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네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니.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마는, 나는 진실로 너를 애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사랑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선생님은 저를 사랑하셨잖아요. 아껴주고, 예뻐해 주셨잖아요.

 

 

 매우 유감이구나, 나는 단 한 번도-, 인생을 통틀어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이런 쓸 데 없는 장난은 그만치고 나를 좀 풀어주렴.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처럼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신 분께서 사랑을 해보신 적 없다니요. 저는 알아요. 선생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며 위대한 분이신지요.

 

 

 너는 네 마음대로 만들어낸 라는 환상에 너무 붙잡혀 있는 것 같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지금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 않니.

 

 

 거짓말 치지 마세요, 지금 여기에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선생님. 아니, 주란씨. 여기에는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요. 이제는 마음껏 말해주세요. 나를 사랑한다고. 마음 속 깊이 연모하고 있다고. 오직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나는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선생님에게 주란이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일이지. 지금이라면 선생님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단다, 단미야. 이런 장난 그만치자.

 

 

 선생님,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세요? 항상 웃어주시던 선생님이잖아요. 제가 장난을 치거나 실수를 해도, 괜찮다 웃어주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어주셨잖아요. 그 때마다, 선생님의 손바닥에 입 맞추고 싶다고 얼마나 생각했던지. 그 부드러운 손을 핥고 손톱 끝을 깨물어주고 싶다고, 얼마나 바랐는데.

 

 

 하, 하지 마!

 

 

 왜요,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설명해주셨잖아요. 이렇게 선생님 손에 입 맞추는 건 왜 안 되는 일이죠?

 

 

 하지 마, 징그러워!

 

 

 징그럽다니, 아 참, 선생님이 싫어하실 만한 벌레나 쥐 같은 건 여기에 없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아니야! 나는 지금, 네 혓바닥이,

 

 

 간지러우세요? 선생님, 저는 지금 정말 황홀해요. 꿈에서나 했을 법한 일들을 지금 제가 하고 있다니요. 선생님도 지금 괜히 그러시는 거죠? 창피해서.

 

 

 그런 거 아니야, 최단미! 놔 줘, 제발.

 

 

 왜, 왜 화를 내세요. 손목, 별로 아프지 않게 묶었는데. , 혹시 화장실에 가고 싶으신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의자랑 연결해놓은 자물쇠를 풀어드릴게요.

 

 

 대체,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단미야. 혹여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거니?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잘못한 게 있다뇨. 선생님은 제게 모든 걸 가르쳐 주셨는걸요. 제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가르쳐주셨어요.

 매일 보는 하늘이 얼핏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것, 봄을 맞이하여 움트는 신록의 파릇한 솜털 빛깔, 여름 날 소나기가 내린 후 반짝거리는 빗방울과 무지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냄새, 얼핏 고요해보이지만 얼음 아래서 쉬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이요. 모두,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깨닫게 된 거죠. , 선생님을 만나 다시 태어난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런 선생님을, 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선생님? 지금 왜 우시는 거예요? 제가 너무, 선생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기쁘신 건가요?

 

 

 제발, 나를 놔줘. 난 너를 오직 한 명의 학생으로 보았을 뿐, 아니, 내가 모두 잘못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단미야.

 

 

 선생님이 뭘 잘못하셨어요. -그래요, 그 때는 저도 섭섭했어요. , 저 말고 다른 학생의 이마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셨죠?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저는 그 날이 똑똑히 기억나요. 아아, 마침 그 날은 눈이 내리고 난 다음 날이었어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같은 눈이 사락사락 내렸던 그 다음의 날. 게으름뱅이처럼 태양은 늙은 빛만 힘없이 교문 위로, 운동장 위로 던져냈죠. 선생님은 그날 여느 때와 같이 갈색 머리카락을 품위 있게 땋아 올린 채, 그 날씨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카멜 색 스카프를 두르고 계셨어요. 동그란 진주 귀걸이가 선생님의 귓불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죠. 선생님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었어요. 천천히 걸어 교탁 앞에 서신 선생님께선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제게 가장 먼저 미소를 띠우신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셨어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 이름 부를 때 목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 지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 말이 조금 어긋났네요.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오시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눈을 마주치고 학생들의 건강을 봐주시기도 했어요. 특히나 그 날은, 태양빛은 느릿하고 밤새 쌓인 눈 덕에 얼어붙은 공기와, 귀가 아플 만큼 찬바람이 불어 무지 추운 날이어서, 코를 훌쩍거리는 학생들의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죠. 선생님은 유난히 코를 훌쩍거리던, 맞아요, 박소진이라는 그 이름, 일부러 쉴 새 없이 소리를 내가며 선생님의 관심을 끌려던 그 아이에게 다가가셨어요. 그리고는 자상하게 허리를 굽히며 그 계집애의 이마에 부드러운 손을 대셨죠. 망할 계집애. 아픈 척 요란스럽게 코나 훌쩍거리던 그 계집애까지도 선생님은 자애롭게 돌봐주신 거예요, 그게 선생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신 채요. 그 순간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저는 선생님의 그런 자상한 모습까지 모두 사랑하는 거니까 이해해 드릴게요. 속인 사람이 잘못이지 속은 사람은 잘못이 아니잖아요?

 아, 그 소진이라는 얌체요? 걱정 마세요. 지금은 코를 훌쩍거리지 못할 거예요. 훌쩍거릴 코가 있어야 그런 소릴 내지 않겠어요?

 

 

 너, 대체 소진일 어떻게 한 거니? 소진인 네 친구잖니!

 

 

 그딴 앨 친구로 둔 적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만약 그 계집애가 제 친구라면, 어떻게 친구의 연인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죠? -혹시 선생님, 그 애랑 뭔가 더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 없겠죠? 지금 제가 착각하는 거 맞죠?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선생님은 정말 순수한 걱정에서 그렇게 행동하셨을 뿐, 선생님이 사랑하는 건 저 뿐이라는 걸 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걸요. 아아,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선생님을 독점하고 싶었어요.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목덜미에서 좋은 향기를 맡고, 이렇게-,

 

 

 그, 만해! 지금 뭘 하는 거야!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저도 이제 다 자랐으니,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이 꽤 컸거든요. 그리고 책에서 봤는데, 이렇게,

 

 

 그만, 제발, 단미야!

 

 

 선생님께서 이런 목소리를 내실 줄 몰랐네요. 여긴 아무도 없는데, 아직 저에게 맨몸을 보여주시기가 부끄러운가 봐요어머, 우시는 거예요? 좀 창피하실 순 있겠지만, 이제 우린 하나가 될 텐데요. 그렇다고 선생님을 결코 괴롭히거나 울리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제가 옷을 잘 가다듬어 드릴게요.

 

 

 건드리지 마!

 

 

 선생님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내시기도 하네요. 항상 저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줘서 그런지, 이런 목소리도 두근거리긴 하는데 저한테 화내시는 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선생님.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우린 이제 곧, 하나가 될 거니까.

 

 

 대체, 대체, 내가 뭘, 어떡해야 풀어줄 수 있는 거니, ?

 

 

 아, 묶인 데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건 얼마든지 풀어드릴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 혹여나 어디로 가버리시거나 할까봐 이래놓은 거예요. 선생님은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거 같으니까. 후후, 물론 그런 모습도 너무 귀엽지만요.

 

 

 아무, 아무데도 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냐니요. 당연히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그렇죠.

 

 

 사, 사랑은, 사랑은 이런 게 아냐. 이런 게 아니라구!

 

 

 어머, 아까 선생님은 이제껏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이런 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죠?

 

 

 너, 너야말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내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죠. 선생님은 지금 나와 이런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사랑이 뭔지 모르셨을 테니까요. 오직 나와의 사랑만이 선생님 생애 단 하나 있을 사랑이니까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피곤하신 거예요? 눈을 감는 걸 보니 그러신가 보네요. 물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울고 소리치셔서 목이 마르실 것 같은데.

 

 

 -필요 없어.

 

 

 하긴, 선생님께는 저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럼 저만 좀 마실게요. 어휴, 목이 너무 말라서.

 선생님, 주무실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선생님도 저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까지요. 선생님은 듣다가 잠드셔도 돼요.

 

 

 그런 쓸 데 없는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정확하게 기억나요, 처음 선생님을 봤던 날. 전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을 지독한 위선자에 잔소리만 해대는 깐깐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사실 그 이미지는 선생님을 보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어요. 정말, 후후, 정말 웃기지만 전 그 사건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을 싫어하는 편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날. 그 사건이 있었던 그 날 이후 제 생각은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아니, 제 세계가 일변해버렸죠. 모두, 선생님 덕이에요.

 그 날 아침, 나는 또 관심과 애정을 빙자한 어머니의 학대 끝에 등교할 수 있었죠. 이렇게, 제가 어머니의 행동을 학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선생님 덕인데, 후후, 계속 이렇게 선생님 칭찬만 하다 보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그냥 계속 이어갈게요. 아무튼, 제 교복 속은 항상 보랏빛과 푸른색, 붉은 색과 노랑들이 서로 섞여 향연을 벌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교복에 가려지는 부분만 건드렸거든요. 그런데, 정말 아무도 제가 그렇게 어머니께 학대당한다는 걸 몰랐을까요? 하긴, 아무도 학교 이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긴 한데, 그쵸. 매일 있다시피 한 일이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날,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보건실로 데려가서 약을 바르고 안아주기 전까지는요.

 

 

 그건, 그건 교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그 당연한 일을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해해요. 누구도 학교 이사장의 치부를 건드려 그만 두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그치만, 그치만 선생님처럼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내 얘길 들어주고, 그건 사랑이 아닌 학대라고 말해주고,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 사람은 이제껏 한 명도 없었어요. 선생님, 선생님. 나는 그때야말로 선생님이 하늘이 제게 내려준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처럼 훈육을 빙자한 학대를 더 이상 사랑으로 생각지 않게끔 말이에요. 선생님, 그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요, ?

 주무시나 보네요. 그래도 계속 말할래요. 선생님께 줄곧, 내 사랑을 고백할 때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선생님. 나는 그 날 세상이 일변하는 걸 겪었어요.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죠. 선생님의 배려로 하루종일 보건실에 있다가 조퇴를 할 때, 집으로 가는 길을 걸을 때, 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날, 일찍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언제나와 같이 때릴 줄 알았지만 도대체 무섭지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와 앉은 창가에는 청춘기를 지난 햇살이 천천히 금파金波 무늬를 새겼고, 거실의 괘종시계가 규칙적으로 초침을 건너는 소리가 음악으로 귓가에 고였어요.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던 그 집의 형태와 소리와 분위기가, 그저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되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나도 알아. 이런 짓,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누울 때마다 선생님 생각에 숨이 막히게 가슴이 아프고, 매순간 선생님 생각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리고, 잠들면 언제나 선생님 꿈을 꿔요. 참았어요. 아주 많이 참았다구요. 이런 짓, 선생님이 싫어할 거고 나를 진저리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도 생각했지만 어떡해요.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았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내 숨결조차 증오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님이 내 곁에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미칠 것 같은데. 차라리 선생님을 만나지 말 걸, 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알지 못했더라면, 그냥, 금이 가버린 돌 같은 예전의 심장을 평생 가지고 살았더라면 이런 행동, 이런 생각도 안 했을 거란 거, 모르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어떡해요. 이미 알아 버렸는걸. 선생님은 이미 독처럼, 내 심장과 내 폐부, 뇌까지 깊숙하게 스며들어 떼어낼 수가 없는 걸.

그러니까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생님이 내 온몸 곳곳에 퍼진 걸 느낀 지금 이 순간보다 조금만 더, 그래서 그냥 완벽하게 행복한 이 순간에 내 생을 다할 수 있도록,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너, 지금 무슨 소릴,

 

 

 아, 역시. 잠들지 않으셨구나. 아까 물, 마시지 않길 잘하셨네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채단미.

 

 

 아실 텐데요, 선생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제 슬슬 잠이 오는 걸 보니, 약효가 점점 퍼지고 있나 봐요. 선생님, 선생님 무릎에 기대어서 잠이 들어도 돼요? 아마 곧 있으면 여기로 다른 사람들이 찾으러 올 거예요. 선생님의 불쾌한 기분은 곧, 해결이 되겠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는 거예요, 선생님. , 자꾸 눈이 감기네. 선생님 무릎이 참 따스해서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선생님.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래요. , 선생님한테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싶으니까.

 선생님, 부탁 하나만 더 들어 주실래요?

 

 

 -싫어.

 

 

 아, 역시. 그래도 듣고 나면 들어주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선생님, 잘 자라고 해주세요. 우리 단미, 잘 자라. 내 생을 통틀어 우리 어머니도, 단 한 명의 사람도 하지 않았던 말. 잘 자라고, 한 마, 디만.

 아, 잠이 너무 온다. 선생님, 혹여나 내가 잠, 들어도, 깨우지, 말아 주, 세요. 선생님. , 생님. -, ,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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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banera_

 빛바랜 기억 속에서 너는 항상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교복을 입고, 단정한 감람색 넥타이를 늘어뜨린 채 칼날 같이 잘린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등은 언제 누구 앞에서도 굽힌 적 없이 당당했지. 미친개로 소문난 수학 선생에게 잘못 걸려 뺨을 두 대나 얻어맞을 때에도 무너지지 않은 너를 보며 나는, 가끔 가끔, 고아하게 반듯한 네 등을 활처럼 구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에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얗고 얇은 도자기 잔에 자연스러운 입술 자국을 손가락으로 지워내며 눈가에 품위 있는 웃음을 얹는다. 그 미소에 건너편에 아무렇게나 걸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은 입술 한 쪽 끝을 비틀어 올리며 반대로 잔 손잡이를 손가락에 걸치고 한 모금, 소리 나지 않게 차를 마신다.

 

 

 “별 일이네, 박묘란. 네가 나를 보자고 할 줄이야.”

 “나야말로 제나 네가 이렇게 순순히 나와 줄 줄은 몰랐지.”

 “안 될 건 뭐람. 이럴 줄 알았음 수갑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히스테릭한 웃음을 쿡쿡 흘리나 싶더니 일순 몸을 숙여 눈을 맞춘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새까만 눈. 단 한 번도 타인을 포용한 적 없을 것 같은 암흑 속에 오롯이 깃든 것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박묘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기쁜 걸,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균형을 잃은 입술이 사소하게 흐트러진다.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네가 반응할 때마다, 나는 어찌할 바를 잘,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네가, 친구라고 여겼던 이가 있기나 했을까. 목덜미에 간신히 닿을 만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믿기지 않을 만큼 짙은 검은색. 너무나 새까매 오히려 푸른 염료가 담기지는 않았을까 의심하게 하는. 아무렇게나 구겨 입은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이 열려 있었고, 네가 구색이나마 맞춘 넥타이를 한 날에는 전교생 모두가 그날은 복장 검사가 있겠거니, 하고 다시 한 번 더 제 교복을 돌아보곤 했었지. 누구에게도 관심 없는 눈을 하고 단 한 번도 제 밖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너를 나는, 복도에서든 교실에서든 그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자주자주 넘겨다보았다.

 

 

 “이래봬도 우리 같은 학교, 같은 반도 한 적 있지 않았어? 사회에서 더 자주 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묘란의 한 마디에 흔들렸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심연을 닮은 눈으로 잠깐 허공을 바라보던 제나는 털썩, 카페의 소파에 기대며 담배 곽을 꺼낸다. 가느다란 손가락 새 익숙하게 한 개비를 엮은 뒤 흘끗 묘란에게도 곽을 기울였다가 거두며 느슨하게 웃어 보인다.

 

 

 “건강 생각해서라도 너는 끊어.”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구나. 그래, 나는 괜찮으니 너는 펴도 돼.”

 

 

 가볍게 농담을 건네나 싶더니 묘란의 허락에 불을 붙여 푸른 연기를 내뱉는다. 끊은 뒤 담배 냄새를 그리 반기지 않던 묘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나가 피우는 이 담배 냄새는 어딘지 옛 기억을 모호하게 자극하는 그리움이 있었다.

 

 

 “제나야, 서제나. 참 얄궂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상대방에게 한다기보다는 반쯤은 제게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제나도 잠자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생에 너와 내가 엮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린 듯 완벽한 모범생과 동시에 그린 듯 완벽한 날라리. 야간 자율 학습을 끝마치고 가는 길, 서둘러 집에 가기 위해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휘황한 피어싱들을 자랑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찰나의 시선. 너는 낯선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임을 확인하면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술 끝에 물린 담배에 열중했다. 가로등조차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오직 가늘게 비추이는 달빛만이 파르라니 떨리는 연기 속을 유영하며 네 단정한 옆모습을 유려하게 떠오르게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패싸움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어디서 요란하게 얻어터지고 오기라도 한 건지 입술 끝과 눈두덩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너와 마주하기도 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하게 시선을 돌리던 너는, 눈앞에 디밀어진 손수건에 놀라지도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었지.

 

 

 “, .”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직까지 긴장과 갈증이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날것의 숨소리와 살기로 뭉친 눈빛.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형형하게 빛나는 그 공허한 동공과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켜냈다. 사실 욕설 한 마디쯤, 아니 따귀나 주먹 등 거친 몸동작 한 두 개쯤은 각오하고 내민 손수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단 한 마디의 욕설이나 행동 없이 그 무심하고 나른한 안정(眼精)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곤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제 얼굴을 조금 정리하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살기와 나른함이 공존할 수 있지, 싶었지만 머리카락을 닮아 심연을 모아둔 네 눈은 그렇게도 모순적이면서도 독특했다.

 

 

 “고맙다, 반장.”

 “-, .”

 

 

 내가 반장인 건 알고 있었구나,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으로 잠깐 너를 돌아다보고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반사적인 미소를 지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하고 금세 시들기는 했으나. 닦아낸 손수건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너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나를 보고 그제야 처음으로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말을 꺼낸다.

 

 

 “이거, 빨아서 돌려줘야겠지?”

 “? , ? , 아니, 그게, 그렇게, -근데, , 저기, 상처는, 괜찮아?”

 “-이 정도야 뭐, 밴드 붙이면 될 걸.”

 

 

 우리 학교의 누구라도 보면 믿기지 않아 할 대화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더듬다니, 그리고 네가 이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가다니. 내 기억 속 너는 무엇과도 섞이지 않을 것처럼 검푸른 머리카락만큼이나 철저히 세계를 무시해나갔고, 어떤 사람도 네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동시에 누구도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게끔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네가, 이렇게나 무구하고 무해한 목소리로 말을 잇다니.

 

 

 “그래도 약은, 발라야 하지 않을, .”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나 허둥대며 말을 더듬는 너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웃기기도, 귀엽기도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매일 아침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하얀 블라우스, 목 끝까지 채운 단추에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넥타이에 정확한 각도를 유지하는 이름표. 한 올의 삐침도 없이 칼처럼 정리 된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꼼꼼함과 완벽함으로 일을 척척 처리해내는 너를, 아무리 학교 일에 무관심한 나라도 모를 리 없다.

상냥한 말투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공명정대한 너는 바꾸어 말하면 누구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 너와 나는 평생을 낮과 밤으로 나뉘어 만나지 못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 날의 일은 나에게도 뜻밖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을 잊게 해주는 것은 몇 개 없었지만, 슬슬 끊을까 하던 담배가 그나마 위안이 되곤 했다. 학교 근처지만 재건축 들어갈 예정이라는 낡은 상가가 몇 개나 들어선 그 골목은 낮에도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외로운 곳이었고, 그곳이야말로 담배를 태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남에게 들키는 것 자체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나의 삶을 살아본 적 없이 이해할 생각도 없는 타인에게 공허한 설교를 듣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조금 급한 듯한 낯선 발소리를 듣곤 새로운 곳을 또 찾아야 하나, 지겨운 생각에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들어보자 달빛이 네 뒤로 가로놓였다.

 

 

 하얗고 가는 달빛이 그날따라 왜 그리 휘황했던지. 교복 블라우스 카라를 벨 듯 단정한 머리카락에 덧씌워지는 달빛은 화관 같기도 하고, 번진 날개 같기도 해서 우습게도 조금, 안심해버렸다. 너라면, 그래 너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란 근거도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마주침.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고요라 할지언정 나는 네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다. 메트로놈처럼 단정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교복 단화 소리. 그 소리가 낡은 골목길에 울려 퍼질 때에는 아주 잠깐, 네가 오겠거니,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미소가 입술 끝에 허름하게 흐르곤 했다.

 

 

 그날은 너를 기억했던가. 굳이 기억하자고 한다면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뺨을 두어 대 얻어맞고, 그리고 집에서는 이미 나조차 포기해버린 나를 들들 볶으며 소리나 내지르던 그런 날들. 끝없이 파고드는 운동화 끄트머리로 지구의 파편을 멸망시키고 싶다고 뇌까리며 나는 오직 단순하게 너를 기다렸다. 그저, 달빛보다 환하게 저를 비추려던 나를, 비우고 기대고 또, 바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 얼굴에는 어떠한 흔적도,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내가 기대한 것이라고는 단순히,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 그 얼굴, 오직 그뿐. 그렇게나 나는 단순하게도, 그리고 위대하게도 너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무엇과도 바꾸지 않고 바꿀 수 없을 너를,

 몇 번이고 떠올려보고, 몇 백번이고 내가 기다려 본다.

 

 

 오직 달랐을 테고, 완전히 변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을 통틀어 나는 너를 떠올리지 않고서-, 단 한 번도 기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너와 나는 달랐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만이 나를 살려주던 시대가 있었다.

 

 

 

 

 한동안 학교 끄트머리에서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정도로 한 사람은 우등생으로 이름이 올라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학교에 잔디구장 하나를 지었다거니, 그 학교 출신 유명 인사 이름을 딴 건물을 지었겠거니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입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스쳐 지나기를 반복했으나-, 방학만 되면 핫핑크 색 머리카락 사이 아무렇게나 담배 연기를 흩날리며 교내를 활보하는 한 사람과 염색 기 하나 없이 단정하게 쓸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옷차림을 자랑하는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유대감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상상도 못했지, 서제나 네가 서미나의 딸일 줄은.”

 

 

 가볍게 쿡쿡 웃는 제나의 안광이 서늘하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엷게 내뱉으며 제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나야말로, 설마 네가 설표회의 무남독녀 후계자일 줄 꿈에나 상상했겠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다. 아주 담백하지만은 않은 그 시선 속에는 독살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한 낯선 감정들이 넝쿨을 감는다. 서제나와 박묘란.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곁눈질로만 바라보다 사회에 나가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그 네 개의 안정 안에 똑바로 담게 된다. 그 안정 속, 두 사람의 홍채만이 아닌 다른 물건-이를테면 달빛조차 되튀지 않도록 곱게 재를 먹인 총신 같은 것-까지 휩싸인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여전히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카락 점점이 박혀든 음영은 달빛이 엿보였다 사라지는 그림자는 분명 아니었다. 누구의 혈흔인지 모를 그 암적색 액체들은 탐욕스럽게 머리카락을 삼키고도 제나의 흰 뺨까지 튀어 있었다. 묘란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턱선에 맞추어 단정히 자른 머리카락은 드물게도 흐트러져 군데군데 핏방울이 뭉쳐 하얀 셔츠 위에 거친 흔적을 남기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를 겨눈 총구를 멈칫하게 하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제나?”

 “박묘란...?”

 

 

 어두운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또렷하게 울렸으나 여전히 총은 거두지 않은 두 사람 중, 먼저 손을 거둔 것은 묘란이었다. 빛을 잃지 않은 시계 안에 제나의 형체를 깊이 가두며 저도 모르게 생긋, 입술 끝을 끌어올린다.

 

 

 “서제나, 서미나. 추리 좀 할 걸 그랬어. 그래, 네가 우리 학교에 온 것도 사실은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경찰청장의 딸이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묘란의 목소리에 제나도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웠던 듯 나른한 미소를 흐트리며 총신을 거두었다.

 

 

 “내가 할 말이지. 하기야, 설표회 차기 회장님께서 경찰대에 진학할 거란 상상이나 했겠냐?”

 “우리 할머니의 안목을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할게.”

 

 

 가볍게 대답한 뒤 입고 있던 재킷의 주머니를 뒤진다. 그러나 찾던 물건이 나오지 않는 듯 가볍게 혀를 차는 묘란에게 제나는 자연스레 다가가 그 입술에 제 담배를 물려준다. 입술에 담긴 끄트머리가 젖어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문 묘란 또한 고개를 제나 쪽으로 기울이며 담뱃불을 빌린다.

 

 

 “몸에 안 좋을 텐데.”

 “총보다 더 안 좋을 리가.”

 

 

 우문현답이었다. 궁색한 말 붙이기조차 되지 않는 제 말에 제나가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자 묘란도 소리 내어 따라 웃었다. 이내 두 사람의 웃음은 합창이 되어 어둠만이 똬리를 튼 공간에 별을 심는다. 허리를 꺾어가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가며 신나게 웃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학창 시절에 체력 점수가 좋았지?”

 “왔다 갔다 했지. 내가 1등하면 다음번엔 네가 1, 그리고 또 다음번엔 내가 1등하고 그랬잖아.”

 “맞아. 제나 네가 공부는 안 했어도 체력 시험은 항상 잘 보긴 했어.”

 “-자기변명 같지만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반항이었어.”

 

 

 달빛이 내려앉는 붉은 핏자국이 말갛게 지워진 제나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묘란이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늦은 일탈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그 말에 묘란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말을 들은 묘란의 친구들은 백이면 백,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돌아다보거나 혹은 농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사실은 이만큼이나 적확하게 제 심경을 표현해준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래볼까. 시작은 뭘로 하면 좋겠어?”

 

 

 놀란 입술에 다시 웃음을 피워 물었다. 묘란의 물음에 제나는 조금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린다.

 

 

 “아하하, 이건 어때? 네가 경찰이 되는 거야. 아주아주 충직하고 성실한 경찰. 이거야말로 널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일탈 아니겠어?”

 

 

 못 견디겠다는 듯 말 사이사이에 터지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대답해준 제나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던 묘란은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 그것보다 조금 더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데.”

 

 

 여전히 겨우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제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다가 그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든다. 학창 시절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여느 사람에 비해서는 색이 옅은 그 입술 곁, 한없이 입술에 가까운 그 뺨에 입을 맞춰본다.

 

 

 “경찰청장 딸과의 연애는 어때.”

 

 

 그 때 내가 뭐라고 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이 조금은 바뀐 미래가 되었을까. 다시금 담배 연기를 입술 새 가늘게 뿜어내며 멍하니 네 손가락을 바라본다. 제 턱에 닿았을 때처럼, 여전히 가늘고 뼈대가 곧은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으로 대체 몇 명이나 죽여 댄 거야.”

 “살인은 취향이 아니었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어?”

 “네가 죽인 한 사람은 알고 있는데.”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받침에 둔다. 엉뚱한 소리라며 웃어넘기려던 제나는 여전히 제게 시선이 박혀있는 묘란에게 눈을 깜박인다.

 

 

 “내가 별 짓은 다했어도 사람 죽인 적은 없는데. -죽도록 팬 놈이 진짜 죽었냐?”

 “내 마음을 그 때 한 번 죽이긴 했어.”

 

 

 쓸쓸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폭소를 터뜨릴 뻔한 제나였으나 진지한 상대방에게 어색하게 입술을 굳힌다.

 

 

 “-, 언제 내가 네 마음을 죽였다고 그래.”

 

 

 그러다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자 묘란이 흠칫 고개를 든다.

 

 

 “제나야!”

 “? -, , 말해.”

 

 

 마실 타이밍을 놓치고 눈만 깜박거리는 제나에게 묘란이 웃어준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단려한 분위기는 그것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한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조사, 그냥 여기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는 거지?”

 “-그래.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이미 내 권한을 지나간 거야.”

 “서울시 경찰청장인 네게 권한이 지나갔다는 건 그냥 말장난으로밖에 안 들려. 정말, 여기서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나야말로, 박묘란. 네 스스로 설표회 자료를 넘겨준다면 어떻게든 너만큼은, 아니, 최대한 형량을 낮게 잡도록 힘써볼게. -묘란아, 제발.”

 

 

 한 때 그리도 갈망했던 시선들이 이제야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닿지 못하는 평행선 위 새겨지는 그리움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슬픈 한숨처럼 뒤따라 붙는 제나의 마지막 말에 묘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한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좀 더, 빨리 불러주지 그랬어. 그렇게.”

 

 

 참 듣고 싶었던 내 이름. 묘란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내 이름. 다른 사람에게 불리는 그 이름과 다를 바가 없는 자음과 모음이지만 네가 불러줄 때마다 내 이름은 무지개, 보석, 이슬 같은 것들을 닮아간다. 사무치게 아름다우며 단지 네게 속해있을 뿐인, 오직 네게 불러짐으로써 완성되는 네 속의 나.

 

 

 그러나 나는 네 이름을 부르길 원치 않았다. 내 입속을 뒹구는 네 이름은 어린 날 먹었던 솜사탕보다도 달콤하여, 그렇게 내 혀를 다디달게 녹여놓고도 돌이켜보면 그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들어버렸으므로. 네 이름이 달콤한 것인지, 네 존재가 사랑스러운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 이름을, 나는 끝의 끝까지 부르지 않길 바랐다. 내 생애의 끝자락에서조차 결코.

 

 

 -제나와 묘란은 서글프게 녹아드는 침묵 속에서 끝끝내 서로를 갈구하며,

 

 

 재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앞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서로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입술 끝에서 흐르는 선혈을 선명히 자각하면서 묘란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그럴 수 없으니, 너 또한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눈가에 어리는 눈물이 단려하게도 제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주름지는 눈가에 웃음과 눈물이 촛농으로 무너졌다.

 

 

 “제나야, 서제나. 내 생을 통틀어, 단 하나 남았던 내-, 연모.”

 “말하지 마, 묘란아.”

 “이제야 마음껏 불러주는 구나, 내 이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지만 웃음기가 가득하다. 눈물이 그렁한 눈에는 마찬가지로 제 입술 너머 피를 뚝뚝 떨구는 제나가 사진처럼 박혀들었다.

 

 

 “나는 결국 네 찻잔에 독을 넣지 못했고, 너도 결국 내게 권한 담배에 독을 넣지 못했구나.”

 

 

 너를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노라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떨리는 손으로 결국은 찻잔을 바꾸어 놓았다. 그건, 참으로 행복하고도 황홀하게도, 너 또한 마찬가지였구나. 내 귀에 울리는 내 이름이 너무 달콤해서 오히려 쓰다. 천천히 뻗어낸 손가락 사이로 운명을 닮은 네 손가락이 엉켜온다.

 

 

 그래,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주자. 차마 권하지 못했던 독배와 독연처럼, 대신 서로를 향해 무너지자. 그을리고 엎드린 그 사이로, 서로를 향한 눈빛만큼은 지우지 못하는,

 그런 독이 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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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banera_

2020. 6. 12. 14:17 끄적

[창작]꽃이 부서지다

오랜만의 손풀기용 :D*

 

 

 아침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이는 유월의 그림자 속에서도 짙은 장미 향기는 숨길 수 없었다. 선명한 그리움을 안은 붉은색이기도 하고, 도톰하게 고운 진분홍빛깔을 그러모은 듯한 장미는 말 그대로 눈이 부신 자태로 담벼락을 흉폭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이마 위로 사정없이 내려앉는 햇빛에 손을 가려 그늘을 만들고서는 잠깐 우두커니 멈추어 장미 울타리를 바라본다. 낯설게 옅은 갈색 홍채에 진한 장미 향기가 물결처럼 아로새겨졌다.

 

 

 언제였더라, 이토록 많은 장미를 보았던 것이. 열린 동공을 굽어 살피던 장미꽃잎은 머리 안쪽으로 밀려 피어나듯이 어린 기억을 자극했다. 이마에 얹히는 이 햇볕과 강렬한 향기,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장미 무리는 분명, 미지의 것은 아니었다.

 

 

 문득, 장미 꽃잎 하나가 바람도 없이 느릿하게 발치로 떨어진다.

 

 

 벌거벗은 발톱 끝에 부드럽고도 생생한 꽃잎이 와닿았을 때, 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지는 두근거림. 그러나 결코 긍정적인 느낌의 설렘은 아닌. 부엌 찬장에 숨겨져 있던 간식을 몰래 꺼내어 먹은 뒤 입맛 없던 저녁식사 자리, 혹은 우연히 지나치는 골목길 한 구석에 펼쳐진 도색 잡지를 훔쳐본 듯이, 기분 나쁘게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그런 두근거림이었다. 왜일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이토록 버려진 느낌이 드는 이유가.

 

 

 -율하야. 같이 가자!

 

 

 낯설지 않은 그 울림에 경악을 애써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낮아진 시선 안에 방글 방글 웃으며 뛰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술을 그제야 자각한다.

 

 

 -지민아.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해보이는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유난히도 홍채가 크고 까만 눈은 반짝거리는 흰자와 경계를 이루어 더더욱 맑은 눈빛을 타인에게 보내주곤 했다. 폭신해보이는 머리카락, 어린 아이에게서 나는 우유에 적신 쿠키 향기 같은 것들은 지민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느낌을 더해주었다. 물론 지민이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에는 그 사랑스러운 외모 덕분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을 거라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서 귀로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멀뚱히 선 나는, 지민과 가장 친한 존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가장 그녀를 빛내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구부러든 등에 어눌한 말투.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의 대부분을 가려 타인과 제대로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절친한 친구였다. 음험한 첫인상에 저절로 뒷걸음질 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햇살보다 환하게 웃어주는 지민에게 나는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지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 시커먼 감정들을 여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금세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사랑스러운 지민.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지민. 그랬기에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는 필연적인 환상이 덧씌워지기 마련이다. 타인이 꿈꿔왔던 사랑의 이상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었던 지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아주는 나에게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고.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나누었다. 나는 지민이 악을 쓰며 우는 것을 보았다. 이를 갈며 쌍욕을 하는 것도 보았다.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웃다가 침이 흐르는 것도, 전날밤부터 저녁을 먹지 않아 그다음날 점심에야 입가에 케첩과 소스를 묻히며 탐욕스레 정신없이 햄버거를 먹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지민이 나에게만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민은 나에게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잘라주기도 하였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해주었고, 말수가 적은 내 성향을 두고 사려 깊고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고 주변에 칭찬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지민만 나에게서 본 것들이었다. 나는 나조차 내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었는데 오직 지민만이 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서 나는 지민을 속였다. 지민은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있었다. 울고 웃고 화내는 인간인 주제에 감히 저는 그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듯 항상 사랑스럽고 완벽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 등에 기대어 훌쩍거리며 욕을 퍼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 그 완벽한 표정과 몸짓으로 멀어져가는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조차 모르는 내가 되게끔 타인들을 속이는 지민이니까, 나도 지민을 속일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걷다가 나를 향해 웃어주자, 나는 어두운 쾌감이 등골을 내달리는 흥분을 느꼈다.

 

 

 -선생님이 부르신 적 없다고 하시네.

 -어? 아까 부르시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들은 건가봐, 미안해.

 -아니야, 착각할 수도 있지 뭐. 다음 시간은 음악시간이지, 율하야?

 

 

 아무렇지도 않게 음악책을 챙기러 교실의 제 자리를 찾아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자 오싹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처음에는 그걸로 만족했다. 지민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속인다는 건, 내 스스로의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그 뒤부터는 더욱 쉬웠다. 사소한 거짓말과 미묘한 속임수에 지민은 쉽게도 넘어갔다. 교묘한 칭찬과 사실을 섞은 거짓은 진실보다도 쉽게 지민의 경계를 통과했다. 어느 반 남학생이 지민이 너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좀 모자라보인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던지, 선생님들끼리 얘기하는 걸 몰래 들었는데 이번 시험에서 지민 네가 생각 외로 성적을 잘 받지 못해 조금 실망하셨다던지의 이야기들. 그 남학생이 지민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지민의 성적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 입 속에서 튀어나온 은밀한 거짓들이 지민의 귀에서 만개할 때마다 지민은 조그만 주먹을 꼭 쥐며 분개한 듯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결론적으로 지민의 완벽함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완전하게 사랑스러운 소녀는 가끔씩 지나치는 남학생들을 쏘아보기도 했고, 도와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모르는 척 내 팔짱을 끼며 지나가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조금 무너져 더더욱 인간적이 된 사랑스러움은, 사실은 내가 인위적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그 사실에 기묘하고도 은밀한 쾌감을 느끼며 작은 진실을 섞은 거짓을 자랑스레 쌓아갔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공원이 있었다. 학교 가까이에 있었지만 한밤중의 공원은 놀라울 정도로 적막하면서도 동시에 밤의 기품으로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마련된 벤치에 걸터 앉아 불꺼진 교정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거기서 완벽한 소녀는 사라지고, 제 감정에 충실한 생기발랄한 소녀 두 명이 마음껏 떠들곤 했다. 공원에 흩어놓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모두 청아하게 몸을 뒤틀며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삼십분을 먼저 공원에 나와서 기다렸던 날, 그리고서는 그녀에게 왜 잘못 기억했느냐고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날 지민은 나에게 내 거짓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밤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하얀 종아리께에서 침묵이 부서졌다. 회오리치는 그 검은 정적을 응시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왜 속아줬어...?

 -그냥.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지민의 담담한 고백은 줄곧 그녀를 속였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심을 부서뜨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발언이었다. 어떠한 미움이나 증오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이하고도 또한 단정해,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지민을 미워한 적 없었다. 증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왜 나는 그녀를 속이고 싶었을까. 속여야만 했을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물음표들을 채반에 받치듯 잡아끌며 나는 애써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렇다면 지민은 왜 나에게 속아줬을까. 잠자코 내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다 알면서도 왜 나에게 속은 듯 불완전한 소녀가 되었을까.

 

 

나는 왜. 너는 왜. 우리는 왜.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배신자였고, 그럼으로써 믿음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결코 믿지 않으리라는 모순된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진심일 수 있었겠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온전히 서로를 향한 등뿐이었다. 그러나-, 그랬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등을 기댔던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언젠가 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므로, 몰락하는 꽃을 바라보기보다는 먼저 무너뜨리는 상냥함도 있기에.

 

 

 바람이 분다. 시계를 가득 채우던 장미가 물보라처럼 산산히 부서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꽃잎들은 으깨어지기 전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너도 나도 모를, 미지의 어느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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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그랗게 뜬 눈에 가늘게 찢긴 틈을 닮은 초승달이 상처를 냈다. 망울지는 달빛은 홍채에 금을 내고도 파문을 일으키는 학교 뒤편의 연못으로 조용히 떠올랐다. 그러나 그 달보다 눈부시고 황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 ..., 이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린 말을 깨달을 새도 없이 첨벙 소리를 내며 그것의 꼬리가 흔들리며 매끈한 수면을 자잘하게 부서뜨렸다. 깨어진 달빛을 꿰어낼 틈도 없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연못가에 선 소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역력하게 드러나 싶더니 무서우리만큼 새빨간 입술이 초승달을 삼켰다. 그 미소에 소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조차 버거워 이내 털썩 주저앉아 버렸고, 그 서슬에 소녀가 출입금지인 장소에까지 일부러 들어가게끔 만든 지갑이 연못 가장자리로 빗겨져 나갔다.

 

 

 “......”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이 검정 바탕에 리본이 달린 가죽 지갑을 톡, 하고 건드렸다. 지갑의 표면에서 물방울이 퍼져나갔다.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진 소녀는 그것의 손가락이 자기의 지갑을 건드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은 흙 끌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소녀가 느끼는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의 지갑을 두어 번 건드리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쭉 밀려나간 지갑은 주저앉은 소녀의 발끝을 건드리며 멈추었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지갑을 움켜쥔 소녀는 그것이 혹여나 튀어 올라 저를 덮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눈도 깜박거리지 못하며 그저 몸만 뒤로 밀어내다가, 이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초승달이 등을 덮는 그 길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가던 소녀는 아파트 입구에 도달해서야 겨우 숨을 골라 내쉬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손에 쥔 지갑에는 물방울 모양의 얼룩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일이 그저 몸서리 쳐질 정도로 생생한 꿈인 것만 같았다. 다만 제가 어제 들렀던 교내 연못이 제가 학교를 다니는 삼 년 내내 출입금지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 지나가듯 앞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운을 띄웠다.

 

 

 “명지야, 저기, 우리 학교 동관 뒤에 있는 연못 있잖아. 거기 왜 폐쇄됐지?”

 “거기? 출입금지 된 지 엄청 오래 되지 않았어? 어차피 갈 일도 없는데 왜?”

 “아니, 생각해보니까 우리 입학할 때부터 쭉 그랬었잖아. 근데 뭐 공사하는 것도 아니고.”

 “동관 뒤에 있는 연못? 거기 엄청 음침하잖아. 우리 언니 때부터 계속 출입금지였다던데? 언니 말로는 옛날에 연합고사 잘못 친 고 3이 거기 빠져죽었다나 어쨌다나. 뭐 흔한 학교 전설인 거 같던데. 실제로 팻말만 그렇지 야자 튀는 애들 종종 그 쪽 담벼락으로 도망친다더라. , 유영이 너도 거기로 튈 생각이구나?”

 

 

 두 사람의 대화에 지나가던 친구가 장난스레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금세 실체를 얻어 평소 생활로 끌려 들어온다. 출입금지라고 적힌 낡은 팻말은 있으나마나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테고, 실상은 오늘 저녁에도 누구든지 다닐 수 있는, 현실 속에 온전히 발을 디딘 공간. 유영은 그제야 겨우 온기 있는 미소를 띠며 친구의 대답에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 오늘 그쪽으로 튀어서 노래방에나 가야겠다.”

 “, 너 그러다 담임한테 걸리면 병풍 뒤에서 향 냄새 맡아. 너한테 온 학교가 쩔쩔매는 거 빤히 알잖냐.”

 “유영아, 너 이따가 음악 샘이 너한테 교무실에 좀 와달래!"

 “너 벌써 들킨 거 아니냐?”

 

 

 풋풋한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웃음소리가 교실 너머 흘겨 들어온 바람에 실려 나간다. 유영은 제 손이 교복 주머니 속에 넣어둔 지갑을 꼭 쥐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어제의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 석식 메뉴가 무엇인지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기에 바빴다.

 

 

 “, 진짜. 쌤은 만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 너무 늦었잖아.”

 

 

 투덜거리며 터벅거리는 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목덜미에서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을 넘기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커다란 세일러 카라를 펄럭거리게 하는 바람은 학교의 동관 뒤편에서 불어오는 듯 했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아주 가느다란 소리 같은 것, 휘파람 소리를 닮기도 하고 피리 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얇은 이명이 희미하게 귓가에 감겨왔다. 유영은 아침부터 줄곧 제가 검정 리본을 단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음을 지금에야 깨닫고 흠칫 어깨를 떤다. 평소에는 학원을 가느라 야간 자율 학습은 거의 빠지는데, 최근 기말 고사가 다가와 야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라고 할까. 전국 규모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큼지막한 수상 경력도 있는 유영이었기에 학교에서는 성적 또한 나쁘지 않은 유영을 명문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꽤 신경을 써주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유영이 딱히 바란 바는 아니었지만.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유영은 지갑에서 손을 떼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이명이 아니었다. 유영의 귀는 음악을 전공하는 만큼 소리를 포착하기에 민감한 귀였고,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유영은 저도 모르게 불 꺼진 동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평소 공포 영화를 즐겨보는 유영은 항상 혼자서 위험한 공간으로 가는 조연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막상 제게 그 상황이 닥치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혹은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낡은 출입금지팻말이 적힌 그 앞에서였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유영은 이제 그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안다. 어두운 밤이면 특히나 심연을 닮아 더욱 검게 빛나는 수면을, ‘그것의 꼬리가 튕겨내고 있는 소리일 터였다. 7월 초, 한창 더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 팔뚝 위쪽부터 목까지 오스스 돋아오는 소름은 분명 날씨나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소리에 겹쳐 더욱 더 선명해지는 소리는 노랫소리였다. 가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선율과 리듬을 가진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 유영은 홀린 듯 비척거리는 제 걸음을 도저히 제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그것이 저를 기다리며 유유히 웃고 있음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커다란 지느러미가 홍채를 도려내듯 가득 채웠다. 달빛이나 별빛 같은 것, 혹은 오로라를 닮은 빛들을 여러 조각씩 섬세하게 직조한 레이스를 이어 붙인 듯 아름다운 꼬리였으나, 그 크기가 상어만하다면 아름다움보다 먼저 공포감이 밀려온다는 것을 유영은 태어나 처음 경험하였다. 저절로 무릎이 떨려오며 힘이 빠져나갔지만 어제보다는 덜했다. ‘그것은 유영이 제 꼬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꼬리지느러미로 수면 위를 느릿하게 튕기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서 아름다운 눈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유영에게 노래를 불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유영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는 듯 했다. 오히려 어제와 달리 가까워지는 유영이 기쁜 듯 둥근 눈에는 즐거운 기색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인어, , 맞지...?”

 

 

 유영에게 보이는 것은 인간과 같은 상체와, 느릿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꼬리지느러미뿐이었다. 꼬리지느러미와 상체가 이어져있는 허리는 물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은 탓에 묻게 된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인어는 노래를 그치지 않고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어제는 너무 놀라 몰랐지만, 단정한 외모를 가진 인어의 눈에서는 유영을 향한 막연한 호감이 드러나 있었다. 여전히 놀랍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제에 비해 꽤 이성을 찾은 유영은 인어에게서 거리를 둔 채 오래 된 벤치에 걸터앉았다. 꼬리지느러미를 제외하고 움직이지 않는 인어는 그저 하염없이, 가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상냥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저기, 너는 내 말을 알아들어?”

 

 

 당장이라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학교 측에 알려 연못 속의 괴 생명체를 없애거나, 적어도 멀리 보내버리는 것이 이성적인 흐름이었겠지만 유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학교 측에서는 이미 이 인어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여기에 사는 것을 묵인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라고, 유영은 재빨리 캐치해낸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 말마따나 학교 동관 뒤편은 말만 출입금지 상태일 뿐, 담배를 피려는 학생들이나 야자를 도망치는 자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임이 이미 널려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단 한 번도 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음을 보았을 때, 유영이 다른 사람들과 연못에 갔을 때에는 인어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인어는 오직 유영에게만 제 존재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유영은 결국 이해와 이성을 포기하고 조각과도 닮은, 신화 속의 존재를 만나기 위해 자주 동관 뒤편의 연못을 찾아갔다.

 

 

 며칠 간 인어를 관찰해본 결과 그녀는 유영의 말은 알아듣지만 유영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리고 유영에게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보이며, 유영 외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동관은 뒤편만 폐쇄되어 있을 뿐이라 복도에서 내다보면 그녀가 지내는 연못이 빤히 보이는데, 그 누구도 쓸쓸하게 폐쇄된 공간의 연못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로 좋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결론이었지만 유영은 어느 순간 인정해버렸다. 그저 그녀의 곁에 있으면 편안했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변하면서 유영은 그녀의 물갈퀴 달린 손가락을 만질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노래를 듣곤 했다. 가끔은 달빛에 반사되어 구슬 흐르듯이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지느러미를 손가락으로 훑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 그녀는 노래를 잠깐 멈추고 휘파람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동그랗게 나이테를 닮은 비늘은 매끄럽고도 또한 그녀의 온기를 지녀 따뜻해, 유영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유영의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다시 끊겼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인어, 라고만 부르기에는 너무, 평범하지 않아?”

 

 

 철벅, 커다랗게 지느러미가 튀는 바람에 유영은 깜짝 놀라 숨을 멈추었다. 저 커다란 지느러미에 한 번이라도 맞으면 가벼운 상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 당연한 생각이 지금에서야 스친 탓이었다. 굳어버린 유영의 반응에 당황한 인어는 미안하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지만 기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마치 말을 알아듣는 동물과도 같은 반응에 유영은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쉬고 옆에 있던 돌멩이를 들어 물고기 모양을 바닥에 그렸다.

 

 

 “, 물고기, 비늘이니까, 어린...? , 어린이라니, 이상하다.”

 

 

 손가락이 닿았다. 흠칫 놀란 유영을 바라보는 눈은 한없이 맑고 고요해서 유영은 말없이 제가 들고 있던 돌멩이를 건네주었다. 차가운 물에 오래 있었을 손가락이지만 유영에게 닿았던 그 손가락은 여전히 온기가 서려 있어, 유영은 조금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돌멩이로 그려내는 형태를 오래 바라보았다.

 

 

 “..., 영원... 영원?”

 

 

 유영이 느릿하게 그녀가 써낸 문자를 읽어내자 차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맑은 구슬 같은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 유영은 나중에서야 그것이 영원의 꼬리지느러미에 달린 비늘들이 부딪치는 소리임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영원이 글자를 쓸 줄 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 글씨 쓸 줄을 알고 있었어?”

 

 

 말투가 이상해진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영의 물음에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둥근 눈을 한 번 더 동그랗게 뜨나 싶더니 이내 방울 소리를 닮아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제가 쓴 글자를 느릿하게 손가락으로 한 번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자 두 어 번 그 행동을 반복했다. 유영은 이내 그 뜻을 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자만 쓸 줄 안다는 뜻이야?”

 

 

 유영이 그제야 제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자 으레 그랬듯 순진한 표정 위로 박담한 그리움이 번지다 물크러졌다. 유영은 문득 영원의 표정에 가슴 한가운데가 아파오는 느낌에 찡그린 미소만 지어보이다 평소보다 일찍 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잊지 않고서.

 

 

 영원은 투명하게 쌓이는 듯 했으나 깊은 해저를 닮아 있었다. 투명한 물이 쌓이고 쌓여 이윽고 보이지 않는 해저를 만드는 모순처럼, 청아하게 울리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나 말은 할 줄 모르며, 제 이름은 쓸 줄 아나 문자를 모르며, 또한 유영을 좋아하나 영원을 사랑하게 된 유영은 몰랐다. 어느 샌가 자신의 삶에 물들어 지워낼 수 없게 된 영원 곁에서 유영은 달빛에 되튀는 비늘을 쓰다듬으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그토록 달고 그리우며, 또한 고통스럽다는 것을 유영은 처음으로 가슴이 시리도록 깨닫고 있었다.

 

 

 제 노래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소리도 없이 제 비늘을 곤두세우는 영원을 볼 때면 가끔 까닭 모를 눈물이 났다. 고요하게 뺨으로 엮어 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노래를 부르는 유영에게 영원은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을 뻗어 그 눈물을 단아하게 닦아내었다. 보석이 되지 못하는 유영의 눈물을 그토록 소중하고 정결하게 닦아내는 영원에게 결국 그 온기 서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어버렸다.

 

 

 “영원, 내 영원. , 영원이 되어 주세요, 영원아.”

 

 

 말이 되지 않는 말임을 알면서 지껄였다. 입 밖으로 내어버린, 금지되었던 언어들은 날것의 흉기가 되어 무수히도 제 귀와 달빛에게 날카로운 생채기를 내었지만 유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빨갛게 꽃받침이 되어버린 입술 너머에서 잔혹한 언어들이 제멋대로 꽃을 피워냈다.

 

 

 “모르겠어요, 영원, 영원아. 그냥, 너를 보면 내 심장이 뛰어요. 너를 보면 너무 행복하고, 너무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아파요.”

 

 

 누워서 눈을 감으면 네 생각이 났다. 눈꺼풀에 휘감긴 어둠을 모조리 채우는 것은 너의 둥근 눈이거나 혹은, 청명하게 울리는 네 노랫소리 같은 것이었다. 너만 떠올리면 심장이 너무 뛰어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내일이 얼른 와, 모두가 학교를 떠난 밤이 재게 달려와 너를 만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만히 토해내는 숨결 속에 쿵, -,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아슬하게 새벽녘에나 잠이 들면, 이번에는 너의 목소리를 듣는 꿈을 꾸었다. 너의 노랫소리에 잠을 깨어선 온종일 너만 생각했다. 너로만 가득 찬 나였다.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래, 그랬다. 영원아. 네가 차라리 독이라고, 내 숨통과 목숨을 모조리 손아귀에 움켜쥔 독이라고, 그리고 그 독이 너여서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눈물과 오열이 뒤섞인 고백이었고, 찰나의 독을 품은 자백이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비탄과 노여움에 젖어 유영은 아주 자연스러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젖은 영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들이 너무도 익숙한 마냥 영원은 제게 입을 맞추어놓고 정신을 잃은 유영을 가지런히 눕혀준다. 연못에서 그리 멀리 떨어질 수는 없지만 머리카락을 가다듬어주고 옷을 정리하고, 그리고 그 위에는 영원이 흘리는 금강석들이 빛을 머금은 물고기들처럼 유영의 주변을 헤엄친다. 다시 한 번 더, 또 다시 한 번 더,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유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다시

 또.

 

 

 -느릿하게 시간이 휘감겼다. 둥근 영원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굳더니 빛나는 금강석이 되어 연못 주변에 떨어졌다.

 

 

 너는 또, 나를 잊어버리고, 유영아.

 이리도 나를 사랑한다 해놓고, 금시로 나를 잊어버리는 너인데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차라리 나를, 죽여주련?

 

 

 나에게 이름을 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멋대로 사랑한다 말해놓고, 이리도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네 마음대로 나에게 입을 맞출 때마다 그 모든 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너를 나는, 어쩌면 좋을까. 투명하던 금강석에 붉은 선이 아로새겨졌다. 어느 새 영원의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원은 처음으로, 천천히, 유영의 몸을 안아 연못 속 제 꼬리 위에 얹혀놓는다. 윤슬에 흔들리는 유영의 머리카락이 여아하게도 수영한다. 홀린 것처럼 그런 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원은 그 입술에 다시 제 입술을 맞추며, 깊이, 깊이 그대로 연못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래, 유영. 헤엄치는 나의 영원.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영원아.

 그렇다면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줄까.

 삼키고 녹고 끝내는 엉켜버려, 서로가 서로를 죽음에 이르는 줄도 모르게,

 누가 누구의 독인 줄도 모르게 그저 그렇게, 독이 될까.

 그렇게 할까, 우리,

 영원히.

 

---사담

인어의 입맞춤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얻고 써본 이야기입니다

독에 관한 단상은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독과 여성,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서 쓰고 싶은 큰 모티프가 되겠네요.

2차 창작이었던 십이국기의 '독' 또한 이 독에 관한 단상과 관련한 이야기랍니다.

재밌게 즐겨주세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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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banera_

2016. 4. 27. 10:25 끄적

[창작] 미정2

 "제국 대학 학생이라면 좀 더 언행에 주의해야지."



 쌍커풀이 없는 가늘고 긴 눈이 순간 더 기름해졌다. 북해를 연상시키는 서늘한 시선에 헌병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희고 단정한 얼굴에 떠오른 어렴풋한 경멸에 헌병은 한층 더 사나운 동작으로 청년의 팔을 이끌었다. 다가오는 팔을 보고 있던 한서는 그 팔을 뿌리쳤고, 그 서슬에 한서의 긴 코트 자락이 날리며 지나가던 여인의 발치에 엉켜왔다.



 "어어-."

 "계집애는 상관 없으니 갈 길이나 가."



 짜증 섞인 말투에 걸음을 멈춘 도혜가 빤히 헌병을 바라본다. 작은 키의 도혜는 종아리에 감긴 검은 외투를 걷어 내고 미색의 스커트를 정리한다. 그리고는 작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헌병에게 말을 건다.



 "혹시 타카하시 상 아니신가요?"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을 부르자 헌병은 찡그린 인상 그대로 도혜를 다시 쳐다본다. 하얗고 단정한 재킷에 종아리까지 오는 아코디언 스커트를 입은 도혜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타카하시는 이내 미간을 펴고 그녀에게 신경을 돌린다.



 "이거, 다시 보니 천라 포목점의 토오루 아닌가?"

 "네. 어제도 마님께서 저희 가게에 들러주셨는데, 자수는 완성하셨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덕분에 내가 호강일세. 아, 안 그래도 야회복 때문에 옷감 뜨러 간다고 하니, 꼭 가게에 전해주게."

 "네. 아, 저기 그런데 이 분은...?"



 순식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꾼 도혜는 조심스럽게 한서에게 시선을 보낸다.



 "이 녀석? 신경 쓰지 마. 경성 제국 대학 학생이라는 자가 아주 불손해. 한 번 서에 가서 주의를 받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 데리고 갈 참일세."



 헌병 앞에서도 저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서를 보건대 일반인보다 고초를 겪을 것이 손에 잡힐 듯 빤했다. 다카하시를 한 번, 그리고 한서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본 도혜는 생긋 웃으면서 한서에게로 입을 열었다.



 "멍청한 사람이군요."



 일본어로 말했지만 경성 제국 대학의 학생으로 못 알아들을 바는 아니었다. 물론 다카하시도 도혜의 말에 당황하였지만 초면의 여인에게서 폭언을 들은 한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얀 얼굴이 금새 붉게 열기를 띄었지만 도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일본 제국의 후의로 고등 교육까지 받으시는 분께서 이러한 태도로 일관하다니 한심하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깊이 있는 눈으로 한서를 바라본다. 말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고요하게 침잠하고 호의를 띤 그 눈빛에 한서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짧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다카하시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앞 전에 친구와 언쟁이 있어 감정이 달아올랐던 상태였습니다. 언행 주의하라는 말, 새겨 듣겠습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서로 가야지. 자네 학부에도 말을 해두어야겠어."

 "앗, 그러고보니 다카하시 상, 마님이 오늘 꼭 가져와달라고 하신 린넨이 들어왔습니다. 다카하시 상 셔츠에 꼭 쓰고 싶다고 얼른 가져다달라고 하셨는데, 이런 멍청한 내선인 때문에 늦을까 걱정이 되네요."



 도혜가 그리 말하자 미간을 찡그리고 마뜩찮게 한서를 노려보던 다카하시는 이내 혀를 한 번 차고는 숙여진 고개를 손으로 툭툭 친다. 마찬가지로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도혜에게 보낸 다카하시는 헛기침을 하고는 한 마디 툭 내던진다.



 "지금은 이렇게 가지만 다음에는 토오루 자네가 감싼다 해도 그냥 가지는 않을 거야."



 여전히 웃는 상으로 도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들었다. 멀어지는 다카하시의 모습을 보던 도혜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 숙인 한서를 툭 치고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자 한서는 당혹한 표정으로나마 도혜의 뒤를 따른다.



 "저,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항상 조심하셔야지요."



 차박차박하게 흘러 떨어지는 검은색 케이프 코트를 바라본 도혜가 흥미로운 듯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검문 당하셨나요?"

 "무슨 일이랄 것도 없습니다. 저 치들은 조선 사람이라 하면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니까. 차라리 돌멩이가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허망한 체념을 삼키는 답변에 도혜는 진지한 눈으로 언어를 피워낸다.



 "저는, 개처럼 빌지언정 살아 있는 것이 낫고, 살아 있다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내보다 기개가 있고 절조가 있는 도혜의 말에 한서가 문득 그녀를 내려다본다. 반만 땋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감청색 공단 리본으로 묶어 나머지 머리카락은 곱게 빗질했다. 그 시대 여인치고도 크지 않은 키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고급 미색 양장을 차려입은 미인.



 단순히 일본인의 발을 핥으며 영욕을 누리는, 오욕과 수치도 모르는 자인 줄 알았지만 말을 들어보니 다른 느낌이다. 해서, 한서는 조금 더 도혜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졌다.



 "아가씨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최한서라고 합니다. 아직 대학생이지요."

 "저는 이도혜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양장 기술을 가르쳐주러 가는 길이에요."

Posted by habanera_

2016. 4. 26. 09:42 끄적

[창작] 미정

 창경궁의 유리 정원은 베일 듯한 북풍에도 하얗고 날 선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인은 몸 선을 따라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옥색 원피스의 소매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하게 눈을 깜박였다. 색이 드문 여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짙은 속눈썹이 겨울보다 하얀 여인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연이은 폭설에 인적이 드문 온실 안에서 사람이 아닌 녹향綠香들의 숨소리가 눈 내리는 소리를 집어 삼켰다.



 "도혜."



 순식간에 어둠이 부푼 듯한 인영이 희게 얼어붙은 온실 안에 들어섰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케이프 코트 자락을 넘긴 남자는 학생모를 벗어 쌓인 눈을 털어낸다. 남자가 갑작스레 들어섰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도혜라 불린 여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인사한다.



 "오랜만이네, 한서. 상해에는 잘 다녀 왔어?"

 "이리 왔으니 잘 다녀왔다고 해야겠지. 도혜도-, 마찬가지였나 보네."



 그녀를 흘끗 훑어보고는 한서도 싱긋 웃음을 짓는다. 도혜는 머리를 묶어 올린 공단 리본을 슬쩍 손 끝으로 넘기더니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저 곱게 자란 영애와 단정한 학생 커플로 보이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마음과는 다르다.



 날개 접은 까마귀의 자태로 한서는 도혜의 감색 우산을 펼쳐 든다. 수묵화로 그린 설경 속을 두 사람은 청량하게 걸어간다.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날개를 펼쳐 낙하하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도혜는 빨간 입술을 조붓하게 움직였다.



 "아가토 신부님께서는 잘 계셔?"

 "아, 잘 계시지. 도혜도 잘 있냐고 물으셨어. 여전히 한글 수업은 잘 하고 있냐고도 물으시던데."

 "물론이지."



 경성에서도 손에 꼽는 '천라 포목점'의 외동딸인 도혜는 부모님의 극진한 애정과 보살핌 속에 금이야 옥이야 자라 미태와 교양이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천라 포목점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모슬린, 벨벳, 공단, 섬세한 레이스 등 구경하기도 힘든 진귀한 직물들을 다루던 곳이라 한국에 와 있는 상류층 일본인들에게는 살롱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특히나 그때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신부 수업으로만 느끼던 양장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신여성인 도혜의 어머니는 일본인 부인들에게 양장을 가르치며 딸을 돌보는 것이 생의 낙이었다.



 그리고 도혜의 낙은 집 주변의 한국인 여학생들에게 양장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본인과도 친밀한 교류를 하고 있던 도혜는 그녀를 향한 호의를 이용하여 이틀에 한 번이나 사흘에 한 번 친교가 있는 한국인의 가정을 방문하여 양장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러나 양장 기술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은 한글을 가르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기술을 배울 때에는 누나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오는 코 흘리개 아이들까지 모두 거두었는데, 양장 기술을 배우겠답시고 집을 찾아오는 소녀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모두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도혜의 목표였다.



 그러한 도혜와 경성 제국 대학 학생인 한서와는 교류할 일이 극히 드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쌍커풀이 없이 가늘고 긴 눈을 지닌 한서는 일견 귀족적으로 보이나 외견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다. 그러한 차이와는 달리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평범하지도 않았다.



==절취

최근 경성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노톤의 필터를 끼워 흐릿한 정경.

쇠락하는 제국이지만 마냥 슬프기만은 하지 않게, 5000년의 위엄이 기저에 깔린.

그리고 사실 아가토 신부님도 그렇고 도혜나 한서도 그렇고 제 취향 범벅이네요 하하.....

경성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채로 진행해가고 있습니다. 투박한 졸작이죠....ㅋㅋ

Posted by habaner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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