀에 울리는 내 이름이 너무 달콤해서 오히려 쓰다. 천천히 뻗어낸 손가락 사이로 운명을 닮은 네 손가락이 엉켜온다.

 

 

 그래,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주자. 차마 권하지 못했던 독배와 독연처럼, 대신 서로를 향해 무너지자. 그을리고 엎드린 그 사이로, 서로를 향한 눈빛만큼은 지우지 못하는,

 그런 독이 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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