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7. 29. 21:34 2차 끄적/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검은 사제들/범신준호]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22
“제 안에 이 것이 계속 날뛰는 거죠, 아저씨?”
“-준호야.”
“어떡해야 이것이 나갈까요. 저 스스로 죽으면 될까요.”
헛웃음 치는 와중에도 제 손이 묵주를 감아쥐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님, 자비를 베푸소서. 혀끝에 맴도는 감상 같은 기도를 뇌까리면서 준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여동생을 죽이고도 또 다른 생명을 잡아먹으려 하는 나는 짐승도 무엇도 못될지어다.
저주 같은 눈물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치받고 있을 때 범신이 내민 손이 묵주를 감은 준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말 하지 말어라, 아가.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다. 내, 준비를 하마.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어라.”
안타까우면서도 또한 짙은 눈이었다. 그리도 강건했던 눈에 언뜻 비치는 눈물과, 그리도 짙고 성숙한 눈 안에 선명하게 어리는 슬픔과 당부에 준호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주저하였다. 제 가족을 잡아먹고도 다시금 다른 이를 죽이려 드는 저는 당연히 죽어야 하건만, 이렇게 저를 붙잡아두는 네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아저씨.”
“그래.”
“베드로.”
“…불렀느냐.”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유독 뚜렷한 그 눈에는 가릴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가 뒤범벅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러진 곳 없이 투명했다. 가리지 못한 투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범신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준호가 들고 있던 장미 묵주가 제 손 안에 자국을 남겼다.
“네가 포기해달라고 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터이다.”
이번에도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준호였다. 별을 잉태한 밤을 애써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준호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고집 좀 그만 부려요, 춘추관의 개망나니.”
“하느님께는 그저 온순한 한 마리의 개가 될 지어니.”
그제야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준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세례, 받을게요.”
눈이 마주쳤다. 빛나지 않는 눈물이 고인 눈이었다.
“-그러면, 제 안의 이것도 조금은, 얌전해질까요.”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범신에게 멋쩍게 웃어 보인 것은 제 나름이 가진 배려였을 터였다.
준호가 세례명으로 고른 것은 아가토였다. 범신과 문모와의 상의 끝에 정한 이름이었다. 과거 구마자였다던 이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은 그만큼 준호가 구마 의식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범신의 희망이 섞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낯선 발음이 어색한지 몇 번이나 혼자서 중얼거리던 준호는 범신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가토.”
“아, 네.”
“걱정 하지 말아라.”
그제야 제가 쥐고 있던 묵주를 내려다본다. 이제는 붉은 색을 세는 편이 더 빠른 검은 장미 묵주, 쥘 때마다 악의 서린 속삭임이 점점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리게 흔들리는 홍채에 범신은 그 머리카락을 향해 뻗어 가는 손가락을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짓는다.
“다 잘 될 것이다. 괜찮아.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마.”
“어떻게 아저씰 믿어요.”
부루퉁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입술에 희미하게 웃음이 어린다. 그 날 이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입술에서 슬쩍 시선을 떼어낸다. 가슴에 얹히는 무거운 죄책감과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부러 말을 이어나간다.
“실패에서 배운다지 않더냐. 잘할 자신이 있다. 곧 보름이니 그 때에 맞추어 날을 잡도록 하자.”
흔들리던 동공조차 당신 앞에서는 올곧아진다. 그러나, 올곧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실은 본디 성정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 범신은 물기가 물크러지는 준호의 눈길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뜻하지 않은 미소마저 띄운다. 두터운 손을 뻗어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읊는다.
“걱정 말아라. 내 약조하지 않았더냐. 너를 포기하지 않기로.”
그 한 마디에, 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숙부인 치헌 앞에서도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심부들이 당신 앞에서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무서워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감사해요. 지현아. 후두 너머 갈 곳 잃은 말들, 열 살 이래로 꾸준히 삼켜 이제는 심장 어딘가 굳은살로 낱낱이 박힌 언어들이, 네 앞에서는 녹아 넘쳐흐른다. 애써 입술을 내리누르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리자 손바닥만 했던 온기가 어깨로 내려온다.
“믿어다오, 준호야. -내, 아가토.”
바람결에 흘러가는 말처럼 따라붙는 그 호칭에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이미 범신은 큰 걸음으로 성큼 성큼 멀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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