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시간은 깊어가는 삼경.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까만 어둠을 한 줄기 촛불로 찢어발기기에는 역부족이구나, 준호는 가만가만 단정한 입술을 다물며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온기를 품은 봄바람이 새겨진 어둠은 벌써 준호의 긴 속눈썹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자네 첫사랑이 쓴 연서라도 들어있을지 모르겠구먼.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어둠 속에서 준호는 무의식중으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잊은 줄 알았던 상처가 따끔거리며 아가리를 벌려 어둠을 삼켰다. 감지 못한 눈꺼풀 너머 어둠은 긴 머리채를 빗겨 내리다가 물그림자 위에 엉겨오는 동백처럼 준호의 목덜미를 조르듯 내려앉았다.




 -오빠! 살려줘, 오빠, 오빠!




 열 살. 겨우 그 나이였다. 제가 서당에 다녀오면 산들바람처럼 제게로 와 오늘은 무엇을 배웠냐며 재잘거리던 아이였다. 오빠에게 주려고 만들었다며, 서툰 솜씨로 수를 놓아 손수건을 수줍게 건네주던 아이였다. 나는 매일처럼 네 빨간 댕기를 당겨 뺏으며 놀렸지만,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풀꽃 냄새가 나는 듯도 한 그 빨간 댕기가, 내 어여쁜 누이를 예뻐하는 내 마음처럼 고운 것 같아 좋아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네 뒤에 숨어 너를 놀래키다가, 오늘은 서당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훈장님께 혼났다는 말을 하면 너는 한참을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흘려보냈지.




 말을 할 것을.




 새파랗게 눈이 시려 뜨거운 것이 관자놀이를 적셨다. 지연아. 10년 전 이래로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못했던 이름이 제 목덜미를 틀어쥐는 어둠 속으로 지독하게 스며들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를 죽여주련? 부모님께는 단 한 번도 말해보지 못했던 소망이 허무하게 제 후두 안으로 삭아드는 것을 느끼며 준호는 제 발꿈치 께가 뜨끈하게 아려오는 것을 생각했다. 그 때 벗겨진 갓신이 무슨 색이었더라. 아마도 제 눈을 가린 어둠처럼 핏기 어린 암홍색이었겠거니, 조용히 오열하듯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호조의 망나니가 오늘은 무슨 일로 낯 색이 어두우십니까?”

 “-아닙니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




 장난스럽게 농을 건네는 좌랑의 말에 느릿하게 대답하고 제 자리로 향하였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찡그리며 거칠게 서간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한테 망나니라고?”

 “어이쿠, 깜짝이야! ...아니, 정랑께서 형조의 망나니라는 건 육조 사람들 다 아는 말 아닙니까. 뭘 새삼스레.”




 청소나 잔심부름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무심이 형조 내에서 오늘 보아야 할 서간을 들고 오다 말고 큰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나이도 저와 비슷하고 마음 씀씀이도 무던하여 평소 편하게 농을 주고받는 무심이 그렇게 말하자 준호는 그린 듯 우아한 눈을 들어 무심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는 거지?”

 “, 아침에 늦게 오시는 것이야 예사에다 점심만 되면 졸지 않으심까. 잠깐 들리셨던 호조 참의 어른 앞에서 잠꼬대를 할 때에는 쇤네가 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슴다.”

 “, 밤에 잠을 못 자게 만드는 것이 누군데 그래. 아버지가 매일 밤 내리는 벌이 뭔지 무심 네가 알면 까무라칠 테다.”




 어제의 일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치헌이 주는 벌은 대개가 사서삼경 중 하나를 정해 구절을 베껴 쓰는 것이었다. 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쩔 때에는 그 내용을 토대로 시조와 글을 써내라 하니, 이거야말로 머리에 쥐가 저릿저릿하게 나도록 만드는 주범이었다. 형조에서 시원찮은 자신의 모습을 제 나름 변명하는 준호가 불퉁하게 볼을 내밀며 불평을 늘어놓자 무심은 두터운 손으로 그 곁에 물 잔을 내려놓으며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거기다 예리하다 못해 예민하기까지 하시니, 망나니보다야 형조의 애기씨가 더 어울리시겠습니다.”

 “아서라. 지금 누구 앞길 막으려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것보다, 어제 보던 사건은 어떻게 됐어?”

 “-그러네요. 이 성격에는 확실히 애기씨보다야 망나니가 더 어울리지요. 아무튼 자료는 여기.”

 “고맙네.”




 감히 노비가 전랑인 참의의 아들을 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워낙에 형조의 일이 바빴고, 또 막상 농을 받는 본인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어영부영 지나가는 말들이었다. 거기다-.




 “이 부분이 이상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아이고, 형조 망나니가 또 시작이시네.”

 “시끄럽고, 사건을 고한 사람과 만나 볼 테니 준비 좀 해다오.”




 태생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감각이 그렇게 이끄는 것인지 준호는 일을 이렇다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바쁘다며, 혹은 이상 없다고 그저 넘어가는 송사나 사건 하나조차 꼬박 제가 보고서와 피의자를 확인하는 것이다. 제게 넘어온 사건 중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는 기어이 사건 현장까지 가고, 현장을 검증한 다모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야 비로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곤 했다.




 시간 감각이라던가 신분의 상하는 안중에도 없어하는 둔감함과, 일에 관해서만큼은 결벽이라도 일컬어질 만큼 민감하게 파악해내는 그 성향이 동시에 존재하는 덕분인지 준호는 단숨에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단어에는 분명 준호를 친근하게 여기는 느낌도 풍겼으나 그와는 별개로 법을 토대로 죄를 처벌하는 형조 특유의 고지식한 분위기를 깡그리 무시한다는 경멸의 뉘앙스도 은근히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Posted by habaner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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