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다.”

 

 

 간결하게 말하고는 준호가 가져온 제 짐 꾸러미를 연다. 안에는 알아볼 수 없는 이국의 글자가 적힌 투명한 병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단매가 누워있는 침상에서 뚜렷하게 경계를 그리는 하얀 선. 요 사이 잘 나간다는 평판치고는 의외일 정도로 살풍경한 단매의 처소에서 거의 유일한 가구인 화장대 위에 그 병들을 차례로 올려두며 범신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되었다. 너는, 이 아가씨를 잊어버리고 살아도 된다. 성공한다면 내일부터는 멀쩡해질 테니.”

 

 

 그리고는 다시 꾸러미에서 긴 천을 꺼낸다. 한쪽 꼬리가 긴 십자 모양이 자수로 놓인 보랏빛 천 여러 개를 꺼내어 침상의 네 귀퉁이에 묶고, 다시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꼬아 그대로 단매의 사지를 결박한다.

 

 

 “, . 아니, 이 말도 안 되는 모습이랍니까.”

 

 

 비명에 가까운 준호의 외침이었지만 범신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십자가와 성수, 이국의 여인이 그려진 종이까지 꺼낸 범신은 낮게 읊조리며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그으면서도 연신 들릴 듯 말듯한 중얼거림을 이어나간 범신이 침상 곁 소금 선을 건넌 순간, 단매의 몸이 들썩였다. 그저 흔히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천장에서부터 누군가 단매의 배를 붙잡고 들어 올리는 것처럼, 전신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일으켜진다.

 

 

 “감히 네가 나를 부르느냐.”

 

 

 몸이 굳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범신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던 준호가, 저 어리고도 가는 몸을 지닌 여인의 한 마디에 온 몸이 경직되었다. 움직임이 멎고서야 제 등에 흘러내리는 땀을 알아차린 준호는 후들거리는 제 다리를 내려다본다. 지금 명백하게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증거들은 공포의 흔적. 온 방을 채우는 악취보다도 먼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에 신체가 얼어붙었다.

 

 

 “위대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내게, 너 따위 것은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다.”

 

 

 코웃음을 치며 십자가를 집어든 범신이었지만 그 손등에 가는 떨림이 번짐을 민감하게도 알아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상 위로 풀썩 몸을 다시 뉘인다. 곧 몸이 반으로 접히려다 말고 범신이 묶어놓은 팔과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힘이 빠진 개구리처럼 전신이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온통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웃고 있는 단매의 입매인 것을 알아차리자 팔에 소름이 끼친다. 그 미소가 향하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늙다리 겁쟁이 따위는 내 간식거리도 되지 않는다. 거추장스럽게.”

 

 

 흐트러져 엉망이 된 머리카락 새로 비식 미소를 짓는 이만이 하얗다. 머리카락을 헤쳐 이마에 성호를 그으려 하자, 눈이 마주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던 단매의 눈은 사각으로 벌어진 염소의 눈. 당황한 범신의 손목을 단매의 이가 깊게 베어 문다.

 

 

 “아저씨!”

 “최준, .”

 

 

 찰나의 순간 간신히 단매에게서 범신의 손목을 낚아챈 준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마자 범신은 나지막이 탄식한다.

 

 

 그리고 단매는, 준호를 보자마자 깊이 입술을 끌어올린다.

 

 

 “이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는 좀, 쓸 만 하겠는데.”

 

 

 범신을 구하느라 이미 소금선 안으로 들어와 버린 순진한 어린 양. 하느님을 믿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선한 일념으로 선을 넘어버린. 짙은 탄식에 저를 맡기면서도 준호에게 단매의 신경이 넘어간 그 때를 노려 단매의 이마에 성호를 긋고 가슴팍에 십자가를 놓는다. 여전히 쳐다보는 사람의 신경을 태워버릴 듯 거친 눈빛이었지만 아까처럼 괴이한 움직임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아가.”

 “아저씨.”

 

 

 저가 잡아놓고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에는 차마 떨쳐내지 못한 죄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구하겠노라는 의지가 공존하고 있어, 범신은 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단매는 떠나갈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더니 거침없이 말을 줏어 삼키기 시작했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린 핏덩아, 세상에나! 너는 저보다도 훨씬 어린년을 잡아먹었구나. 개만도 못한 치. 그래, 너보다야 네 어린 동생년 살점이 개한테는 딱이었겠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 어린 날 제가 저질러버렸던 죄가 천지에 낱낱이 까발려진다. 농도 짙은 땀이 수려한 얼굴을 뒤덮고, 벌써 그 날로 되돌아가버린 아이의 동공으로 입술만 덜덜 떤다.

 

 

 “핏덩이야, 아가! 왜 그러느냐? 이제와 발이 아프기라도 하든? 하긴 제 발에서 꽃신이 벗겨지든, 가죽신이 벗겨지든 알아차리기나 했겠느냐. 저 뒤에서는 아드득, 아드득, 제 동생 뼈 부숴 삼키는 소리만 요란했건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지상에 떨어진 별처럼 방 안을 집어삼켰다. 범신에게 맹랑하게도 대들었던 모습은 간 데 없이,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부서진 동공으로 비척, 단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정신 차려. 정녕 마귀의 말에 넘어가려느냐.”

 

 

 찰싹, 가볍게 뺨을 맞는다. 멍하니 정신이 빠져 있던 준호가 그 몸짓에 그제야 잠깐 고개를 흔들고 범신을 바라보았다. 구원처럼 제 눈에 박혀드는 그윽한 그림자에 눈에서 눈물이 둑 터지듯 줄줄 흘러나왔다. 망가진 인형처럼 범신 뒤에 주저앉아 눈물만 툭툭, 갓끈과 검은 두루마기에 퍼져나간다.

 

 

 “, 아저, 아저씨.”

 “비겁한 것. 이 어리석은 이를 현혹시켜 네 것으로 만들려 했더냐? 가소롭다.”

 “, 늙다리 고기는 줘도 안 먹을 텐데.”

 

 

 인간보다는 이형에 가까운 눈이 마주치자 비싯,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보게나. 사람 잡아먹은 이들끼리 서로 상처라도 핥아주는 태냐? 아주 보기 좋구나. 늙다리 네놈도, 편히 죽기는 틀려먹었다.”

Posted by habaner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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