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6. 09:42 끄적

[창작] 미정

 창경궁의 유리 정원은 베일 듯한 북풍에도 하얗고 날 선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인은 몸 선을 따라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옥색 원피스의 소매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하게 눈을 깜박였다. 색이 드문 여인의 얼굴에서 유일하게 짙은 속눈썹이 겨울보다 하얀 여인의 뺨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연이은 폭설에 인적이 드문 온실 안에서 사람이 아닌 녹향綠香들의 숨소리가 눈 내리는 소리를 집어 삼켰다.



 "도혜."



 순식간에 어둠이 부푼 듯한 인영이 희게 얼어붙은 온실 안에 들어섰다. 무릎까지 오는 검은 케이프 코트 자락을 넘긴 남자는 학생모를 벗어 쌓인 눈을 털어낸다. 남자가 갑작스레 들어섰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도혜라 불린 여인은 우아하게 웃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인사한다.



 "오랜만이네, 한서. 상해에는 잘 다녀 왔어?"

 "이리 왔으니 잘 다녀왔다고 해야겠지. 도혜도-, 마찬가지였나 보네."



 그녀를 흘끗 훑어보고는 한서도 싱긋 웃음을 짓는다. 도혜는 머리를 묶어 올린 공단 리본을 슬쩍 손 끝으로 넘기더니 출구 쪽으로 걸어간다. 타인이 보기에는 그저 곱게 자란 영애와 단정한 학생 커플로 보이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은 그런 마음과는 다르다.



 날개 접은 까마귀의 자태로 한서는 도혜의 감색 우산을 펼쳐 든다. 수묵화로 그린 설경 속을 두 사람은 청량하게 걸어간다. 소리도 없이 고요하게 날개를 펼쳐 낙하하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도혜는 빨간 입술을 조붓하게 움직였다.



 "아가토 신부님께서는 잘 계셔?"

 "아, 잘 계시지. 도혜도 잘 있냐고 물으셨어. 여전히 한글 수업은 잘 하고 있냐고도 물으시던데."

 "물론이지."



 경성에서도 손에 꼽는 '천라 포목점'의 외동딸인 도혜는 부모님의 극진한 애정과 보살핌 속에 금이야 옥이야 자라 미태와 교양이 돋보이는 여인이었다.



 천라 포목점에 대해 잠깐 이야기하자면 모슬린, 벨벳, 공단, 섬세한 레이스 등 구경하기도 힘든 진귀한 직물들을 다루던 곳이라 한국에 와 있는 상류층 일본인들에게는 살롱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특히나 그때까지만 해도 가정에서 신부 수업으로만 느끼던 양장 기술을 전문적으로 배운 신여성인 도혜의 어머니는 일본인 부인들에게 양장을 가르치며 딸을 돌보는 것이 생의 낙이었다.



 그리고 도혜의 낙은 집 주변의 한국인 여학생들에게 양장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일본인과도 친밀한 교류를 하고 있던 도혜는 그녀를 향한 호의를 이용하여 이틀에 한 번이나 사흘에 한 번 친교가 있는 한국인의 가정을 방문하여 양장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허락 받았다. 그러나 양장 기술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고, 실은 한글을 가르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기술을 배울 때에는 누나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오는 코 흘리개 아이들까지 모두 거두었는데, 양장 기술을 배우겠답시고 집을 찾아오는 소녀들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까지 모두 한글을 가르치는 것이 도혜의 목표였다.



 그러한 도혜와 경성 제국 대학 학생인 한서와는 교류할 일이 극히 드물었다고 볼 수 있다. 하얗고 단정한 얼굴에 쌍커풀이 없이 가늘고 긴 눈을 지닌 한서는 일견 귀족적으로 보이나 외견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다. 그러한 차이와는 달리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평범하지도 않았다.



==절취

최근 경성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모노톤의 필터를 끼워 흐릿한 정경.

쇠락하는 제국이지만 마냥 슬프기만은 하지 않게, 5000년의 위엄이 기저에 깔린.

그리고 사실 아가토 신부님도 그렇고 도혜나 한서도 그렇고 제 취향 범벅이네요 하하.....

경성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채로 진행해가고 있습니다. 투박한 졸작이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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