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신 베드로'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7.05.14 [검은 사제들/범신준호]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5

 흔히들 알려져 있다시피 몸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식물들을 총칭하여 약초라 하지만 조금 더 아는 사람들이라면 약초의 양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신체적 조건에 따라 독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준호가 떠올린 것은 사람들을 홀리고 일시적으로 제 신체 기능을 높이는, 말하자면 독초의 가능성이 높은 약초였고 제대로 된 지식을 갖지 못한 자의 오남용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나지막한 신음성을 흘린 준호는 당장이라도 단매라는 그 기생을 찾아가야 하나 입술을 깨물다가 천천히 문간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 반가운 얼굴일세, 호조의 망나니.”

 “깜짝이야! -제게 망나니라고 부르실 만한 분이 아니시다 들었습니다.”




 느닷없는 만남에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뻔뻔스레 눈가에 개구진 웃음을 함뿍 담는다. 익숙하게도 저를 불러 제끼는 그 호칭에 불퉁스럽게 대답한 준호는 여직 들고 있던 서간으로 제 입매를 가렸다. 본능적으로 저 치에게는 저의 어떤 것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탓이었음에, 용케도 그를 알아차린 범신은 들고 있던 접선(摺扇)을 소리 나게 접어두곤 일부러 가장 위에 있던 서간을 툭 건드렸다. 간신히 균형을 잡아 서간을 제대로 안아든 준호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을 열었다.




 “아니, 춘추관에는 일이 없답니까? 왜 멀쩡히 일하고 있는 저를 괴롭히십니까?”

 “네가 나를 망나니보다 더한 이라 부르기에 그 말에 어울리게끔 행하는데 무어, 불만이 있느냐?”




 말을 마치고는 낮게 웃음 짓는 입술로 기어이 서간 하나를 떨어뜨린다. 구겨지는 준호의 눈썹이 보이지도 않는지 한가롭게 펼쳐낸 부채로 바람을 만들어내던 범신은 서간을 줍지도 않고 저를 짜증스럽게 바라보는 준호와 눈을 마주했다. 불시로 마주친 범신의 눈은 의외로 깊고도 담백해 준호는 화를 내려던 것마저 잊고 잠깐 말을 잃었다.




 “준호야. -이적, 마음에 걸리느냐.”




 귀로 들려오는 말에 머리보다 먼저, 가슴이 이해했다.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나아지질 않는 심장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애써 거두어내며 준호는 억지로 시선을 피했다. 바닥없는 늪 같은 눈에 비친 자신이, 아직 개나리 꽃빛 아래 눈물로 얼룩진 그 어린 준호일까봐 사실은 두려웠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오늘, 나랑 같이 좀 가자꾸나.”

 “..., ? -?”




 잠깐 시선을 제 구름무늬 갓신에 두었다가 뜻밖의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자 이미 묵직한 인영은 저만치 멀어져 간 뒤였다. 덩그러니 남겨진 준호는 짙게 그림자가 새겨졌던 눈을 몇 번 깜박거리곤 결국 신경질적으로 떨어진 서간을 툭 발로 찬 다음에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정랑. 송사 서간 확인!”

 “한성부에서 온 사건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오늘 안에 사간원으로 가야하는 서간은 여기로 부탁드립니다! 정랑! 어저께 부탁드린 서간은 다 완성되셨는지요?”

 “, 지금 드리겠습니다.”




 제아무리 아버지가 호조 참판이라 한들 어쨌거나 이 형조에서 준호는 형조정랑이라는 직책에 알맞은 일을 해야 했고, 아직 형조의 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준호에게도 해야 할 일은 산더미만큼 밀려있었다. 물론 단매라는 기생의 일이 신경 쓰였지만 오늘 안에 끝 마쳐야 할 일이 먼저였다일이 바쁜 만큼 제멋대로 저를 찾아왔다가 불쑥 떠나버린 범신이 더 얄미워져 이를 간 것은 별개의 일이라. 아무래도 단매의 일은 근무가 끝난 다음 확인해보아야겠다고 중얼거리던 준호는 근무 시간이 끝나 파김치가 된 모습으로 책상 위에 뺨을 대었다. 이렇게 지친 몸으로는 집에 가는 것조차 질색이었다.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날 때 다시 확인하는 게 낫다 싶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지만-,




 “시간이 되었지?”




 놀란 듯 동그랗게 뜬 홍채 위로 얼핏 꼭두서니 빛깔을 머금은 햇살이 되튀었다. 햇빛에 얇게 저민 갈색으로 바래어버린 듯한 눈을 오래 바라보던 범신은 피식 웃으며 부채로 준호의 갓끈을 살짝 끌어당겼다.

Posted by habanera_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habanera_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