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다. 사이비로써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자들이다. 어서 끌고 가라.”

 

 

 분명 낯설어야 하는 목소리였으나 애통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익숙하다 못해 그립기까지 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가물어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다정하게 미소 짓는 범신의 얼굴이 시계 안에 가득 찼다.

 

 

 “약조는 지키었다, 아가토. -준호야.”

 

 

 언제나 불퉁하게 내뱉거나 저를 내려다보듯 하는 그 얼굴이라, 한 번이라도 다정하게 웃는 낯을 보고 싶다 했건만 저를 따스하게 바라보아주는 눈이 이리도 슬프기 그지없으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방금 전까지 마귀에게 붙들려 있던 몸, 기나긴 구마 의식에 지쳐 나가떨어진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열린 문, 무정한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그 문으로 병졸들이 몰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그 달빛 너머, 비통한 눈빛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숙부-, 치헌의 얼굴을 감기는 눈 너머로 선명히 그려내면서도.

 

 

 “호조 참-, 치헌아.”

 

 

 바스러질 듯 꽉 깨물린 어금니 새로 오열을 억누르던 치헌이 오라를 받는 범신을 말없이 주시한다. 끌려가는 제가 어찌될지 그 끝을 빤히 알면서도 김범신 베드로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온화한 그 눈에 다정한 웃음까지 띄워내며 범신은 치헌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치헌아. 걱정 마라. 준호는 괜찮다. 그 아이는, 우리와 연관된 이가 아니다. 그러니-, 숙부인 네가 잘 설득해 다오. 괜히 나 따라 오지 않게끔. -나는 괜찮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것은 오직-, 그 아이를 따라 가지 못했다는 것뿐이었건만. 내가 준호를 살릴 수 있었다니, 나는 그것으로도 너무나 충분히 이 삶을 보상받았다.

 

 

 잇지 못했던 순간들을 숨소리 사이로 삼키면서 범신은 고개를 숙이고 기도문을 왼다. 그 차분한 모습에 치헌은 결국 눈을 감고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린다.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 겁에 질린 눈으로나마 검은 돼지를 안아 들어 달려가는, 검은자위가 또랑한 아이조차 제 시야 안에 감겨들지 못하게끔.

 

 

 

 

 며칠 전, 처음 범신의 말을 듣고서 치헌은 들고 있던 술을 그 얼굴에 쏟아 부을 뻔 했다. 아니, 믿기지 않아 되묻는 것이 먼저였겠지만 그 진지하고도 강건한 표정에 의심은 저만치 밀어두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는 하나밖에 안 남은 제 조카를 서학이라는 사지로 몰아넣은 범신에게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로 억눌러본다.

 

 

 “그래서, 내 손으로 조카를 끝장이라도 내라는 거냐. 이 새끼야.”

 

 

 엄격하지만 항시 아랫사람들을 따스하게 굽어보는 인격자라는 평을 받는 치헌이었다. 그런 치헌의 새로운 모습에 범신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음을 흘릴 뻔 하였으나 금시로 표정을 다잡고 주먹을 쥔다. 왼손에 잡힌 동백선이 부르르 떤다. 두터운 붓으로 그린 짙은 수묵화를 닮은 얼굴에 기나긴 침묵이 여백을 채운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나-, 오래 살다 보니 최치헌 네놈한테 욕도 들어보는 구나.”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펼치지 않은 동백선에는 여전히 가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만치나 오래 살았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나를 잡아가다오, 치헌아.”

 

 

 동공의 흔들림이 멎었다. 의문과 당혹이 서린 눈빛에 범신도 떨리는 눈을 조용히 마주한다.

 

 

 “네 조카, -, 아가토를 살리려면 그 수밖에는 없다. 내가 마음대로 네 조카를 데려간 게야. 그리하자. 그리하면, 준호는 살 방도가 있을 게다.”

 “설명을 좀 해보아라. 대체 무슨 말이냐, 너는.”

 

 

 오랜 벗의 진솔한 어투에 조금씩 분노는 삭아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납득한 것도 아니었다.

 

 

 “설명한다고 네가 이해나 하겠냐마는, 네 조카를 살리는 수는 이뿐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 놈한테 잡혀 죽든, 밀고를 받은 병졸들한테 끌려가든, 준호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다.”

 

 

 단숨에 술잔을 들이킨다.

 

 

 “-이 부근 서학도 명단이 밀고 되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나와 준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도.”

 

 

 온화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둥글고 고운 눈썹 아래 속눈썹이 긴 민 눈이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으나, 연지를 바른 입술만이 피처럼 붉어 마치 그림 속 여인이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육조대로 어스름 녘, 여인은 겁도 없이 범신의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동지사 어르신이 맞으신지요.”

 “그러하다만, 뉘시오?”

 “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사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오천 냥이니, 보름 후 술시까지 주 선비님 댁 앞에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굳이 주 선비, 즉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집을 언급했다는 것은 적어도 제가 서학도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도 모르게 백단향이 나는 그 밤 속 준호가 떠오르자 등골이 섬뜩하게 곤두서는 느낌이었으나 부러 느긋하게 한숨을 쉰다.

 

 

 “어허, 오천 냥밖에 부르지 않았다니 심히 섭섭하나 다행이라고 해도 좋겠구나. 더 필요하지는 않느냐.”

 “-여전하네요, 그 구역질나도록 뻔뻔한 모습은.”

 

 

 돌아보는 장옷 사이로, 저를 쳐다보는 눈에는 시커먼 악의만이 차있었다.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명징한 눈. 어렴풋한 기억을 자극하는 그 홍채와 마주하다 말고 범신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 나를 알더냐.”

 “여전히, 저만 올곧으시고 저만 높으신 사람이군요, -, 범신.”

 

 

 그리도 청일했던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느끼게도 하는 악의에 찬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가 두개골 안으로 뭉뚱그려지며 단 한 번도 삭히지 못했던 목소리와 겹쳐진다. 범신은 동백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떠올리면서도 제 안에서 20여 년간 한 순간도 지운 적 없던 하나의 이름을 끌어올렸다. 그 이름이 입술에 올라앉은 순간 범신은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찌해야 준호를 살릴 수 있는지 그 길이 제 앞에 환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비록, 제 길이 가시면류관을 쓰고서 십자가를 짊고 가야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초희.”

 “잊으셨다 해도 가증스러웠겠지만, 그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이름이 썩 달갑지는 않습니다.”

 

 

 둥글고 선했던 인상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져버렸다. 아까와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로도 완전히 달라진 그 표정 그대로, 여인은 눈을 가늘게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Posted by habanera_

 “제 안에 이 것이 계속 날뛰는 거죠, 아저씨?”

 “-준호야.”

 “어떡해야 이것이 나갈까요. 저 스스로 죽으면 될까요.”

 

 

 헛웃음 치는 와중에도 제 손이 묵주를 감아쥐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님, 자비를 베푸소서. 혀끝에 맴도는 감상 같은 기도를 뇌까리면서 준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여동생을 죽이고도 또 다른 생명을 잡아먹으려 하는 나는 짐승도 무엇도 못될지어다.

 

 

 저주 같은 눈물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치받고 있을 때 범신이 내민 손이 묵주를 감은 준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말 하지 말어라, 아가.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다. , 준비를 하마.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어라.”

 

 

 안타까우면서도 또한 짙은 눈이었다. 그리도 강건했던 눈에 언뜻 비치는 눈물과, 그리도 짙고 성숙한 눈 안에 선명하게 어리는 슬픔과 당부에 준호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주저하였다. 제 가족을 잡아먹고도 다시금 다른 이를 죽이려 드는 저는 당연히 죽어야 하건만, 이렇게 저를 붙잡아두는 네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아저씨.”

 “그래.”

 “베드로.”

 “불렀느냐.”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유독 뚜렷한 그 눈에는 가릴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가 뒤범벅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러진 곳 없이 투명했다. 가리지 못한 투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범신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준호가 들고 있던 장미 묵주가 제 손 안에 자국을 남겼다.

 

 

 “네가 포기해달라고 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터이다.”

 

 

 이번에도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준호였다. 별을 잉태한 밤을 애써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준호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고집 좀 그만 부려요, 춘추관의 개망나니.”

 “하느님께는 그저 온순한 한 마리의 개가 될 지어니.”

 

 

 그제야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준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세례, 받을게요.”

 

 

 눈이 마주쳤다. 빛나지 않는 눈물이 고인 눈이었다.

 

 

 “-그러면, 제 안의 이것도 조금은, 얌전해질까요.”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범신에게 멋쩍게 웃어 보인 것은 제 나름이 가진 배려였을 터였다.

 

 

 

 준호가 세례명으로 고른 것은 아가토였다. 범신과 문모와의 상의 끝에 정한 이름이었다. 과거 구마자였다던 이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은 그만큼 준호가 구마 의식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범신의 희망이 섞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낯선 발음이 어색한지 몇 번이나 혼자서 중얼거리던 준호는 범신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가토.”

 “, .”

 “걱정 하지 말아라.”

 

 

 그제야 제가 쥐고 있던 묵주를 내려다본다. 이제는 붉은 색을 세는 편이 더 빠른 검은 장미 묵주, 쥘 때마다 악의 서린 속삭임이 점점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리게 흔들리는 홍채에 범신은 그 머리카락을 향해 뻗어 가는 손가락을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짓는다.

 

 

 “다 잘 될 것이다. 괜찮아.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마.”

 “어떻게 아저씰 믿어요.”

 

 

 부루퉁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입술에 희미하게 웃음이 어린다. 그 날 이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입술에서 슬쩍 시선을 떼어낸다. 가슴에 얹히는 무거운 죄책감과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부러 말을 이어나간다.

 

 

 “실패에서 배운다지 않더냐. 잘할 자신이 있다. 곧 보름이니 그 때에 맞추어 날을 잡도록 하자.”

 

 

 흔들리던 동공조차 당신 앞에서는 올곧아진다. 그러나, 올곧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실은 본디 성정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 범신은 물기가 물크러지는 준호의 눈길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뜻하지 않은 미소마저 띄운다. 두터운 손을 뻗어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읊는다.

 

 

 “걱정 말아라. 내 약조하지 않았더냐. 너를 포기하지 않기로.”

 

 

 그 한 마디에, 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숙부인 치헌 앞에서도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심부들이 당신 앞에서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무서워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감사해요. 지현아. 후두 너머 갈 곳 잃은 말들, 열 살 이래로 꾸준히 삼켜 이제는 심장 어딘가 굳은살로 낱낱이 박힌 언어들이, 네 앞에서는 녹아 넘쳐흐른다. 애써 입술을 내리누르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리자 손바닥만 했던 온기가 어깨로 내려온다.

 

 

 “믿어다오, 준호야. -, 아가토.”

 

 

 바람결에 흘러가는 말처럼 따라붙는 그 호칭에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이미 범신은 큰 걸음으로 성큼 성큼 멀어진 뒤였다.

Posted by habanera_

 가느름하게 뜬 눈이 저를 쳐다보자 준호는 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저도 제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드밀어진 말에 오히려 용기가 생긴다.

 

 

 “, 만날 자기가 좋아하는 데만 가고, 나 가고 싶은 데는 한 번도 안 데려갔잖아요.”

 “허 참, 네가 먼저 말한 적은 있더냐? , 생떼만 쓰던 녀석이 말은 많구나.”

 

 

 그러면서도 딱히 거부하는 기색은 없다. 저를 보지만 동공보다 안 쪽을 살피는 듯한 그 눈에 일순 한 마디가 툭 내뱉어지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겨우 막아낸다. 그를 무엇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범신은 동백선을 펼쳐 제 입매를 가린다.

 

 

 “그래, , 꽃을 보고프다는 말이지.”

 “, 여자 같은, , 기생집 이런 데 말구요. , ! 진짜 꽃! 우리가 그 때, 빨간 동백 봤던 거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화가 치밀어 그렇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범신이 오히려 황당한 웃음소리를 낸다.

 

 

 “허허, 아니, 누가 기생집엘 간다든? 저 혼자 화가 나 그 야단이구나. 오냐, 알았다. 내가 명색이 동지사인데, 너 가고픈 데 한 군데 못 데려가겠느냐.”

 

 

 동백선을 소리가 나게 접더니 준호의 곁에서 반 발자국 앞서 걷는다. 찰랑이는 갓끈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 스치는 옷감 소리가 제 심장 소리를 가리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캄캄하게 이울지는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동백이 보이기나 하겠느냐마는, 사실 준호에게 동백 구경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눈매가 처연하게 고왔다. 기름하게 한쪽만 쌍꺼풀이 진 눈에는 물기가 번져갔다. 평소에도 사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선이 두드러지는 얼굴에 나른한 색기가 퍼져나갔다. 풀린 채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이 희게 질린 얼굴과 어울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 없이 붉은 입술이 제 입술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던 이유가. 찢겨진 꽃잎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애달픈 입술이 찰나로 닿아오고, 암흑 속에서도 별을 품었노라 믿게 하는 네 동공을 마주하면서 사실 범신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목덜미를 부드럽게도 훑어 내리는 그 손끝이 주는 감각에 몸이 떨리기도 전에 순간, 너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 생각하였다.

 

 

 “, 신 차려, 최준호!”

 

 

 멈칫하던 순간에 노성이 터져 나왔다. 둘 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누가 보았다면 웃음을 금치 못할 광경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진지했다. 준호는 여전히 예의 요염하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지우지 못 한 채였다. 물에 젖은 것인지, 혹은 제 타액에 젖은 것인지 물 위에 비친 붉은 초승달을 입술에 떠올리면서 준호는 다시 범신을 끌어안았다.

 

 

 “추워요, 아저씨. , 너무, 추워요. -무서워요, 아저씨.”

 

 

 일순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뚜렷한 무구한 눈에, 그리고 이어지는 그 끝말에 범신은 판단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래, 아가. 준호야. 네 무섭다면 내가, 그런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피가 번졌다.

 

 

 황망하게 범신을 밀쳐낸 것은 준호 스스로였다. 제 입술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틀거리는 불안정한 걸음으로나마 범신에게서 멀어진다. 교태 어린 자태는 어디로 가고, 비명이라도 지르듯 거칠게 울음 섞인 포효를 내뱉는다.

 

 

 “제기랄, , 돼요! 그러지 마!”

 

 

 여린 입술을 무참하게도 짓씹은 고통이 준 대가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준호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억지로 기어가며 범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귀신 들린 몸이에요, 당신과는 관계, 없잖아! 도망가, 도망가요! 이러다 우리 둘, , 죽어!”

 

 

 안개라도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으로 광경이 스쳐갔다. 유달리도 믿음직해 보이는 강건한 네 얼굴을 감싸 입을 맞추고, 젖은 혀를 섞고, 그리고 너를 끌어안은 채 붉은 동백이 한 아름 꽃을 피워낸 차가운 호수로 곧장 뛰어들던 나.

 

 

 그 모든 순간 중에서 역겨운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너를 죽이려던 내가, 너를 죽이려는 내 안의 마귀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준호는 고장 난 것처럼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무작정 범신에게서 멀어져갔다. 벗겨진 신발을 손아귀에 우겨 쥔 채 얼굴을 진창에 처박으면서도 기어가는 무릎은 멈추지 않는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한 치라도 더. 너를 죽이려는 나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

 

 

 “-아가, 준호야.”

 

 

 다시금 혼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네 목소리가 구원처럼 울렸다. 아니, 그저 너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까무룩 기절해버린 준호의 입술에서 달게 비친 피를 지워 등에 업으며 범신은 그저 묵묵히, 달도 없는 그 밤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당신이 서렸다. 당신이 아닐 리 없었다. 자정이 웅크린 장지문 너머 익숙한 그 그림자는 당신이었다. 사향보다 짙으면서도 묵직한 그 향기는 당신이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낮게 읊조리면서 짙은 당신의 향기를 애써 폐부에서 몰아내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날뛰듯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빌어먹을 심장은 여전히 가슴 속에서 나직하지도, 작지도 않게 멋대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이 모두 희게 새어버릴 때까지.

 

 

 너와 나는 서로가 거기에 있음을 알면서도 차마 한 마디조차 내지 못하던, 그런 찰나들이 너무나도 깊었다.

Posted by habanera_

 “오셨습니까.”

 

 

 이제는 왜 그리 조용히, 그리고도 잰 걸음으로 대문 뒤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저 온화한 인상의 선비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 만큼 제 표정을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준호는 미간에 새긴 세로줄을 펴지 않았다. 설득 당해 오기는 왔다만 생리적으로 드는 불편함과 이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인지 문모는 자연스러운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통 저에게 말씀을 많이 하셔서, 대체 어떤 학문이기에 이리 열심히 말씀을 하시나, 들어나 보는 심경으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무례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에 범신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나 싶었지만 문모도 여전히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 마음 이해합니다. 그럼 편히 계시다 가십시오. 저는 미사가 있어서 이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여 궁금하시다면 지금으로부터 한 식경 뒤에 예배당, 아니 뒤뜰에 있는 안채로 오시지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다. 제가 혹여 나쁜 마음을 먹고 여기를 뒤지거나 하면 어쩌려고, 꺼리는 기색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준호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범신을 쳐다본다.

 

 

 “원래 이렇습니까?”

 “네가 무엇을 물어보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은 좀 특이하긴 하구나.”

 “역시 그렇,”

 “평소에는 굳이 사람을 내보내지도 않으신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이지. 다만 그래도 들키면 곤란한 곳이라, 사람을 가리기는 하신다만.”

 

 

 당혹스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 준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범신은 느긋한 표정으로 제 옷자락을 다듬기도 하고, 손목에 걸어두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청에서 들어온 신기한 문물이 집에 잔뜩이라 하던 세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닌지 제 소맷자락에서 세세한 눈금이 잔뜩 새겨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본 범신이 몸을 일으킨다. 가늠할 수 없던 어둠은 어느 새 꼬리를 끌며 감추고, 그 눈 안에는 무구한 순진이 들어차 있었다.

 

 

 “가자, 핏덩아. 이제 미사 시간이로구나.”

 

 

 그 순간과 그 시간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준호 자신도 몰랐다. 다만 그는 남녀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고, 신분 구별 없이 앉은 그 자리에 제가 알던 우주가 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가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것인지 뒤집힌 하늘을 걷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몽롱하게 걸음을 옮기는 준호를 알아챈 범신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다음 날부터는 굳이 제가 찾으러 가지 않아도 저가 찾으러 오겠거니, 하는 웃음이었다.

 

 

 

 “세례, 안 받을래요.”

 

 

 높지는 않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쩡하고, 공기를 연소시켰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문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준호와 범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범신은 문모에게 눈짓을 하고 곰방대로 준호의 어깨를 톡 치더니 먼저 문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준호의 앞에서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든다. 성격대로라면 곰방대로 어깨라도 힘껏 내리치려나, 어깨를 움츠렸던 준호는 아무리 기다려도 범신이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올린다.

 

 

 “힘이 드느냐.”

 

 

 나직한 한 마디였다. 동시에 제 발언을 이해하는 말이기도 했다. 울컥, 홍채가 아려와 준호는 고요하게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 날 이후 문모에게서 교리 공부를 받을 때마다 준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더랬다. 태어난 것이 죄라 한들, 그 어여쁘고 어린 제 동생은 어떠한 연유로 개에게 물려야 했는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이유로, 왜 그 착하디착한 아이가 연옥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지. -차라리 저를 죽일 것이지. 검고도 큰 개가 무서워 제 어린 동생이 짓이겨지는 것을 빤히 보고도 혼자 살겠노라 도망친 큰 죄인이 바로 여기, 제 코 앞에 당도했음에도.

 

 

 세상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셨다던 예수님. 그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흠숭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도 불쑥 불쑥 치받는 물음은 결국 준호를 세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한참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준호를 기다려주던 범신은 느릿하게 손을 들더니 그 커다란 손으로 준호의 목덜미를 다정히도 두드려주었다.

 

 

 “네 잘못도 아니고, 네 동생-, 지현이 잘못도 아니다.”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몰려오는 감정들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네가 미워 준호는 네 손을 걷어내지도 못하고 숨죽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딘 햇살을 담아 아롱지는 눈물이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뺨에 투명한 선으로 이울진다. 그리고 준호는 제 귓가를 침범하는 차가운 기운에 잠깐 움찔, 귓가를 매만지며 얌전히 범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민해도 괜찮다. 네게 세례를 강요하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야고보 신부님을 믿고 교리 공부는 더 해보는 것은 어떠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준호는 턱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내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차마 놓지 못한 소맷자락을 그저 손가락 새 얽은 채로, 그 눈에 맺힌 눈물과 모든 슬픔은 여직 지우지 못한 채로, 준호는 오래, 그 소맷자락과 그 소맷자락에 엉긴 동백선을 놓지 못했다.

 

 

 결국 준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낯이 창백해졌던 준호였다.

 

 

 “아저씨, , 꽃 좀 보여주면 안 돼요?”

Posted by habanera_

 문모가 한숨을 내쉬며 마주친 선량한 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여실했다. 범신의 등 뒤에서 애꿎은 제 옷자락만 내려다보던 준호는 어젯밤 범신이 행한 일이 그리도 위험했던 행위였는지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대로 잠든 저에게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느낌이었지만 하기야, 생각해보니 젊은 여인의 몸이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움직인 것을 보면 저와 범신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었기는 한 듯 하다.

 

 

 “그리 되었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지금 이 분 몸에 계시다구요.”

 

 

 투명한 준호의 눈에 선의로 가득한 눈이 몰아친다. 문모는 맑은 눈으로 가는 준호의 손목을 끌어다 거기에 얽힌 장미 묵주를 느릿하게 바라본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구마 의식을 하는 수 외엔. 그리고 이 분도, 반드시 믿음을 가지셔야 할 터입니다.”

 “?!”

 

 

 갑작스러운 말에 한심하게 뒤집어진 목소리가 나왔지만 누구도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없었다. 범신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준호를 빤히 돌아본다.

 

 

 “들었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이어진 것은 형조의 망나니가 내지르는 긴 부정의 비명이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내 목숨이라도 바쳐 너를 구해주겠노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사이비 신자라고 밀고 당하는 것이 먼저겠습니다! 대관절 왜! 어제처럼 그, 단매라는 기생처럼 기마 의식인가 구마 의식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왜 믿어야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어제 실패한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더냐. 단매라는 기생에게 믿음이 없었고, 함께 그 의식에 있던 너 또한 믿음이 없으니 그리로 옮겨간 것 아니겠냔 말이다.”

 

 

 전략을 조금 바꾼다.

 

 

 “아가, 준호야. 너도 전략서를 읽어본 적 있지 않느냐. 네가 그 분을 믿지 않는 상태로 구마 의식을 한다는 것은 적진에 어떠한 무기나 갑옷도 없이 싸우러 간다는 말과 같다. , 혼자 적진 한가운데서 적장의 목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 그건, 그렇지만...”

 “또한 본디 이 것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학문의 일종이기도 하다. 신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셈 치고 시작해보는 건 어떠하냐.”

 “, 렇다고 한들, 저는 형조의 정랑이,”

 

 

 우물쭈물, 아까와 같은 기세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허리를 잡아챈다.

 

 

 “처음에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터.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내가 너를 저녁마다 찾아가마. 치헌이와 너의 집에도 내가 잘 말해둘 수 있다.”

 

 

 여기까지 몰아붙이자 차마 더는 거절할 수 없겠는지, 말을 안으로 삼켜가며 푹 수그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귓불이 엷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간 것은 승기를 잡았다는 기쁨에 도취된 범신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범신은 뻔질나게도 형조와 준호의 주변에 맴돌았다. 형조에서 만나지 못한 날에는 준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목덜미를 감싼 동정 깃을 들어 올려 주막이나 저 좋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기 일쑤라, 처음에는 기대하며 범신을 기다리던 준호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이거 의미가 있습니까?”

 

 

 또다시 이어진 납치 행각에 도저히 참지 못한 준호가 상을 내리쳤지만, 시끄러운 주변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흔한 듯 눈길만 한 번 흘끗 주고는 다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간다. 첫 만남, 두 사람이 동백 호수로 가는 길에 들렀던 바로 그 주막이었다.

 

 

 “너는, 의미가 없느냐?”

 “아니, , 저번에 들어보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야 한다는 것 같던데, 그냥 아저씨가 술 마시고 싶어서 나 꼬시는 거 같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보는 준호의 손목에 휘감긴 묵주는 저번과 비교하여 확연히 검은 장미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막걸리를 벌컥 벌컥 들이키며 그를 잠깐 훑어본 범신은 준호의 물음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저 목울대를 일렁인다. 잔에 남은 술을 모조리 마신 후에도 한 동안 입을 떼지 않던 범신은 참을성 있게 제 대답만 기다리는 준호를 향해 씩 미소를 짓는다.

 

 

 “, 이제 그럼 우리들의 하나뿐인 하느님을 믿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랍니까.”

 “네가 그러하니 이런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준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벌겋게 버무린 배추 겉절이를 크게 한 입에 털어 넣은 범신은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무작정 믿지도 않는 너를 앉히고 책이나 읽혀보았자 네 마음에 가닿기나 하겠느냐.”

 “그렇다고 이리도 무작정 술이나 퍼마시면 제가 그 학문을 퍽이나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리도 너에게 술을 사주며 잘 구슬리고 있지 않느냐. , 이 아저씨가 주는 잔이나 넘치게 받거라.”

 

 

 그때 보았던 기세나 다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능글맞게 말을 받아치며 준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툴툴거리면서도 술을 버리기는 아까운지, 홀짝 홀짝 마셔대며 불신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다.

 

 

 “너는 우리가 공부하려는 학문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 -갑자기 물어보시어도. , 그러니까 유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

 “그러하면 유교는 무엇이냐?”

 “춘추 전국 시절 공자님께서 주창하신 학문으로 인을 가장 근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이라는 것은-, 제 몸을 수양하고, 그를 통해 제 주변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범신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앉는다.

 

 

 “공자께서는 제자들이 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다고 했는데, 저는 그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인이 없으면 효도 없고, 애도 없고, 덕도 없지요. 결국, 인이라는 것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테두리-정도로. 그게 제가 납득한 이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것인지 이제는 범신이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허면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무엇이냐니요. 사람이, 사람이지요. 이 지상에 태어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사람이지요. 우스운 질문을 다 받습니다.”

 “너희 집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복길이도 사람이더냐.”

 “사람이지요.”

 “그럼 복길이가 따라가는 삶은 무엇이냐. 제 본디의 행복이냐, 주인인 너희의 행복이냐.”

 

 

 그제야 잔에서 눈을 떼어 범신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엄격한 눈길이 저를 사로잡는다.

 

 

 “집안에 갇히어 화초처럼 저를 찾아주는 이만 오매불망 기다리며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녀자들도 따르는 삶이 있더냐. 그에게도 인이라는 것을 베풀어주느냐. 애초에, 인이라는 것은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말문이 막힌 준호가 대답하지 못하자 범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설령 인이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왜 누구는 평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추구할 방법조차 주어지지 않았느냐. 다 제각각 행복이 다를진대, 누군가는 평생을 타인의 밑에서만 일해야 하느냐. 그뿐이랴, 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인 것인지.”

 

 

 범신 또한 술이 오른 것인지 준호에게랄 것도 없는 말을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동백선을 쥔 손가락에 힘이 올라 하얗게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준호가 말없이 술잔을 들이킨다.

 

 

 “-좋습니다. 가봅시다. ‘사람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그게 뭔지, 한 번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호기롭게 술잔을 내려놓은 준호가 말을 끝내자 범신이 얼핏 시선을 들어 맞춘다. 짙으면서도 광막한, 알 수 없는 어둠이 슬픔처럼 드리운 눈. 그 눈에 홀리듯 준호는 입술을 깨물고, 빽빽한 슬픔이 새벽처럼 밝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려본다.

Posted by habanera_

 그리고 아침이 되었고, 뜬 눈과 기도로 밤을 지새운 범신은 벌건 두 눈으로 첫 닭이 울자마자 잠든 준호를 걸머지고 단매의 처소 문을 열어젖힌다. 하품을 참지 못하고 청소를 하던 머슴이, 놀란 토끼 눈으로 두 사람의 태를 번갈아 바라보자 저와 마찬가지로 아마 한숨도 자지 못했을 채련에게 전갈을 한다.

 

 

 “채련에게 전하거라. 단매는 괜찮을 것이다. 오늘 부로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새벽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이었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이 발자국마다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움직임에 업혀 있던 준호가 웅얼거리며 그 등에 깊이 고개를 파묻는다.

 

 

 “아저씨, -괜찮아요?”

 “그래, 너 괜찮다.”

 “아니요, 아저씨 말이에요. 밤새, 누가 손을 잡아줬어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범신의 귀를 수놓는다. 나른하고, 낮지만 동시에 무구한 목소리다. 범신의 등에 파묻혀 몽롱한 목소리로 이야기 타래를 풀어놓는다.

 

 

 “아저씨 맞죠? 지현이가, 그렇게 된 다음에는 혼자 잤거든요.”

 “다 컸구나.”

 “아니에요, 혼자 자는 거 무서웠어요. 근데요, 같이 자달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 치헌이한테라도 같이 자달라고 하지.”

 “안 돼요. 지현이는, 지현이는 혼자, 매일 혼자 자야 하잖아요.”

 “...”

 “지현이를 혼자 보내놓고, 오빠인 내가 어떻게, 그래요.”

 “그래, 우리 준호. 장하다.”

 “근데 사실 너무 무서웠어요. 매일 밤, 지현이를, 괴롭힌, 개가 나왔어요.”

 “준호야.”

 “도망치려고 해도, 꿈이니까, 항상 신발이 없어서 발이 너무 아팠어요. 도와달라는 목소리도 안 나왔어요.”

 “마음속으로라도 불러보지.”

 “매일 불렀어요. 누구든지 좋으니 와달라고.”

 “안 와줬어?”

 “. 근데요, 어젯밤에야 겨우 왔어요.”

 “...”

 “누가 우는 내 손을 잡고, 밤새도록 내내 괜찮다고 해줬어요. 10년 만에.”

 “최준호.”

 “그거, 아저씨 맞죠?”

 “...”

 “아저씨 맞는 거죠?”

 

 

 대답 없는 그 뒤로 고른 숨결이 새근새근 내려앉는다. 범신의 등에서 마치 생전 처음으로 단잠을 자게 된 사람처럼 단정하고도 편안한 숨을 내쉬는 준호에게 범신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허위허위 걸어가는 등 뒤로 천천히 태양이 떠오른다.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제 집에 도착한 범신은 다시 한 번 더 자명루에 사람을 보내야 했다. 제 동백문 접선을 깜박, 단매의 처소에 두고 온 탓이었다.

 

 

 

 “듣기에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너는 혼자가 아니다.”

 

 

 ‘또 무슨 헛소리랍니까.’하며 한심해하는 눈빛을 보낼 줄 알았지만, 제 눈으로 보았던 어제 광경이 잊히지 않았던 준호는 순순히 범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제 결국 준호가 들어오지 않았던지라 밤새 잠 한 숨 못 자고 준호를 기다리던 치헌에게는 자명루를 나서는 길에 이미 전갈을 주었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범신의 집도 아닌, 크지 않지만 안팎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초가집이었다.

 

 

 “어제, 구마를 하던 도중에 마귀가 가까이에 있던 네 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무래도 그 말만큼은 믿기지 않았던지 반문한 준호는 새삼스레 제 손등과 몸을 둘러본다. 굽혀지는 긴 손가락과 하얀 팔뚝.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감각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범신은 그 손목을 끌어 소매를 조금 걷어준다. 손목에는 문모에게서 받았던 붉은 장미 묵주가 겹겹이 감겨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검은 색 장미가 군데군데 섞여든 묵주였다.

 

 

 “이 묵주가 네 안에 있는 놈을 자제시키고 있는 듯 싶으나, 얼마만큼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 있다간 네가 그 놈에게 삼켜질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것이다.”

 “-그럼, 죽어요?”

 “악마에게 삼켜진 영혼은 천국에도 연옥에도 가지 못한다. -미안하다, 준호야.”

 “아저씨가 왜...?”

 “내가 네 이름을 부른 탓에, 들어가 버린 듯 하다.”

 

 

 준호가 지닌 눈빛을 차마 마주 하지 못하고 범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당황해 만류하는 준호를 무시하고 장을 끊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맹세한다.

 

 

 “내 너를 책임지고 반드시 그 마귀에게서 되찾아 내겠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찾아내마. 그러니,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겠느냐.”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은 무저갱. 빛을 품을 수 없는 어둠 속에 담긴 것은 의지와 단호함뿐이었다. 말 그대로, 제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이루어내겠다는 결연한 세계. 한 점 반문도 허락지 않는 그 기세에 준호는 결국 그 날 오후 범신과 함께 문모에게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베드로 형제님. 어쩌자고 그리 무모한 일을 행하셨단 말입니까. 자칫 베드로 형제님의 목숨까지도 위험했습니다. 아니, 이미 뒤엣분에게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지만요.”

Posted by habanera_

 “닥치거라.”

 

 

 두터운 눈썹이 움틀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단매의 입술이 쉼 없이 여닫힌다.

 

 

 “사랑한다던 네 놈 입은 거짓만 핥아먹는 입으로구나. 그 혀에서 나는 썩은 내에 내 코가 비뚤어지겠다.”

 

 

 긴 지팡이를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모한다더니, 경애한다더니, 그 말들은 모두 겉멋만 치장한 거짓이었구나, 영감쟁이. 그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네 그 알량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느냐. 사랑하던 여인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이름을 부르짖을 때, 너는 어디에 가있었느냔 말이다.”

 

 

 일순 수줍게 미소 짓는다.

 

 

 “-감사해요. 그대를 사모하겠노라는 그 말,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붉게 핏줄이 드러난 손이 가녀리게 허공을 휘젓는다. 침상의 네 귀퉁이에 묶인 채로 하늘하늘, 손가락을 움직이다 말고 발작적인 웃음이 터진다.

 

 

 “사람 잡아먹은 네놈들이 도대체 나와 무엇이 다르냔 말이냐. 어떤 자격으로 나를 쫓아내겠노라 하느냐. 입이 있다면 말을 해보거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사람 잡아 먹은 귀신 놈들아!”

 “할 말 없다, 마귀.”

 

 

 놀랍게도 평온한 얼굴로, 긴 봉을 단매의 목으로 들이댄다. 봉의 끝에는 반원형의 둥근 테가 붙어 있어 그 둥근 테 안으로 단매의 목이 꼼짝없이 갇힌다.

 

 

 “나는 죄를 지은 몸이고, 너와 다르지 않은 짐승보다 못한 놈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나직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에 걸쳐 죄를 이고 나갈 것이다. 내가 따르는 분께서는 인류의 죄를 온몸에 걸머지고 가셨는데, 나는 겨우 내 죄만을 지고 살아 갈 테니 누구에겐들 무어라 원망할 말이 남아 있겠느냐.”

 

 

 단매의 이가 무섭게 맞부딪친다. 말이 빨라지며 이국의 언어들이 튀어나온다.

 

 

 “诅咒你,又老又健的伪君子.(너를 저주한다, 늙고 건방진 위선자). Sterben Sie jeden Tag.(하루라도 빨리 뒈져버려라). 世界のどこにも歓迎されるところはない.(세상 어디에도 네가 환영받을 곳은 없다.)”

 “알고 있다.”

 

 

 짧게 말하더니 강하게 봉을 짓누른다. 그 기세에 괴로운 듯 몸부림치며 짧은 숨만을 다급히 내쉬지만 입술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굳이 강한 자를 노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위선자.”

 

 

 급작스럽도록 고요해진다. 썩은 숨결마저 사라진 착각에 빠졌지만, 범신은 반쯤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아까 단매를 제압하던 묵주가 준호의 것임을, 그리하여 준호에게는 어떠한 신성한 도구도 없음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준호는 고개를 떨구어, 숨을 가다듬을 때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어깨만이 범신의 눈에 들어찬다.

 

 

 “, 준호.”

 

 

 평소 준호의 목소리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가 그 어깨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범신은 아차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은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짧은 증거였다. 그리하여 일부러 저와 준호의 이름을 단매 앞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보이는 단정한 턱선과 살짝 구부러진 듯한 콧날은 그대로인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끌어올려지는 입술에 결국 범신은 숨기지 못한 장탄을 토해낸다.

 

 

 “여리디 여린 놈이로구나. 여직 그 여동생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눈이 마주쳤다. 일순, 바닥없는 새까만 눈에 심장이 떨어졌다. 준호야. 차마 혀끝으로 올리지 못한 이름을 되뇌며 움켜쥔 손목에 장미 묵주를 감아주었다. 손목에 묵주가 감기자마자 발작적으로 몸이 떨리다 말고 사그라지지 못한 악의를 토해낸다.

 

 

 “그래보았자. 믿음도, 자신도 없는 놈이다. 어디 마음껏 발버둥치거라. 그러나 이놈은-, 내 것이다.”

 

 

 미소가 활짝 벙그러진다. 눈물에 젖어 초승달보다 곱게 휘어진 두 눈에 붉은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만개한 모란보다 아름답다. 이성을 초월하는 감각에 아득함을 느끼면서 범신은 준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묵주를 감은 두 손을 쥐고서 기도를 시작한다. 찰나의 미소가 뇌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Posted by habanera_

 “마귀다.”

 

 

 간결하게 말하고는 준호가 가져온 제 짐 꾸러미를 연다. 안에는 알아볼 수 없는 이국의 글자가 적힌 투명한 병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단매가 누워있는 침상에서 뚜렷하게 경계를 그리는 하얀 선. 요 사이 잘 나간다는 평판치고는 의외일 정도로 살풍경한 단매의 처소에서 거의 유일한 가구인 화장대 위에 그 병들을 차례로 올려두며 범신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되었다. 너는, 이 아가씨를 잊어버리고 살아도 된다. 성공한다면 내일부터는 멀쩡해질 테니.”

 

 

 그리고는 다시 꾸러미에서 긴 천을 꺼낸다. 한쪽 꼬리가 긴 십자 모양이 자수로 놓인 보랏빛 천 여러 개를 꺼내어 침상의 네 귀퉁이에 묶고, 다시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꼬아 그대로 단매의 사지를 결박한다.

 

 

 “, . 아니, 이 말도 안 되는 모습이랍니까.”

 

 

 비명에 가까운 준호의 외침이었지만 범신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십자가와 성수, 이국의 여인이 그려진 종이까지 꺼낸 범신은 낮게 읊조리며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그으면서도 연신 들릴 듯 말듯한 중얼거림을 이어나간 범신이 침상 곁 소금 선을 건넌 순간, 단매의 몸이 들썩였다. 그저 흔히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천장에서부터 누군가 단매의 배를 붙잡고 들어 올리는 것처럼, 전신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일으켜진다.

 

 

 “감히 네가 나를 부르느냐.”

 

 

 몸이 굳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범신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던 준호가, 저 어리고도 가는 몸을 지닌 여인의 한 마디에 온 몸이 경직되었다. 움직임이 멎고서야 제 등에 흘러내리는 땀을 알아차린 준호는 후들거리는 제 다리를 내려다본다. 지금 명백하게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증거들은 공포의 흔적. 온 방을 채우는 악취보다도 먼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에 신체가 얼어붙었다.

 

 

 “위대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내게, 너 따위 것은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다.”

 

 

 코웃음을 치며 십자가를 집어든 범신이었지만 그 손등에 가는 떨림이 번짐을 민감하게도 알아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상 위로 풀썩 몸을 다시 뉘인다. 곧 몸이 반으로 접히려다 말고 범신이 묶어놓은 팔과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힘이 빠진 개구리처럼 전신이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온통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웃고 있는 단매의 입매인 것을 알아차리자 팔에 소름이 끼친다. 그 미소가 향하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늙다리 겁쟁이 따위는 내 간식거리도 되지 않는다. 거추장스럽게.”

 

 

 흐트러져 엉망이 된 머리카락 새로 비식 미소를 짓는 이만이 하얗다. 머리카락을 헤쳐 이마에 성호를 그으려 하자, 눈이 마주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던 단매의 눈은 사각으로 벌어진 염소의 눈. 당황한 범신의 손목을 단매의 이가 깊게 베어 문다.

 

 

 “아저씨!”

 “최준, .”

 

 

 찰나의 순간 간신히 단매에게서 범신의 손목을 낚아챈 준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마자 범신은 나지막이 탄식한다.

 

 

 그리고 단매는, 준호를 보자마자 깊이 입술을 끌어올린다.

 

 

 “이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는 좀, 쓸 만 하겠는데.”

 

 

 범신을 구하느라 이미 소금선 안으로 들어와 버린 순진한 어린 양. 하느님을 믿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선한 일념으로 선을 넘어버린. 짙은 탄식에 저를 맡기면서도 준호에게 단매의 신경이 넘어간 그 때를 노려 단매의 이마에 성호를 긋고 가슴팍에 십자가를 놓는다. 여전히 쳐다보는 사람의 신경을 태워버릴 듯 거친 눈빛이었지만 아까처럼 괴이한 움직임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아가.”

 “아저씨.”

 

 

 저가 잡아놓고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에는 차마 떨쳐내지 못한 죄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구하겠노라는 의지가 공존하고 있어, 범신은 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단매는 떠나갈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더니 거침없이 말을 줏어 삼키기 시작했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린 핏덩아, 세상에나! 너는 저보다도 훨씬 어린년을 잡아먹었구나. 개만도 못한 치. 그래, 너보다야 네 어린 동생년 살점이 개한테는 딱이었겠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 어린 날 제가 저질러버렸던 죄가 천지에 낱낱이 까발려진다. 농도 짙은 땀이 수려한 얼굴을 뒤덮고, 벌써 그 날로 되돌아가버린 아이의 동공으로 입술만 덜덜 떤다.

 

 

 “핏덩이야, 아가! 왜 그러느냐? 이제와 발이 아프기라도 하든? 하긴 제 발에서 꽃신이 벗겨지든, 가죽신이 벗겨지든 알아차리기나 했겠느냐. 저 뒤에서는 아드득, 아드득, 제 동생 뼈 부숴 삼키는 소리만 요란했건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지상에 떨어진 별처럼 방 안을 집어삼켰다. 범신에게 맹랑하게도 대들었던 모습은 간 데 없이,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부서진 동공으로 비척, 단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정신 차려. 정녕 마귀의 말에 넘어가려느냐.”

 

 

 찰싹, 가볍게 뺨을 맞는다. 멍하니 정신이 빠져 있던 준호가 그 몸짓에 그제야 잠깐 고개를 흔들고 범신을 바라보았다. 구원처럼 제 눈에 박혀드는 그윽한 그림자에 눈에서 눈물이 둑 터지듯 줄줄 흘러나왔다. 망가진 인형처럼 범신 뒤에 주저앉아 눈물만 툭툭, 갓끈과 검은 두루마기에 퍼져나간다.

 

 

 “, 아저, 아저씨.”

 “비겁한 것. 이 어리석은 이를 현혹시켜 네 것으로 만들려 했더냐? 가소롭다.”

 “, 늙다리 고기는 줘도 안 먹을 텐데.”

 

 

 인간보다는 이형에 가까운 눈이 마주치자 비싯,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보게나. 사람 잡아먹은 이들끼리 서로 상처라도 핥아주는 태냐? 아주 보기 좋구나. 늙다리 네놈도, 편히 죽기는 틀려먹었다.”

Posted by habanera_

 “...허나, 이것은 사이비가 아닙니까.”

 “세종께서 왜 훈민정음을 반포하셨는지, 그리고 그 글이 암클이라 경멸당하면서도 어찌하여 낮은 이들 모두 그를 사용하는지 아가, 너는 좀 생각할 필요가 있겠구나. -그러하면 이 사이비라는 서학이 왜 낮은 이들 가운데 퍼져 가는지 조금은 짐작이 될 터이니.”

 

 

 알 듯 모를 듯한 범신의 대답에 준호는 눈썹 한 쪽을 들어 올렸다 내리고는 결국 어깨를 늘어뜨렸다. 시간이 없다는 범신의 말도 사실이었다. 형조의 이름을 들먹이기는 했으나 엄연히 준호 독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형조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었기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단매의 향낭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아가, 너 뭐하느냐.”

 “? , 아니, , 약초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좀 하려고...”

 

 

 말끝을 흐리자 범신의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단매를 제 어깨에 짊어진다.

 

 

 “여전히 약초 타령을 한다는 말이지. -그렇다 한들, 이 아가씨가 매 순간 그것들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그리 어수룩하겠느냐.”

 “그러면 어디서...?”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굴러갔으니, 아가, 너도 이 아가씨 방으로 가자꾸나. 요새 이리도 전도유망한 이라 한다면 저 개인 처소 정도는 가지고 있을 터이다. -채련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린다. 기척도 없이 제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서 그들을 기다리고-, 혹은 감시하고 있던 채련도 채련이었지만, 그를 예상하고 불러낸 범신도 범신이었다. 당황스러워하는 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한 말투로 채련에게 앞장설 것을 지시했다. 이미 제 속도를 되찾아 느긋한 채련을 앞세우고, 범신은 무엇인가가 잔뜩 들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제 짐을 준호에게 안긴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로 준호는 쫄랑쫄랑 두 사람을 쫓아간다.

 

 

 “너는 나를 본 적이 없을지언정, 내 너를 본 적이 있다. -주 선비의 댁에서.”

 “-그러합니까.”

 

 

 가채를 화려하게 틀어 올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설핏 가는 웃음을 띄운다. 그 웃음에 마주 웃어 보이며 한없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 또한 단 한 명이신 주인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한 나를 믿고, 이 아이를 맡길 수 있겠느냐.”

 

 

 일순 주저하지 않았다하면 거짓일 것이다. 세월이 새겨진 눈매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고, 입술 끄트머리에 핏기가 희게 지워졌다 다시 서린다. 그러나-, 의외일 정도로 순순히 채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범신이 그제야 숨을 길게 몰아쉬더니 하늘을 확인한다. 쪽빛보다 일렁이는 남색 하늘에 둥근 달이 휘영청 어금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딱 보름이구나. 오늘 밖에는 날이 없다. -채련이 준비는 잘해두었을 테지.”

 

 

 중얼거리다 말고 문을 열어 성큼 성큼 발을 옮긴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준호는 별안간 올라오는 욕지기에 내던지다시피 범신의 짐을 내려놓고 요란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방 안을 떠도는 악취가 워낙에 강렬했던 탓이었다. 범신은 코를 찌르는 그 냄새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조심스레 침상에 단매를 내려놓고는 가슴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하는 준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초심자에게 강렬하기는 하겠구나. 천이라도 주랴?”

 “뭡니까, 이 냄새? 정말, 시체라도 썩는 내 같습니다. 대체 어떤 식물이 이리 냄새가 납니까?”

 “허허, 아직도 약초 타령이더냐. 너는, 저것이 진정 약으로 만들어진 모습 같으냐.”

 

 

 낮게 혀를 차면서 몸을 틀어준다. 범신의 커다란 등에 가려져 있던 단매가 드러난다. 아니, 그것은 제가 아까까지만 해도 보았던 단매가 아니었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붉게 변한 피부에 제 손목을 피가 날 때까지 할퀴는 긴 손톱. 단정하게 가채를 틀어 올렸던 머리는 온통 흐트러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오싹한 형태를 하고 있는, -어떤 것. 준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대체, , 저게, -뭡니까.”

Posted by habanera_

 여전히 의심은 가지만 두 사람 다 이렇게 말하는 데다가, 동지사와 형조의 사람이라는 직위에 채련도 어쩔 수 없이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치떴던 눈매에 다시 가느름한 웃음기를 피우며 곤란하게 눈썹을 늘어뜨린다.

 

 

 “두 분 다 이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고개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아이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며칠간 말미를 주시겠습니까.”

 “아닐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낸다. 부드러워졌던 채련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다시 날을 세웠다. 이번에는 범신이 더욱 진지하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형조의 정랑으로,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와 함께 단매라는 이 기생을 조사하러 온 것이네. 실은 오늘 확인만 하러 온 차였으나 상태를 보아하니 하루라도 더 빨리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지네만.”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뜻에 준호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지다 말고 금세 가라앉는다. 설명하겠다는 말이 이 뜻이었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황에 설명 요구는 뒤로 미뤄두고 아닌 척 저 또한 채련에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어쩌시겠단 겁니까. 오라라도 묶어 형조로 데려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떠돌던 미소가 간 데 없다. 범신의 묵직한 언사를 정면에서 맞받아치는 채련에게서 또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났다. 채련의 말에 범신이 조금 웃음을 짓나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이 아가씨를 그냥 보내주었다가는 단서 은닉의 위험이 있다는 말이지. 날이 밝는 대로 즉시 함께 조사할 다모를 불러올 테니 오늘 밤만 같이 있어도 되겠는가?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함께 있어도 좋네. 내가 따르라는 지침만 모두 따른다면 말일세.”

 “보셔요, 어르신. 지금 이 아이는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가 어찌 단서를 숨긴단 말입니까. 내일 날이 새자마자 제가 이 아이를 데리고 형조로 직접 출두할 터이니,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그럴 수는 없네. 아까도 말했고, 그대가 확인했다시피 우리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이 모든 행각이 이 아가씨의 연기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앞서도 말했듯 원한다면 우리와 함께 있어도 좋네. 다만, 우리 눈 밖에 이 아가씨를 벗어나게 허락할 수는 없네.”

 

 

 조용히 눈을 마주치나 싶더니 단매의 목에 걸린 묵주를 슬쩍 눈짓한다. 그 눈빛에 채련의 낯빛이 일순 하얗게 질린다. 금세 돌아오기는 했으나 채련은 아까까지의 반대가 거짓말인 것처럼 온순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어르신을 따르도록 하지요. 제가 곁에 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오직 영감만을 믿고 나가보겠습니다.”

 

 

 창보다 날카롭고 직설적인 눈빛으로 범신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맺는다. 과연 그저 공으로 이 자명루의 기생 어멈이 된 것은 아닌 듯 웬만한 장수만한 기백이 느껴지는 눈빛과 태도였지만 범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부탁 몇 개만 하겠네. -이 종이대로 준비 좀 부탁하네.”

 

 

 여유만만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종이까지 쥐어주며 손짓으로 그녀의 퇴실을 허락한다. 단숨에 바뀐 행동에 문이 닫히자마자 준호는 범신을 빤히 바라본다.

 

 

 “아가, 왜 그러냐.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느냐.”

 “농치지 마시고, 저 사람도 서학 쪽입니까.”

 “시간이 없구나.”

 “모르는 척 마십시오. 맞지요? 아니, 아무리 기생이라고 한들 아녀자까지 사이비 학문을 배운단 말입니까?”

 

 

 행동이 멎는다. 느릿하게 준호를 돌아다보는 눈빛은 기묘하게 형형하다. 동백문 접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마디가 새하얗다.

 

 

 “아녀자라 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며, 여인이라는 이유로 기껏해야 수예나 놓을 뿐, 더러는 짐승 같은 사내를 만나 평생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오직, 여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로.”

Posted by habanera_
이전버튼 1 2 3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habanera_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