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도 네게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잖니.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마는, 나는 진실로 너를 애정의 대상으로 바라본 적은 없었다.

 

 

 선생님,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사랑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 선생님은 저를 사랑하셨잖아요. 아껴주고, 예뻐해 주셨잖아요.

 

 

 매우 유감이구나, 나는 단 한 번도-, 인생을 통틀어 사랑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이란다. 그러니, 이런 쓸 데 없는 장난은 그만치고 나를 좀 풀어주렴.

 

 

 그럴 리 없어요. 선생님처럼 아름다우시고 상냥하신 분께서 사랑을 해보신 적 없다니요. 저는 알아요. 선생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시며 위대한 분이신지요.

 

 

 너는 네 마음대로 만들어낸 라는 환상에 너무 붙잡혀 있는 것 같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지금 말하는 것만 봐도 알겠지 않니.

 

 

 거짓말 치지 마세요, 지금 여기에 우리 둘 밖에 없어요, 선생님. 아니, 주란씨. 여기에는 아무도, 들을 사람이 없어요. 이제는 마음껏 말해주세요. 나를 사랑한다고. 마음 속 깊이 연모하고 있다고. 오직 그 말을 듣기 위해서 나는 당신을 여기로 데려온 거예요.

 

 

 선생님에게 주란이라고 부르는 것은 틀린 일이지. 지금이라면 선생님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단다, 단미야. 이런 장난 그만치자.

 

 

 선생님,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세요? 항상 웃어주시던 선생님이잖아요. 제가 장난을 치거나 실수를 해도, 괜찮다 웃어주시며 그 부드러운 손으로 쓰다듬어주셨잖아요. 그 때마다, 선생님의 손바닥에 입 맞추고 싶다고 얼마나 생각했던지. 그 부드러운 손을 핥고 손톱 끝을 깨물어주고 싶다고, 얼마나 바랐는데.

 

 

 하, 하지 마!

 

 

 왜요,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저에게 해야 하는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설명해주셨잖아요. 이렇게 선생님 손에 입 맞추는 건 왜 안 되는 일이죠?

 

 

 하지 마, 징그러워!

 

 

 징그럽다니, 아 참, 선생님이 싫어하실 만한 벌레나 쥐 같은 건 여기에 없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 아니야! 나는 지금, 네 혓바닥이,

 

 

 간지러우세요? 선생님, 저는 지금 정말 황홀해요. 꿈에서나 했을 법한 일들을 지금 제가 하고 있다니요. 선생님도 지금 괜히 그러시는 거죠? 창피해서.

 

 

 그런 거 아니야, 최단미! 놔 줘, 제발.

 

 

 왜, 왜 화를 내세요. 손목, 별로 아프지 않게 묶었는데. , 혹시 화장실에 가고 싶으신 거예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제가 지금 의자랑 연결해놓은 자물쇠를 풀어드릴게요.

 

 

 대체,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거니, 단미야. 혹여 내가 너에게 잘못한 게 있는 거니?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선생님께서 저에게 잘못한 게 있다뇨. 선생님은 제게 모든 걸 가르쳐 주셨는걸요. 제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식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가르쳐주셨어요.

 매일 보는 하늘이 얼핏 같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것, 봄을 맞이하여 움트는 신록의 파릇한 솜털 빛깔, 여름 날 소나기가 내린 후 반짝거리는 빗방울과 무지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바람의 냄새, 얼핏 고요해보이지만 얼음 아래서 쉬지 않고 흐르는 물소리 같은 것이요. 모두, 선생님을 만난 이후로 깨닫게 된 거죠. , 선생님을 만나 다시 태어난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런 선생님을, 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선생님? 지금 왜 우시는 거예요? 제가 너무, 선생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여서 기쁘신 건가요?

 

 

 제발, 나를 놔줘. 난 너를 오직 한 명의 학생으로 보았을 뿐, 아니, 내가 모두 잘못했다. 모두 내 잘못이야, 단미야.

 

 

 선생님이 뭘 잘못하셨어요. -그래요, 그 때는 저도 섭섭했어요. , 저 말고 다른 학생의 이마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셨죠?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모르는 척 하지 마세요. 저는 그 날이 똑똑히 기억나요. 아아, 마침 그 날은 눈이 내리고 난 다음 날이었어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같은 눈이 사락사락 내렸던 그 다음의 날. 게으름뱅이처럼 태양은 늙은 빛만 힘없이 교문 위로, 운동장 위로 던져냈죠. 선생님은 그날 여느 때와 같이 갈색 머리카락을 품위 있게 땋아 올린 채, 그 날씨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카멜 색 스카프를 두르고 계셨어요. 동그란 진주 귀걸이가 선생님의 귓불에서 달랑거리고 있었죠. 선생님의 하얀 피부와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었어요. 천천히 걸어 교탁 앞에 서신 선생님께선 언제나처럼 다정하고 상냥하게 제게 가장 먼저 미소를 띠우신 뒤,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셨어요. 선생님. 선생님께서 제 이름 부를 때 목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은 지 선생님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 말이 조금 어긋났네요.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학교에 오시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눈을 마주치고 학생들의 건강을 봐주시기도 했어요. 특히나 그 날은, 태양빛은 느릿하고 밤새 쌓인 눈 덕에 얼어붙은 공기와, 귀가 아플 만큼 찬바람이 불어 무지 추운 날이어서, 코를 훌쩍거리는 학생들의 소리가 교실을 가득 채웠죠. 선생님은 유난히 코를 훌쩍거리던, 맞아요, 박소진이라는 그 이름, 일부러 쉴 새 없이 소리를 내가며 선생님의 관심을 끌려던 그 아이에게 다가가셨어요. 그리고는 자상하게 허리를 굽히며 그 계집애의 이마에 부드러운 손을 대셨죠. 망할 계집애. 아픈 척 요란스럽게 코나 훌쩍거리던 그 계집애까지도 선생님은 자애롭게 돌봐주신 거예요, 그게 선생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작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신 채요. 그 순간 조금 섭섭하긴 했지만, 저는 선생님의 그런 자상한 모습까지 모두 사랑하는 거니까 이해해 드릴게요. 속인 사람이 잘못이지 속은 사람은 잘못이 아니잖아요?

 아, 그 소진이라는 얌체요? 걱정 마세요. 지금은 코를 훌쩍거리지 못할 거예요. 훌쩍거릴 코가 있어야 그런 소릴 내지 않겠어요?

 

 

 너, 대체 소진일 어떻게 한 거니? 소진인 네 친구잖니!

 

 

 그딴 앨 친구로 둔 적 없어요. 생각해보세요. 만약 그 계집애가 제 친구라면, 어떻게 친구의 연인에게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죠? -혹시 선생님, 그 애랑 뭔가 더 있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 없겠죠? 지금 제가 착각하는 거 맞죠?

 

 

 무슨 소릴 하는 거니!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선생님은 정말 순수한 걱정에서 그렇게 행동하셨을 뿐, 선생님이 사랑하는 건 저 뿐이라는 걸 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걸요. 아아, 너무 행복해요. 이렇게 선생님을 독점하고 싶었어요. 그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목덜미에서 좋은 향기를 맡고, 이렇게-,

 

 

 그, 만해! 지금 뭘 하는 거야!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 저도 이제 다 자랐으니, 선생님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이 꽤 컸거든요. 그리고 책에서 봤는데, 이렇게,

 

 

 그만, 제발, 단미야!

 

 

 선생님께서 이런 목소리를 내실 줄 몰랐네요. 여긴 아무도 없는데, 아직 저에게 맨몸을 보여주시기가 부끄러운가 봐요어머, 우시는 거예요? 좀 창피하실 순 있겠지만, 이제 우린 하나가 될 텐데요. 그렇다고 선생님을 결코 괴롭히거나 울리고 싶은 건 아니에요. 알겠어요, 제가 옷을 잘 가다듬어 드릴게요.

 

 

 건드리지 마!

 

 

 선생님이 이렇게 큰 소리를 내시기도 하네요. 항상 저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줘서 그런지, 이런 목소리도 두근거리긴 하는데 저한테 화내시는 건 아니죠?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파요, 선생님. 그렇게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우린 이제 곧, 하나가 될 거니까.

 

 

 대체, 대체, 내가 뭘, 어떡해야 풀어줄 수 있는 거니, ?

 

 

 아, 묶인 데가 불편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그건 얼마든지 풀어드릴 수 있는데, 선생님께서 혹여나 어디로 가버리시거나 할까봐 이래놓은 거예요. 선생님은 보기보다 부끄러움이 많으신 거 같으니까. 후후, 물론 그런 모습도 너무 귀엽지만요.

 

 

 아무, 아무데도 안,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냐니요. 당연히 우리가 서로 사랑하니까 그렇죠.

 

 

 사, 사랑은, 사랑은 이런 게 아냐. 이런 게 아니라구!

 

 

 어머, 아까 선생님은 이제껏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이런 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죠?

 

 

 너, 너야말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면서 어떻게 내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죠. 선생님은 지금 나와 이런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사랑이 뭔지 모르셨을 테니까요. 오직 나와의 사랑만이 선생님 생애 단 하나 있을 사랑이니까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피곤하신 거예요? 눈을 감는 걸 보니 그러신가 보네요. 물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울고 소리치셔서 목이 마르실 것 같은데.

 

 

 -필요 없어.

 

 

 하긴, 선생님께는 저만 있으면 되니까요. 그럼 저만 좀 마실게요. 어휴, 목이 너무 말라서.

 선생님, 주무실 거예요?

 그래요. 그럼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된 이유를 알려드릴게요. 선생님도 저를 사랑한다고 확신하게 된 계기까지요. 선생님은 듣다가 잠드셔도 돼요.

 

 

 그런 쓸 데 없는 헛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정확하게 기억나요, 처음 선생님을 봤던 날. 전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을 지독한 위선자에 잔소리만 해대는 깐깐한 사람인 줄 알았거든요. 사실 그 이미지는 선생님을 보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어요. 정말, 후후, 정말 웃기지만 전 그 사건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을 싫어하는 편이었거든요. 하지만, 그 날. 그 사건이 있었던 그 날 이후 제 생각은 완전히 변해버렸어요. 아니, 제 세계가 일변해버렸죠. 모두, 선생님 덕이에요.

 그 날 아침, 나는 또 관심과 애정을 빙자한 어머니의 학대 끝에 등교할 수 있었죠. 이렇게, 제가 어머니의 행동을 학대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사실 선생님 덕인데, 후후, 계속 이렇게 선생님 칭찬만 하다 보면 말을 할 수가 없으니 그냥 계속 이어갈게요. 아무튼, 제 교복 속은 항상 보랏빛과 푸른색, 붉은 색과 노랑들이 서로 섞여 향연을 벌이고 있었어요. 어머니는 교복에 가려지는 부분만 건드렸거든요. 그런데, 정말 아무도 제가 그렇게 어머니께 학대당한다는 걸 몰랐을까요? 하긴, 아무도 학교 이사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는 건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긴 한데, 그쵸. 매일 있다시피 한 일이니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날, 선생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보건실로 데려가서 약을 바르고 안아주기 전까지는요.

 

 

 그건, 그건 교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그 당연한 일을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어요.

 이해해요. 누구도 학교 이사장의 치부를 건드려 그만 두고 싶진 않을 테니까요. 그치만, 그치만 선생님처럼 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내 얘길 들어주고, 그건 사랑이 아닌 학대라고 말해주고,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해준 사람은 이제껏 한 명도 없었어요. 선생님, 선생님. 나는 그때야말로 선생님이 하늘이 제게 내려준 진정한 사랑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어요. 어머니처럼 훈육을 빙자한 학대를 더 이상 사랑으로 생각지 않게끔 말이에요. 선생님, 그런 사람을 제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요, ?

 주무시나 보네요. 그래도 계속 말할래요. 선생님께 줄곧, 내 사랑을 고백할 때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다 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요, 선생님. 나는 그 날 세상이 일변하는 걸 겪었어요. 천지가 무너지는 것 같았죠. 선생님의 배려로 하루종일 보건실에 있다가 조퇴를 할 때, 집으로 가는 길을 걸을 때, 나는 구름 위를 걷는다고 생각했어요. 그 날, 일찍 돌아온 나를 어머니가 언제나와 같이 때릴 줄 알았지만 도대체 무섭지가 않았어요. 집으로 돌아와 앉은 창가에는 청춘기를 지난 햇살이 천천히 금파金波 무늬를 새겼고, 거실의 괘종시계가 규칙적으로 초침을 건너는 소리가 음악으로 귓가에 고였어요.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던 그 집의 형태와 소리와 분위기가, 그저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되었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그런 사람이에요.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나도 알아. 이런 짓, 용서 받을 수 없다는 걸. 하지만 누울 때마다 선생님 생각에 숨이 막히게 가슴이 아프고, 매순간 선생님 생각에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는 바보가 되어버리고, 잠들면 언제나 선생님 꿈을 꿔요. 참았어요. 아주 많이 참았다구요. 이런 짓, 선생님이 싫어할 거고 나를 진저리나게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까지도 생각했지만 어떡해요.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았는데. 선생님이 이렇게 나를 경멸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내 숨결조차 증오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생님이 내 곁에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미칠 것 같은데. 차라리 선생님을 만나지 말 걸, 이라는 생각도 했어요. 알지 못했더라면, 그냥, 금이 가버린 돌 같은 예전의 심장을 평생 가지고 살았더라면 이런 행동, 이런 생각도 안 했을 거란 거, 모르는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어떡해요. 이미 알아 버렸는걸. 선생님은 이미 독처럼, 내 심장과 내 폐부, 뇌까지 깊숙하게 스며들어 떼어낼 수가 없는 걸.

그러니까 선생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선생님이 내 온몸 곳곳에 퍼진 걸 느낀 지금 이 순간보다 조금만 더, 그래서 그냥 완벽하게 행복한 이 순간에 내 생을 다할 수 있도록,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너, 지금 무슨 소릴,

 

 

 아, 역시. 잠들지 않으셨구나. 아까 물, 마시지 않길 잘하셨네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채단미.

 

 

 아실 텐데요, 선생님.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이제 슬슬 잠이 오는 걸 보니, 약효가 점점 퍼지고 있나 봐요. 선생님, 선생님 무릎에 기대어서 잠이 들어도 돼요? 아마 곧 있으면 여기로 다른 사람들이 찾으러 올 거예요. 선생님의 불쾌한 기분은 곧, 해결이 되겠죠.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는 거예요, 선생님. , 자꾸 눈이 감기네. 선생님 무릎이 참 따스해서 더 그러는 것 같아요. 선생님.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래요. , 선생님한테 사랑한다는 말만 하고 싶으니까.

 선생님, 부탁 하나만 더 들어 주실래요?

 

 

 -싫어.

 

 

 아, 역시. 그래도 듣고 나면 들어주고 싶어질지도 몰라요. 선생님, 잘 자라고 해주세요. 우리 단미, 잘 자라. 내 생을 통틀어 우리 어머니도, 단 한 명의 사람도 하지 않았던 말. 잘 자라고, 한 마, 디만.

 아, 잠이 너무 온다. 선생님, 혹여나 내가 잠, 들어도, 깨우지, 말아 주, 세요. 선생님. , 생님. -, ,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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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banera_

 “여기 있다. 사이비로써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자들이다. 어서 끌고 가라.”

 

 

 분명 낯설어야 하는 목소리였으나 애통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익숙하다 못해 그립기까지 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가물어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다정하게 미소 짓는 범신의 얼굴이 시계 안에 가득 찼다.

 

 

 “약조는 지키었다, 아가토. -준호야.”

 

 

 언제나 불퉁하게 내뱉거나 저를 내려다보듯 하는 그 얼굴이라, 한 번이라도 다정하게 웃는 낯을 보고 싶다 했건만 저를 따스하게 바라보아주는 눈이 이리도 슬프기 그지없으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방금 전까지 마귀에게 붙들려 있던 몸, 기나긴 구마 의식에 지쳐 나가떨어진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열린 문, 무정한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그 문으로 병졸들이 몰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그 달빛 너머, 비통한 눈빛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숙부-, 치헌의 얼굴을 감기는 눈 너머로 선명히 그려내면서도.

 

 

 “호조 참-, 치헌아.”

 

 

 바스러질 듯 꽉 깨물린 어금니 새로 오열을 억누르던 치헌이 오라를 받는 범신을 말없이 주시한다. 끌려가는 제가 어찌될지 그 끝을 빤히 알면서도 김범신 베드로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온화한 그 눈에 다정한 웃음까지 띄워내며 범신은 치헌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치헌아. 걱정 마라. 준호는 괜찮다. 그 아이는, 우리와 연관된 이가 아니다. 그러니-, 숙부인 네가 잘 설득해 다오. 괜히 나 따라 오지 않게끔. -나는 괜찮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것은 오직-, 그 아이를 따라 가지 못했다는 것뿐이었건만. 내가 준호를 살릴 수 있었다니, 나는 그것으로도 너무나 충분히 이 삶을 보상받았다.

 

 

 잇지 못했던 순간들을 숨소리 사이로 삼키면서 범신은 고개를 숙이고 기도문을 왼다. 그 차분한 모습에 치헌은 결국 눈을 감고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린다.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 겁에 질린 눈으로나마 검은 돼지를 안아 들어 달려가는, 검은자위가 또랑한 아이조차 제 시야 안에 감겨들지 못하게끔.

 

 

 

 

 며칠 전, 처음 범신의 말을 듣고서 치헌은 들고 있던 술을 그 얼굴에 쏟아 부을 뻔 했다. 아니, 믿기지 않아 되묻는 것이 먼저였겠지만 그 진지하고도 강건한 표정에 의심은 저만치 밀어두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는 하나밖에 안 남은 제 조카를 서학이라는 사지로 몰아넣은 범신에게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로 억눌러본다.

 

 

 “그래서, 내 손으로 조카를 끝장이라도 내라는 거냐. 이 새끼야.”

 

 

 엄격하지만 항시 아랫사람들을 따스하게 굽어보는 인격자라는 평을 받는 치헌이었다. 그런 치헌의 새로운 모습에 범신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음을 흘릴 뻔 하였으나 금시로 표정을 다잡고 주먹을 쥔다. 왼손에 잡힌 동백선이 부르르 떤다. 두터운 붓으로 그린 짙은 수묵화를 닮은 얼굴에 기나긴 침묵이 여백을 채운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나-, 오래 살다 보니 최치헌 네놈한테 욕도 들어보는 구나.”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펼치지 않은 동백선에는 여전히 가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만치나 오래 살았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나를 잡아가다오, 치헌아.”

 

 

 동공의 흔들림이 멎었다. 의문과 당혹이 서린 눈빛에 범신도 떨리는 눈을 조용히 마주한다.

 

 

 “네 조카, -, 아가토를 살리려면 그 수밖에는 없다. 내가 마음대로 네 조카를 데려간 게야. 그리하자. 그리하면, 준호는 살 방도가 있을 게다.”

 “설명을 좀 해보아라. 대체 무슨 말이냐, 너는.”

 

 

 오랜 벗의 진솔한 어투에 조금씩 분노는 삭아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납득한 것도 아니었다.

 

 

 “설명한다고 네가 이해나 하겠냐마는, 네 조카를 살리는 수는 이뿐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 놈한테 잡혀 죽든, 밀고를 받은 병졸들한테 끌려가든, 준호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다.”

 

 

 단숨에 술잔을 들이킨다.

 

 

 “-이 부근 서학도 명단이 밀고 되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나와 준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도.”

 

 

 온화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둥글고 고운 눈썹 아래 속눈썹이 긴 민 눈이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으나, 연지를 바른 입술만이 피처럼 붉어 마치 그림 속 여인이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육조대로 어스름 녘, 여인은 겁도 없이 범신의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동지사 어르신이 맞으신지요.”

 “그러하다만, 뉘시오?”

 “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사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오천 냥이니, 보름 후 술시까지 주 선비님 댁 앞에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굳이 주 선비, 즉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집을 언급했다는 것은 적어도 제가 서학도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도 모르게 백단향이 나는 그 밤 속 준호가 떠오르자 등골이 섬뜩하게 곤두서는 느낌이었으나 부러 느긋하게 한숨을 쉰다.

 

 

 “어허, 오천 냥밖에 부르지 않았다니 심히 섭섭하나 다행이라고 해도 좋겠구나. 더 필요하지는 않느냐.”

 “-여전하네요, 그 구역질나도록 뻔뻔한 모습은.”

 

 

 돌아보는 장옷 사이로, 저를 쳐다보는 눈에는 시커먼 악의만이 차있었다.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명징한 눈. 어렴풋한 기억을 자극하는 그 홍채와 마주하다 말고 범신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 나를 알더냐.”

 “여전히, 저만 올곧으시고 저만 높으신 사람이군요, -, 범신.”

 

 

 그리도 청일했던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느끼게도 하는 악의에 찬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가 두개골 안으로 뭉뚱그려지며 단 한 번도 삭히지 못했던 목소리와 겹쳐진다. 범신은 동백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떠올리면서도 제 안에서 20여 년간 한 순간도 지운 적 없던 하나의 이름을 끌어올렸다. 그 이름이 입술에 올라앉은 순간 범신은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찌해야 준호를 살릴 수 있는지 그 길이 제 앞에 환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비록, 제 길이 가시면류관을 쓰고서 십자가를 짊고 가야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초희.”

 “잊으셨다 해도 가증스러웠겠지만, 그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이름이 썩 달갑지는 않습니다.”

 

 

 둥글고 선했던 인상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져버렸다. 아까와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로도 완전히 달라진 그 표정 그대로, 여인은 눈을 가늘게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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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바랜 기억 속에서 너는 항상 한 치도 흐트러짐이 없는 교복을 입고, 단정한 감람색 넥타이를 늘어뜨린 채 칼날 같이 잘린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다. 꼿꼿하게 세운 등은 언제 누구 앞에서도 굽힌 적 없이 당당했지. 미친개로 소문난 수학 선생에게 잘못 걸려 뺨을 두 대나 얻어맞을 때에도 무너지지 않은 너를 보며 나는, 가끔 가끔, 고아하게 반듯한 네 등을 활처럼 구부러뜨리고 싶다는 생각에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은 적도 부지기수였다.

 

 

 하얗고 얇은 도자기 잔에 자연스러운 입술 자국을 손가락으로 지워내며 눈가에 품위 있는 웃음을 얹는다. 그 미소에 건너편에 아무렇게나 걸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은 입술 한 쪽 끝을 비틀어 올리며 반대로 잔 손잡이를 손가락에 걸치고 한 모금, 소리 나지 않게 차를 마신다.

 

 

 “별 일이네, 박묘란. 네가 나를 보자고 할 줄이야.”

 “나야말로 제나 네가 이렇게 순순히 나와 줄 줄은 몰랐지.”

 “안 될 건 뭐람. 이럴 줄 알았음 수갑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히스테릭한 웃음을 쿡쿡 흘리나 싶더니 일순 몸을 숙여 눈을 맞춘다. 그때와 다르지 않은 새까만 눈. 단 한 번도 타인을 포용한 적 없을 것 같은 암흑 속에 오롯이 깃든 것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잃지 않은 박묘란, 단 한 사람뿐이었다.

 

 

 “기쁜 걸, 네가 내 이름을 기억하다니.”

 

 

 균형을 잃은 입술이 사소하게 흐트러진다. 내 한 마디 한 마디에 네가 반응할 때마다, 나는 어찌할 바를 잘, 모르겠다.

학창 시절에 네가, 친구라고 여겼던 이가 있기나 했을까. 목덜미에 간신히 닿을 만큼 짧게 자른 머리카락은 믿기지 않을 만큼 짙은 검은색. 너무나 새까매 오히려 푸른 염료가 담기지는 않았을까 의심하게 하는. 아무렇게나 구겨 입은 하얀 블라우스의 단추는 언제나 두 개 이상이 열려 있었고, 네가 구색이나마 맞춘 넥타이를 한 날에는 전교생 모두가 그날은 복장 검사가 있겠거니, 하고 다시 한 번 더 제 교복을 돌아보곤 했었지. 누구에게도 관심 없는 눈을 하고 단 한 번도 제 밖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았던 너를 나는, 복도에서든 교실에서든 그 검은색 머리칼 사이로 자주자주 넘겨다보았다.

 

 

 “이래봬도 우리 같은 학교, 같은 반도 한 적 있지 않았어? 사회에서 더 자주 보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서 말이야.”

 

 

 묘란의 한 마디에 흔들렸던 눈빛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심연을 닮은 눈으로 잠깐 허공을 바라보던 제나는 털썩, 카페의 소파에 기대며 담배 곽을 꺼낸다. 가느다란 손가락 새 익숙하게 한 개비를 엮은 뒤 흘끗 묘란에게도 곽을 기울였다가 거두며 느슨하게 웃어 보인다.

 

 

 “건강 생각해서라도 너는 끊어.”

 “쥐가 고양이 생각해주는 구나. 그래, 나는 괜찮으니 너는 펴도 돼.”

 

 

 가볍게 농담을 건네나 싶더니 묘란의 허락에 불을 붙여 푸른 연기를 내뱉는다. 끊은 뒤 담배 냄새를 그리 반기지 않던 묘란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제나가 피우는 이 담배 냄새는 어딘지 옛 기억을 모호하게 자극하는 그리움이 있었다.

 

 

 “제나야, 서제나. 참 얄궂네. 우리가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상대방에게 한다기보다는 반쯤은 제게 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제나도 잠자코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생에 너와 내가 엮일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린 듯 완벽한 모범생과 동시에 그린 듯 완벽한 날라리. 야간 자율 학습을 끝마치고 가는 길, 서둘러 집에 가기 위해 으슥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너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휘황한 피어싱들을 자랑하며 담배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찰나의 시선. 너는 낯선 발소리의 주인공이 나임을 확인하면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입술 끝에 물린 담배에 열중했다. 가로등조차 없는 어둑한 골목길에서 오직 가늘게 비추이는 달빛만이 파르라니 떨리는 연기 속을 유영하며 네 단정한 옆모습을 유려하게 떠오르게 했다.

 

 

 어느 날이었던가, 패싸움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어디서 요란하게 얻어터지고 오기라도 한 건지 입술 끝과 눈두덩이 찢어져 피투성이가 된 채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너와 마주하기도 했다. 당혹스러워하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평소와 다름없이 나른하게 시선을 돌리던 너는, 눈앞에 디밀어진 손수건에 놀라지도 않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었지.

 

 

 “, .”

 

 

 두근거리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아직까지 긴장과 갈증이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 날것의 숨소리와 살기로 뭉친 눈빛. 희미한 달빛만으로도 형형하게 빛나는 그 공허한 동공과 마주하며 나도 모르게 목구멍 너머로 침을 삼켜냈다. 사실 욕설 한 마디쯤, 아니 따귀나 주먹 등 거친 몸동작 한 두 개쯤은 각오하고 내민 손수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너는, 단 한 마디의 욕설이나 행동 없이 그 무심하고 나른한 안정(眼精)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들곤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제 얼굴을 조금 정리하였다. 신기하기도 하지, 어떻게 살기와 나른함이 공존할 수 있지, 싶었지만 머리카락을 닮아 심연을 모아둔 네 눈은 그렇게도 모순적이면서도 독특했다.

 

 

 “고맙다, 반장.”

 “-, .”

 

 

 내가 반장인 건 알고 있었구나, 저도 모르게 놀란 표정으로 잠깐 너를 돌아다보고는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게 반사적인 미소를 지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하고 금세 시들기는 했으나. 닦아낸 손수건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너는 여전히 머뭇거리며 서 있는 나를 보고 그제야 처음으로 대화라고 할 수 있는 말을 꺼낸다.

 

 

 “이거, 빨아서 돌려줘야겠지?”

 “? , ? , 아니, 그게, 그렇게, -근데, , 저기, 상처는, 괜찮아?”

 “-이 정도야 뭐, 밴드 붙이면 될 걸.”

 

 

 우리 학교의 누구라도 보면 믿기지 않아 할 대화였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을 더듬다니, 그리고 네가 이렇게 협조적인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가다니. 내 기억 속 너는 무엇과도 섞이지 않을 것처럼 검푸른 머리카락만큼이나 철저히 세계를 무시해나갔고, 어떤 사람도 네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게, 동시에 누구도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게끔 하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 네가, 이렇게나 무구하고 무해한 목소리로 말을 잇다니.

 

 

 “그래도 약은, 발라야 하지 않을, .”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렇게나 허둥대며 말을 더듬는 너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웃기기도, 귀엽기도 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매일 아침 다림질이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하얀 블라우스, 목 끝까지 채운 단추에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넥타이에 정확한 각도를 유지하는 이름표. 한 올의 삐침도 없이 칼처럼 정리 된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며 같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꼼꼼함과 완벽함으로 일을 척척 처리해내는 너를, 아무리 학교 일에 무관심한 나라도 모를 리 없다.

상냥한 말투로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다정하며, 공명정대한 너는 바꾸어 말하면 누구에게도 자신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과도 같다. 그런 너와 나는 평생을 낮과 밤으로 나뉘어 만나지 못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사실 그 날의 일은 나에게도 뜻밖이었다.

 

 

 지긋지긋한 삶을 잊게 해주는 것은 몇 개 없었지만, 슬슬 끊을까 하던 담배가 그나마 위안이 되곤 했다. 학교 근처지만 재건축 들어갈 예정이라는 낡은 상가가 몇 개나 들어선 그 골목은 낮에도 지나다니는 사람 없이 외로운 곳이었고, 그곳이야말로 담배를 태우기에는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남에게 들키는 것 자체는 별 상관이 없었지만 나의 삶을 살아본 적 없이 이해할 생각도 없는 타인에게 공허한 설교를 듣는 것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조금 급한 듯한 낯선 발소리를 듣곤 새로운 곳을 또 찾아야 하나, 지겨운 생각에 머리카락을 긁적거리며 고개를 들어보자 달빛이 네 뒤로 가로놓였다.

 

 

 하얗고 가는 달빛이 그날따라 왜 그리 휘황했던지. 교복 블라우스 카라를 벨 듯 단정한 머리카락에 덧씌워지는 달빛은 화관 같기도 하고, 번진 날개 같기도 해서 우습게도 조금, 안심해버렸다. 너라면, 그래 너라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란 근거도 없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마주침.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은 고요라 할지언정 나는 네 익숙한 발소리를 들었다. 메트로놈처럼 단정하고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교복 단화 소리. 그 소리가 낡은 골목길에 울려 퍼질 때에는 아주 잠깐, 네가 오겠거니, 나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미소가 입술 끝에 허름하게 흐르곤 했다.

 

 

 그날은 너를 기억했던가. 굳이 기억하자고 한다면 참으로 재수 없는 날이었다. 학교에서는 뺨을 두어 대 얻어맞고, 그리고 집에서는 이미 나조차 포기해버린 나를 들들 볶으며 소리나 내지르던 그런 날들. 끝없이 파고드는 운동화 끄트머리로 지구의 파편을 멸망시키고 싶다고 뇌까리며 나는 오직 단순하게 너를 기다렸다. 그저, 달빛보다 환하게 저를 비추려던 나를, 비우고 기대고 또, 바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고, 여전히 내 얼굴에는 어떠한 흔적도,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내가 기대한 것이라고는 단순히,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 그 얼굴, 오직 그뿐. 그렇게나 나는 단순하게도, 그리고 위대하게도 너를 기대하고 있었다.

 

 

 어떤 무엇과도 바꾸지 않고 바꿀 수 없을 너를,

 몇 번이고 떠올려보고, 몇 백번이고 내가 기다려 본다.

 

 

 오직 달랐을 테고, 완전히 변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을 통틀어 나는 너를 떠올리지 않고서-, 단 한 번도 기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이나 너와 나는 달랐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만이 나를 살려주던 시대가 있었다.

 

 

 

 

 한동안 학교 끄트머리에서는 명문대학교에 진학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정도로 한 사람은 우등생으로 이름이 올라있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대학교에 잔디구장 하나를 지었다거니, 그 학교 출신 유명 인사 이름을 딴 건물을 지었겠거니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입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전히 서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스쳐 지나기를 반복했으나-, 방학만 되면 핫핑크 색 머리카락 사이 아무렇게나 담배 연기를 흩날리며 교내를 활보하는 한 사람과 염색 기 하나 없이 단정하게 쓸어 올린 머리카락 사이로 반듯한 이마와 단정한 옷차림을 자랑하는 한 사람은 알 수 없는 유대감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상상도 못했지, 서제나 네가 서미나의 딸일 줄은.”

 

 

 가볍게 쿡쿡 웃는 제나의 안광이 서늘하다. 푸르스름한 담배 연기를 엷게 내뱉으며 제나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나야말로, 설마 네가 설표회의 무남독녀 후계자일 줄 꿈에나 상상했겠니.”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힌다. 아주 담백하지만은 않은 그 시선 속에는 독살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사랑스럽기도 한 낯선 감정들이 넝쿨을 감는다. 서제나와 박묘란.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를 곁눈질로만 바라보다 사회에 나가서야 처음으로 서로를 그 네 개의 안정 안에 똑바로 담게 된다. 그 안정 속, 두 사람의 홍채만이 아닌 다른 물건-이를테면 달빛조차 되튀지 않도록 곱게 재를 먹인 총신 같은 것-까지 휩싸인 것은 별개의 일이었지만.

 

 

 사회에 나가서도 여전히 분홍빛으로 물든 머리카락 점점이 박혀든 음영은 달빛이 엿보였다 사라지는 그림자는 분명 아니었다. 누구의 혈흔인지 모를 그 암적색 액체들은 탐욕스럽게 머리카락을 삼키고도 제나의 흰 뺨까지 튀어 있었다. 묘란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었다. 턱선에 맞추어 단정히 자른 머리카락은 드물게도 흐트러져 군데군데 핏방울이 뭉쳐 하얀 셔츠 위에 거친 흔적을 남기었다. 예상치 못한 인물과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두 사람이 서로를 겨눈 총구를 멈칫하게 하기엔 충분한 이유였다.

 

 

 “-제나?”

 “박묘란...?”

 

 

 어두운 공간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또렷하게 울렸으나 여전히 총은 거두지 않은 두 사람 중, 먼저 손을 거둔 것은 묘란이었다. 빛을 잃지 않은 시계 안에 제나의 형체를 깊이 가두며 저도 모르게 생긋, 입술 끝을 끌어올린다.

 

 

 “서제나, 서미나. 추리 좀 할 걸 그랬어. 그래, 네가 우리 학교에 온 것도 사실은 납득이 되지 않았는데 경찰청장의 딸이라면 얘기가 또 다르지.”

 

 

 고등학교 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묘란의 목소리에 제나도 긴장했던 자신이 우스웠던 듯 나른한 미소를 흐트리며 총신을 거두었다.

 

 

 “내가 할 말이지. 하기야, 설표회 차기 회장님께서 경찰대에 진학할 거란 상상이나 했겠냐?”

 “우리 할머니의 안목을 칭찬하는 거라고 생각할게.”

 

 

 가볍게 대답한 뒤 입고 있던 재킷의 주머니를 뒤진다. 그러나 찾던 물건이 나오지 않는 듯 가볍게 혀를 차는 묘란에게 제나는 자연스레 다가가 그 입술에 제 담배를 물려준다. 입술에 담긴 끄트머리가 젖어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문 묘란 또한 고개를 제나 쪽으로 기울이며 담뱃불을 빌린다.

 

 

 “몸에 안 좋을 텐데.”

 “총보다 더 안 좋을 리가.”

 

 

 우문현답이었다. 궁색한 말 붙이기조차 되지 않는 제 말에 제나가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자 묘란도 소리 내어 따라 웃었다. 이내 두 사람의 웃음은 합창이 되어 어둠만이 똬리를 튼 공간에 별을 심는다. 허리를 꺾어가며 서로의 등을 두드려가며 신나게 웃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주기 시작했다.

 

 

 “우리 둘 다 학창 시절에 체력 점수가 좋았지?”

 “왔다 갔다 했지. 내가 1등하면 다음번엔 네가 1, 그리고 또 다음번엔 내가 1등하고 그랬잖아.”

 “맞아. 제나 네가 공부는 안 했어도 체력 시험은 항상 잘 보긴 했어.”

 “-자기변명 같지만 어머니에 대한 마지막 반항이었어.”

 

 

 달빛이 내려앉는 붉은 핏자국이 말갛게 지워진 제나가 부루퉁하게 대답하자 묘란이 작은 웃음소리를 낸다.

 

 

 “그래. 나도 그러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늦은 일탈은 어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그 말에 묘란이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는다. 그 말을 들은 묘란의 친구들은 백이면 백, 뜨악한 표정으로 저를 돌아다보거나 혹은 농담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사실은 이만큼이나 적확하게 제 심경을 표현해준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그래볼까. 시작은 뭘로 하면 좋겠어?”

 

 

 놀란 입술에 다시 웃음을 피워 물었다. 묘란의 물음에 제나는 조금 고민하는 듯 말이 없다가 별안간 폭소를 터뜨린다.

 

 

 “아하하, 이건 어때? 네가 경찰이 되는 거야. 아주아주 충직하고 성실한 경찰. 이거야말로 널 기대하는 사람에게 주는 가장 커다란 일탈 아니겠어?”

 

 

 못 견디겠다는 듯 말 사이사이에 터지는 웃음을 겨우 억누르며 대답해준 제나를 꽤 오랫동안 바라보던 묘란은 미묘하게 고개를 기울인다.

 

 

 “글쎄, 그것보다 조금 더 좋은 생각이 난 것 같은데.”

 

 

 여전히 겨우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제나를 나른하게 내려다보다가 그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든다. 학창 시절부터 생각했던 것이지만 여느 사람에 비해서는 색이 옅은 그 입술 곁, 한없이 입술에 가까운 그 뺨에 입을 맞춰본다.

 

 

 “경찰청장 딸과의 연애는 어때.”

 

 

 그 때 내가 뭐라고 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지금이 조금은 바뀐 미래가 되었을까. 다시금 담배 연기를 입술 새 가늘게 뿜어내며 멍하니 네 손가락을 바라본다. 제 턱에 닿았을 때처럼, 여전히 가늘고 뼈대가 곧은 손가락이다.

 

 

 “그 손가락으로 대체 몇 명이나 죽여 댄 거야.”

 “살인은 취향이 아니었어.”

 “한 사람도 죽인 적 없어?”

 “네가 죽인 한 사람은 알고 있는데.”

 

 

 여전히 우아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소리 나지 않게 찻잔을 받침에 둔다. 엉뚱한 소리라며 웃어넘기려던 제나는 여전히 제게 시선이 박혀있는 묘란에게 눈을 깜박인다.

 

 

 “내가 별 짓은 다했어도 사람 죽인 적은 없는데. -죽도록 팬 놈이 진짜 죽었냐?”

 “내 마음을 그 때 한 번 죽이긴 했어.”

 

 

 쓸쓸하게 대답하며 찻잔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 폭소를 터뜨릴 뻔한 제나였으나 진지한 상대방에게 어색하게 입술을 굳힌다.

 

 

 “-, 언제 내가 네 마음을 죽였다고 그래.”

 

 

 그러다 목이 타는지 찻잔을 들자 묘란이 흠칫 고개를 든다.

 

 

 “제나야!”

 “? -, , 말해.”

 

 

 마실 타이밍을 놓치고 눈만 깜박거리는 제나에게 묘란이 웃어준다. 나이는 들었지만 그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냉정하면서도 단려한 분위기는 그것만으로도 주위를 압도한다.

 

 

 “네가 지금 하고 있는 조사, 그냥 여기서 마무리 지을 생각은 없는 거지?”

 “-그래. 너무, -너무 많은 일들이 벌어졌어. 이미 내 권한을 지나간 거야.”

 “서울시 경찰청장인 네게 권한이 지나갔다는 건 그냥 말장난으로밖에 안 들려. 정말, 여기서 그만 둘 생각은 없어?”

 “나야말로, 박묘란. 네 스스로 설표회 자료를 넘겨준다면 어떻게든 너만큼은, 아니, 최대한 형량을 낮게 잡도록 힘써볼게. -묘란아, 제발.”

 

 

 한 때 그리도 갈망했던 시선들이 이제야 서로를 마주보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닿지 못하는 평행선 위 새겨지는 그리움을 헤아려보는 수밖에 없다. 슬픈 한숨처럼 뒤따라 붙는 제나의 마지막 말에 묘란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한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진다.

 

 

 “좀 더, 빨리 불러주지 그랬어. 그렇게.”

 

 

 참 듣고 싶었던 내 이름. 묘란아,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주는 내 이름. 다른 사람에게 불리는 그 이름과 다를 바가 없는 자음과 모음이지만 네가 불러줄 때마다 내 이름은 무지개, 보석, 이슬 같은 것들을 닮아간다. 사무치게 아름다우며 단지 네게 속해있을 뿐인, 오직 네게 불러짐으로써 완성되는 네 속의 나.

 

 

 그러나 나는 네 이름을 부르길 원치 않았다. 내 입속을 뒹구는 네 이름은 어린 날 먹었던 솜사탕보다도 달콤하여, 그렇게 내 혀를 다디달게 녹여놓고도 돌이켜보면 그 존재조차 의심하게 만들어버렸으므로. 네 이름이 달콤한 것인지, 네 존재가 사랑스러운 것인지 모호하게 만드는 그 이름을, 나는 끝의 끝까지 부르지 않길 바랐다. 내 생애의 끝자락에서조차 결코.

 

 

 -제나와 묘란은 서글프게 녹아드는 침묵 속에서 끝끝내 서로를 갈구하며,

 

 

 재처럼 내려앉는 그리움 앞 마주 앉은 그 자리에서 서로를 그리며 찻잔을 들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입술 끝에서 흐르는 선혈을 선명히 자각하면서 묘란은 입을 열었다.

 

 

 “나 또한 그럴 수 없으니, 너 또한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눈가에 어리는 눈물이 단려하게도 제나는 애써 웃음 지었다. 주름지는 눈가에 웃음과 눈물이 촛농으로 무너졌다.

 

 

 “제나야, 서제나. 내 생을 통틀어, 단 하나 남았던 내-, 연모.”

 “말하지 마, 묘란아.”

 “이제야 마음껏 불러주는 구나, 내 이름.”

 

 

 피투성이가 된 얼굴이지만 웃음기가 가득하다. 눈물이 그렁한 눈에는 마찬가지로 제 입술 너머 피를 뚝뚝 떨구는 제나가 사진처럼 박혀들었다.

 

 

 “나는 결국 네 찻잔에 독을 넣지 못했고, 너도 결국 내게 권한 담배에 독을 넣지 못했구나.”

 

 

 너를 죽이느니, 차라리 내가 죽겠노라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떨리는 손으로 결국은 찻잔을 바꾸어 놓았다. 그건, 참으로 행복하고도 황홀하게도, 너 또한 마찬가지였구나. 내 귀에 울리는 내 이름이 너무 달콤해서 오히려 쓰다. 천천히 뻗어낸 손가락 사이로 운명을 닮은 네 손가락이 엉켜온다.

 

 

 그래,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주자. 차마 권하지 못했던 독배와 독연처럼, 대신 서로를 향해 무너지자. 그을리고 엎드린 그 사이로, 서로를 향한 눈빛만큼은 지우지 못하는,

 그런 독이 되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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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안에 이 것이 계속 날뛰는 거죠, 아저씨?”

 “-준호야.”

 “어떡해야 이것이 나갈까요. 저 스스로 죽으면 될까요.”

 

 

 헛웃음 치는 와중에도 제 손이 묵주를 감아쥐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님, 자비를 베푸소서. 혀끝에 맴도는 감상 같은 기도를 뇌까리면서 준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여동생을 죽이고도 또 다른 생명을 잡아먹으려 하는 나는 짐승도 무엇도 못될지어다.

 

 

 저주 같은 눈물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치받고 있을 때 범신이 내민 손이 묵주를 감은 준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말 하지 말어라, 아가.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다. , 준비를 하마.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어라.”

 

 

 안타까우면서도 또한 짙은 눈이었다. 그리도 강건했던 눈에 언뜻 비치는 눈물과, 그리도 짙고 성숙한 눈 안에 선명하게 어리는 슬픔과 당부에 준호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주저하였다. 제 가족을 잡아먹고도 다시금 다른 이를 죽이려 드는 저는 당연히 죽어야 하건만, 이렇게 저를 붙잡아두는 네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아저씨.”

 “그래.”

 “베드로.”

 “불렀느냐.”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유독 뚜렷한 그 눈에는 가릴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가 뒤범벅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러진 곳 없이 투명했다. 가리지 못한 투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범신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준호가 들고 있던 장미 묵주가 제 손 안에 자국을 남겼다.

 

 

 “네가 포기해달라고 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터이다.”

 

 

 이번에도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준호였다. 별을 잉태한 밤을 애써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준호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고집 좀 그만 부려요, 춘추관의 개망나니.”

 “하느님께는 그저 온순한 한 마리의 개가 될 지어니.”

 

 

 그제야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준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세례, 받을게요.”

 

 

 눈이 마주쳤다. 빛나지 않는 눈물이 고인 눈이었다.

 

 

 “-그러면, 제 안의 이것도 조금은, 얌전해질까요.”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범신에게 멋쩍게 웃어 보인 것은 제 나름이 가진 배려였을 터였다.

 

 

 

 준호가 세례명으로 고른 것은 아가토였다. 범신과 문모와의 상의 끝에 정한 이름이었다. 과거 구마자였다던 이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은 그만큼 준호가 구마 의식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범신의 희망이 섞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낯선 발음이 어색한지 몇 번이나 혼자서 중얼거리던 준호는 범신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가토.”

 “, .”

 “걱정 하지 말아라.”

 

 

 그제야 제가 쥐고 있던 묵주를 내려다본다. 이제는 붉은 색을 세는 편이 더 빠른 검은 장미 묵주, 쥘 때마다 악의 서린 속삭임이 점점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리게 흔들리는 홍채에 범신은 그 머리카락을 향해 뻗어 가는 손가락을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짓는다.

 

 

 “다 잘 될 것이다. 괜찮아.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마.”

 “어떻게 아저씰 믿어요.”

 

 

 부루퉁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입술에 희미하게 웃음이 어린다. 그 날 이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입술에서 슬쩍 시선을 떼어낸다. 가슴에 얹히는 무거운 죄책감과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부러 말을 이어나간다.

 

 

 “실패에서 배운다지 않더냐. 잘할 자신이 있다. 곧 보름이니 그 때에 맞추어 날을 잡도록 하자.”

 

 

 흔들리던 동공조차 당신 앞에서는 올곧아진다. 그러나, 올곧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실은 본디 성정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 범신은 물기가 물크러지는 준호의 눈길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뜻하지 않은 미소마저 띄운다. 두터운 손을 뻗어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읊는다.

 

 

 “걱정 말아라. 내 약조하지 않았더냐. 너를 포기하지 않기로.”

 

 

 그 한 마디에, 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숙부인 치헌 앞에서도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심부들이 당신 앞에서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무서워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감사해요. 지현아. 후두 너머 갈 곳 잃은 말들, 열 살 이래로 꾸준히 삼켜 이제는 심장 어딘가 굳은살로 낱낱이 박힌 언어들이, 네 앞에서는 녹아 넘쳐흐른다. 애써 입술을 내리누르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리자 손바닥만 했던 온기가 어깨로 내려온다.

 

 

 “믿어다오, 준호야. -, 아가토.”

 

 

 바람결에 흘러가는 말처럼 따라붙는 그 호칭에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이미 범신은 큰 걸음으로 성큼 성큼 멀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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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느름하게 뜬 눈이 저를 쳐다보자 준호는 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저도 제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드밀어진 말에 오히려 용기가 생긴다.

 

 

 “, 만날 자기가 좋아하는 데만 가고, 나 가고 싶은 데는 한 번도 안 데려갔잖아요.”

 “허 참, 네가 먼저 말한 적은 있더냐? , 생떼만 쓰던 녀석이 말은 많구나.”

 

 

 그러면서도 딱히 거부하는 기색은 없다. 저를 보지만 동공보다 안 쪽을 살피는 듯한 그 눈에 일순 한 마디가 툭 내뱉어지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겨우 막아낸다. 그를 무엇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범신은 동백선을 펼쳐 제 입매를 가린다.

 

 

 “그래, , 꽃을 보고프다는 말이지.”

 “, 여자 같은, , 기생집 이런 데 말구요. , ! 진짜 꽃! 우리가 그 때, 빨간 동백 봤던 거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화가 치밀어 그렇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범신이 오히려 황당한 웃음소리를 낸다.

 

 

 “허허, 아니, 누가 기생집엘 간다든? 저 혼자 화가 나 그 야단이구나. 오냐, 알았다. 내가 명색이 동지사인데, 너 가고픈 데 한 군데 못 데려가겠느냐.”

 

 

 동백선을 소리가 나게 접더니 준호의 곁에서 반 발자국 앞서 걷는다. 찰랑이는 갓끈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 스치는 옷감 소리가 제 심장 소리를 가리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캄캄하게 이울지는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동백이 보이기나 하겠느냐마는, 사실 준호에게 동백 구경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눈매가 처연하게 고왔다. 기름하게 한쪽만 쌍꺼풀이 진 눈에는 물기가 번져갔다. 평소에도 사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선이 두드러지는 얼굴에 나른한 색기가 퍼져나갔다. 풀린 채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이 희게 질린 얼굴과 어울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 없이 붉은 입술이 제 입술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던 이유가. 찢겨진 꽃잎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애달픈 입술이 찰나로 닿아오고, 암흑 속에서도 별을 품었노라 믿게 하는 네 동공을 마주하면서 사실 범신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목덜미를 부드럽게도 훑어 내리는 그 손끝이 주는 감각에 몸이 떨리기도 전에 순간, 너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 생각하였다.

 

 

 “, 신 차려, 최준호!”

 

 

 멈칫하던 순간에 노성이 터져 나왔다. 둘 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누가 보았다면 웃음을 금치 못할 광경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진지했다. 준호는 여전히 예의 요염하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지우지 못 한 채였다. 물에 젖은 것인지, 혹은 제 타액에 젖은 것인지 물 위에 비친 붉은 초승달을 입술에 떠올리면서 준호는 다시 범신을 끌어안았다.

 

 

 “추워요, 아저씨. , 너무, 추워요. -무서워요, 아저씨.”

 

 

 일순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뚜렷한 무구한 눈에, 그리고 이어지는 그 끝말에 범신은 판단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래, 아가. 준호야. 네 무섭다면 내가, 그런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피가 번졌다.

 

 

 황망하게 범신을 밀쳐낸 것은 준호 스스로였다. 제 입술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틀거리는 불안정한 걸음으로나마 범신에게서 멀어진다. 교태 어린 자태는 어디로 가고, 비명이라도 지르듯 거칠게 울음 섞인 포효를 내뱉는다.

 

 

 “제기랄, , 돼요! 그러지 마!”

 

 

 여린 입술을 무참하게도 짓씹은 고통이 준 대가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준호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억지로 기어가며 범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귀신 들린 몸이에요, 당신과는 관계, 없잖아! 도망가, 도망가요! 이러다 우리 둘, , 죽어!”

 

 

 안개라도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으로 광경이 스쳐갔다. 유달리도 믿음직해 보이는 강건한 네 얼굴을 감싸 입을 맞추고, 젖은 혀를 섞고, 그리고 너를 끌어안은 채 붉은 동백이 한 아름 꽃을 피워낸 차가운 호수로 곧장 뛰어들던 나.

 

 

 그 모든 순간 중에서 역겨운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너를 죽이려던 내가, 너를 죽이려는 내 안의 마귀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준호는 고장 난 것처럼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무작정 범신에게서 멀어져갔다. 벗겨진 신발을 손아귀에 우겨 쥔 채 얼굴을 진창에 처박으면서도 기어가는 무릎은 멈추지 않는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한 치라도 더. 너를 죽이려는 나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

 

 

 “-아가, 준호야.”

 

 

 다시금 혼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네 목소리가 구원처럼 울렸다. 아니, 그저 너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까무룩 기절해버린 준호의 입술에서 달게 비친 피를 지워 등에 업으며 범신은 그저 묵묵히, 달도 없는 그 밤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당신이 서렸다. 당신이 아닐 리 없었다. 자정이 웅크린 장지문 너머 익숙한 그 그림자는 당신이었다. 사향보다 짙으면서도 묵직한 그 향기는 당신이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낮게 읊조리면서 짙은 당신의 향기를 애써 폐부에서 몰아내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날뛰듯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빌어먹을 심장은 여전히 가슴 속에서 나직하지도, 작지도 않게 멋대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이 모두 희게 새어버릴 때까지.

 

 

 너와 나는 서로가 거기에 있음을 알면서도 차마 한 마디조차 내지 못하던, 그런 찰나들이 너무나도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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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셨습니까.”

 

 

 이제는 왜 그리 조용히, 그리고도 잰 걸음으로 대문 뒤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저 온화한 인상의 선비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 만큼 제 표정을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준호는 미간에 새긴 세로줄을 펴지 않았다. 설득 당해 오기는 왔다만 생리적으로 드는 불편함과 이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인지 문모는 자연스러운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통 저에게 말씀을 많이 하셔서, 대체 어떤 학문이기에 이리 열심히 말씀을 하시나, 들어나 보는 심경으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무례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에 범신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나 싶었지만 문모도 여전히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 마음 이해합니다. 그럼 편히 계시다 가십시오. 저는 미사가 있어서 이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여 궁금하시다면 지금으로부터 한 식경 뒤에 예배당, 아니 뒤뜰에 있는 안채로 오시지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다. 제가 혹여 나쁜 마음을 먹고 여기를 뒤지거나 하면 어쩌려고, 꺼리는 기색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준호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범신을 쳐다본다.

 

 

 “원래 이렇습니까?”

 “네가 무엇을 물어보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은 좀 특이하긴 하구나.”

 “역시 그렇,”

 “평소에는 굳이 사람을 내보내지도 않으신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이지. 다만 그래도 들키면 곤란한 곳이라, 사람을 가리기는 하신다만.”

 

 

 당혹스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 준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범신은 느긋한 표정으로 제 옷자락을 다듬기도 하고, 손목에 걸어두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청에서 들어온 신기한 문물이 집에 잔뜩이라 하던 세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닌지 제 소맷자락에서 세세한 눈금이 잔뜩 새겨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본 범신이 몸을 일으킨다. 가늠할 수 없던 어둠은 어느 새 꼬리를 끌며 감추고, 그 눈 안에는 무구한 순진이 들어차 있었다.

 

 

 “가자, 핏덩아. 이제 미사 시간이로구나.”

 

 

 그 순간과 그 시간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준호 자신도 몰랐다. 다만 그는 남녀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고, 신분 구별 없이 앉은 그 자리에 제가 알던 우주가 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가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것인지 뒤집힌 하늘을 걷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몽롱하게 걸음을 옮기는 준호를 알아챈 범신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다음 날부터는 굳이 제가 찾으러 가지 않아도 저가 찾으러 오겠거니, 하는 웃음이었다.

 

 

 

 “세례, 안 받을래요.”

 

 

 높지는 않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쩡하고, 공기를 연소시켰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문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준호와 범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범신은 문모에게 눈짓을 하고 곰방대로 준호의 어깨를 톡 치더니 먼저 문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준호의 앞에서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든다. 성격대로라면 곰방대로 어깨라도 힘껏 내리치려나, 어깨를 움츠렸던 준호는 아무리 기다려도 범신이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올린다.

 

 

 “힘이 드느냐.”

 

 

 나직한 한 마디였다. 동시에 제 발언을 이해하는 말이기도 했다. 울컥, 홍채가 아려와 준호는 고요하게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 날 이후 문모에게서 교리 공부를 받을 때마다 준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더랬다. 태어난 것이 죄라 한들, 그 어여쁘고 어린 제 동생은 어떠한 연유로 개에게 물려야 했는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이유로, 왜 그 착하디착한 아이가 연옥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지. -차라리 저를 죽일 것이지. 검고도 큰 개가 무서워 제 어린 동생이 짓이겨지는 것을 빤히 보고도 혼자 살겠노라 도망친 큰 죄인이 바로 여기, 제 코 앞에 당도했음에도.

 

 

 세상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셨다던 예수님. 그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흠숭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도 불쑥 불쑥 치받는 물음은 결국 준호를 세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한참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준호를 기다려주던 범신은 느릿하게 손을 들더니 그 커다란 손으로 준호의 목덜미를 다정히도 두드려주었다.

 

 

 “네 잘못도 아니고, 네 동생-, 지현이 잘못도 아니다.”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몰려오는 감정들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네가 미워 준호는 네 손을 걷어내지도 못하고 숨죽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딘 햇살을 담아 아롱지는 눈물이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뺨에 투명한 선으로 이울진다. 그리고 준호는 제 귓가를 침범하는 차가운 기운에 잠깐 움찔, 귓가를 매만지며 얌전히 범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민해도 괜찮다. 네게 세례를 강요하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야고보 신부님을 믿고 교리 공부는 더 해보는 것은 어떠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준호는 턱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내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차마 놓지 못한 소맷자락을 그저 손가락 새 얽은 채로, 그 눈에 맺힌 눈물과 모든 슬픔은 여직 지우지 못한 채로, 준호는 오래, 그 소맷자락과 그 소맷자락에 엉긴 동백선을 놓지 못했다.

 

 

 결국 준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낯이 창백해졌던 준호였다.

 

 

 “아저씨, , 꽃 좀 보여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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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모가 한숨을 내쉬며 마주친 선량한 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여실했다. 범신의 등 뒤에서 애꿎은 제 옷자락만 내려다보던 준호는 어젯밤 범신이 행한 일이 그리도 위험했던 행위였는지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대로 잠든 저에게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느낌이었지만 하기야, 생각해보니 젊은 여인의 몸이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움직인 것을 보면 저와 범신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었기는 한 듯 하다.

 

 

 “그리 되었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지금 이 분 몸에 계시다구요.”

 

 

 투명한 준호의 눈에 선의로 가득한 눈이 몰아친다. 문모는 맑은 눈으로 가는 준호의 손목을 끌어다 거기에 얽힌 장미 묵주를 느릿하게 바라본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구마 의식을 하는 수 외엔. 그리고 이 분도, 반드시 믿음을 가지셔야 할 터입니다.”

 “?!”

 

 

 갑작스러운 말에 한심하게 뒤집어진 목소리가 나왔지만 누구도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없었다. 범신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준호를 빤히 돌아본다.

 

 

 “들었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이어진 것은 형조의 망나니가 내지르는 긴 부정의 비명이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내 목숨이라도 바쳐 너를 구해주겠노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사이비 신자라고 밀고 당하는 것이 먼저겠습니다! 대관절 왜! 어제처럼 그, 단매라는 기생처럼 기마 의식인가 구마 의식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왜 믿어야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어제 실패한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더냐. 단매라는 기생에게 믿음이 없었고, 함께 그 의식에 있던 너 또한 믿음이 없으니 그리로 옮겨간 것 아니겠냔 말이다.”

 

 

 전략을 조금 바꾼다.

 

 

 “아가, 준호야. 너도 전략서를 읽어본 적 있지 않느냐. 네가 그 분을 믿지 않는 상태로 구마 의식을 한다는 것은 적진에 어떠한 무기나 갑옷도 없이 싸우러 간다는 말과 같다. , 혼자 적진 한가운데서 적장의 목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 그건, 그렇지만...”

 “또한 본디 이 것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학문의 일종이기도 하다. 신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셈 치고 시작해보는 건 어떠하냐.”

 “, 렇다고 한들, 저는 형조의 정랑이,”

 

 

 우물쭈물, 아까와 같은 기세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허리를 잡아챈다.

 

 

 “처음에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터.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내가 너를 저녁마다 찾아가마. 치헌이와 너의 집에도 내가 잘 말해둘 수 있다.”

 

 

 여기까지 몰아붙이자 차마 더는 거절할 수 없겠는지, 말을 안으로 삼켜가며 푹 수그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귓불이 엷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간 것은 승기를 잡았다는 기쁨에 도취된 범신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범신은 뻔질나게도 형조와 준호의 주변에 맴돌았다. 형조에서 만나지 못한 날에는 준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목덜미를 감싼 동정 깃을 들어 올려 주막이나 저 좋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기 일쑤라, 처음에는 기대하며 범신을 기다리던 준호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이거 의미가 있습니까?”

 

 

 또다시 이어진 납치 행각에 도저히 참지 못한 준호가 상을 내리쳤지만, 시끄러운 주변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흔한 듯 눈길만 한 번 흘끗 주고는 다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간다. 첫 만남, 두 사람이 동백 호수로 가는 길에 들렀던 바로 그 주막이었다.

 

 

 “너는, 의미가 없느냐?”

 “아니, , 저번에 들어보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야 한다는 것 같던데, 그냥 아저씨가 술 마시고 싶어서 나 꼬시는 거 같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보는 준호의 손목에 휘감긴 묵주는 저번과 비교하여 확연히 검은 장미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막걸리를 벌컥 벌컥 들이키며 그를 잠깐 훑어본 범신은 준호의 물음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저 목울대를 일렁인다. 잔에 남은 술을 모조리 마신 후에도 한 동안 입을 떼지 않던 범신은 참을성 있게 제 대답만 기다리는 준호를 향해 씩 미소를 짓는다.

 

 

 “, 이제 그럼 우리들의 하나뿐인 하느님을 믿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랍니까.”

 “네가 그러하니 이런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준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벌겋게 버무린 배추 겉절이를 크게 한 입에 털어 넣은 범신은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무작정 믿지도 않는 너를 앉히고 책이나 읽혀보았자 네 마음에 가닿기나 하겠느냐.”

 “그렇다고 이리도 무작정 술이나 퍼마시면 제가 그 학문을 퍽이나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리도 너에게 술을 사주며 잘 구슬리고 있지 않느냐. , 이 아저씨가 주는 잔이나 넘치게 받거라.”

 

 

 그때 보았던 기세나 다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능글맞게 말을 받아치며 준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툴툴거리면서도 술을 버리기는 아까운지, 홀짝 홀짝 마셔대며 불신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다.

 

 

 “너는 우리가 공부하려는 학문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 -갑자기 물어보시어도. , 그러니까 유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

 “그러하면 유교는 무엇이냐?”

 “춘추 전국 시절 공자님께서 주창하신 학문으로 인을 가장 근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이라는 것은-, 제 몸을 수양하고, 그를 통해 제 주변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범신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앉는다.

 

 

 “공자께서는 제자들이 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다고 했는데, 저는 그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인이 없으면 효도 없고, 애도 없고, 덕도 없지요. 결국, 인이라는 것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테두리-정도로. 그게 제가 납득한 이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것인지 이제는 범신이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허면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무엇이냐니요. 사람이, 사람이지요. 이 지상에 태어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사람이지요. 우스운 질문을 다 받습니다.”

 “너희 집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복길이도 사람이더냐.”

 “사람이지요.”

 “그럼 복길이가 따라가는 삶은 무엇이냐. 제 본디의 행복이냐, 주인인 너희의 행복이냐.”

 

 

 그제야 잔에서 눈을 떼어 범신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엄격한 눈길이 저를 사로잡는다.

 

 

 “집안에 갇히어 화초처럼 저를 찾아주는 이만 오매불망 기다리며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녀자들도 따르는 삶이 있더냐. 그에게도 인이라는 것을 베풀어주느냐. 애초에, 인이라는 것은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말문이 막힌 준호가 대답하지 못하자 범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설령 인이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왜 누구는 평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추구할 방법조차 주어지지 않았느냐. 다 제각각 행복이 다를진대, 누군가는 평생을 타인의 밑에서만 일해야 하느냐. 그뿐이랴, 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인 것인지.”

 

 

 범신 또한 술이 오른 것인지 준호에게랄 것도 없는 말을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동백선을 쥔 손가락에 힘이 올라 하얗게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준호가 말없이 술잔을 들이킨다.

 

 

 “-좋습니다. 가봅시다. ‘사람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그게 뭔지, 한 번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호기롭게 술잔을 내려놓은 준호가 말을 끝내자 범신이 얼핏 시선을 들어 맞춘다. 짙으면서도 광막한, 알 수 없는 어둠이 슬픔처럼 드리운 눈. 그 눈에 홀리듯 준호는 입술을 깨물고, 빽빽한 슬픔이 새벽처럼 밝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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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2. 14:17 끄적

[창작]꽃이 부서지다

오랜만의 손풀기용 :D*

 

 

 아침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이는 유월의 그림자 속에서도 짙은 장미 향기는 숨길 수 없었다. 선명한 그리움을 안은 붉은색이기도 하고, 도톰하게 고운 진분홍빛깔을 그러모은 듯한 장미는 말 그대로 눈이 부신 자태로 담벼락을 흉폭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이마 위로 사정없이 내려앉는 햇빛에 손을 가려 그늘을 만들고서는 잠깐 우두커니 멈추어 장미 울타리를 바라본다. 낯설게 옅은 갈색 홍채에 진한 장미 향기가 물결처럼 아로새겨졌다.

 

 

 언제였더라, 이토록 많은 장미를 보았던 것이. 열린 동공을 굽어 살피던 장미꽃잎은 머리 안쪽으로 밀려 피어나듯이 어린 기억을 자극했다. 이마에 얹히는 이 햇볕과 강렬한 향기,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장미 무리는 분명, 미지의 것은 아니었다.

 

 

 문득, 장미 꽃잎 하나가 바람도 없이 느릿하게 발치로 떨어진다.

 

 

 벌거벗은 발톱 끝에 부드럽고도 생생한 꽃잎이 와닿았을 때, 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지는 두근거림. 그러나 결코 긍정적인 느낌의 설렘은 아닌. 부엌 찬장에 숨겨져 있던 간식을 몰래 꺼내어 먹은 뒤 입맛 없던 저녁식사 자리, 혹은 우연히 지나치는 골목길 한 구석에 펼쳐진 도색 잡지를 훔쳐본 듯이, 기분 나쁘게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그런 두근거림이었다. 왜일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이토록 버려진 느낌이 드는 이유가.

 

 

 -율하야. 같이 가자!

 

 

 낯설지 않은 그 울림에 경악을 애써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낮아진 시선 안에 방글 방글 웃으며 뛰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술을 그제야 자각한다.

 

 

 -지민아.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해보이는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유난히도 홍채가 크고 까만 눈은 반짝거리는 흰자와 경계를 이루어 더더욱 맑은 눈빛을 타인에게 보내주곤 했다. 폭신해보이는 머리카락, 어린 아이에게서 나는 우유에 적신 쿠키 향기 같은 것들은 지민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느낌을 더해주었다. 물론 지민이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에는 그 사랑스러운 외모 덕분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을 거라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서 귀로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멀뚱히 선 나는, 지민과 가장 친한 존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가장 그녀를 빛내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구부러든 등에 어눌한 말투.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의 대부분을 가려 타인과 제대로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절친한 친구였다. 음험한 첫인상에 저절로 뒷걸음질 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햇살보다 환하게 웃어주는 지민에게 나는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지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 시커먼 감정들을 여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금세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사랑스러운 지민.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지민. 그랬기에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는 필연적인 환상이 덧씌워지기 마련이다. 타인이 꿈꿔왔던 사랑의 이상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었던 지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아주는 나에게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고.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나누었다. 나는 지민이 악을 쓰며 우는 것을 보았다. 이를 갈며 쌍욕을 하는 것도 보았다.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웃다가 침이 흐르는 것도, 전날밤부터 저녁을 먹지 않아 그다음날 점심에야 입가에 케첩과 소스를 묻히며 탐욕스레 정신없이 햄버거를 먹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지민이 나에게만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민은 나에게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잘라주기도 하였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해주었고, 말수가 적은 내 성향을 두고 사려 깊고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고 주변에 칭찬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지민만 나에게서 본 것들이었다. 나는 나조차 내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었는데 오직 지민만이 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서 나는 지민을 속였다. 지민은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있었다. 울고 웃고 화내는 인간인 주제에 감히 저는 그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듯 항상 사랑스럽고 완벽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 등에 기대어 훌쩍거리며 욕을 퍼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 그 완벽한 표정과 몸짓으로 멀어져가는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조차 모르는 내가 되게끔 타인들을 속이는 지민이니까, 나도 지민을 속일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걷다가 나를 향해 웃어주자, 나는 어두운 쾌감이 등골을 내달리는 흥분을 느꼈다.

 

 

 -선생님이 부르신 적 없다고 하시네.

 -어? 아까 부르시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들은 건가봐, 미안해.

 -아니야, 착각할 수도 있지 뭐. 다음 시간은 음악시간이지, 율하야?

 

 

 아무렇지도 않게 음악책을 챙기러 교실의 제 자리를 찾아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자 오싹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처음에는 그걸로 만족했다. 지민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속인다는 건, 내 스스로의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그 뒤부터는 더욱 쉬웠다. 사소한 거짓말과 미묘한 속임수에 지민은 쉽게도 넘어갔다. 교묘한 칭찬과 사실을 섞은 거짓은 진실보다도 쉽게 지민의 경계를 통과했다. 어느 반 남학생이 지민이 너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좀 모자라보인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던지, 선생님들끼리 얘기하는 걸 몰래 들었는데 이번 시험에서 지민 네가 생각 외로 성적을 잘 받지 못해 조금 실망하셨다던지의 이야기들. 그 남학생이 지민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지민의 성적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 입 속에서 튀어나온 은밀한 거짓들이 지민의 귀에서 만개할 때마다 지민은 조그만 주먹을 꼭 쥐며 분개한 듯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결론적으로 지민의 완벽함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완전하게 사랑스러운 소녀는 가끔씩 지나치는 남학생들을 쏘아보기도 했고, 도와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모르는 척 내 팔짱을 끼며 지나가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조금 무너져 더더욱 인간적이 된 사랑스러움은, 사실은 내가 인위적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그 사실에 기묘하고도 은밀한 쾌감을 느끼며 작은 진실을 섞은 거짓을 자랑스레 쌓아갔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공원이 있었다. 학교 가까이에 있었지만 한밤중의 공원은 놀라울 정도로 적막하면서도 동시에 밤의 기품으로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마련된 벤치에 걸터 앉아 불꺼진 교정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거기서 완벽한 소녀는 사라지고, 제 감정에 충실한 생기발랄한 소녀 두 명이 마음껏 떠들곤 했다. 공원에 흩어놓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모두 청아하게 몸을 뒤틀며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삼십분을 먼저 공원에 나와서 기다렸던 날, 그리고서는 그녀에게 왜 잘못 기억했느냐고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날 지민은 나에게 내 거짓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밤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하얀 종아리께에서 침묵이 부서졌다. 회오리치는 그 검은 정적을 응시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왜 속아줬어...?

 -그냥.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지민의 담담한 고백은 줄곧 그녀를 속였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심을 부서뜨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발언이었다. 어떠한 미움이나 증오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이하고도 또한 단정해,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지민을 미워한 적 없었다. 증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왜 나는 그녀를 속이고 싶었을까. 속여야만 했을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물음표들을 채반에 받치듯 잡아끌며 나는 애써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렇다면 지민은 왜 나에게 속아줬을까. 잠자코 내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다 알면서도 왜 나에게 속은 듯 불완전한 소녀가 되었을까.

 

 

나는 왜. 너는 왜. 우리는 왜.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배신자였고, 그럼으로써 믿음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결코 믿지 않으리라는 모순된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진심일 수 있었겠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온전히 서로를 향한 등뿐이었다. 그러나-, 그랬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등을 기댔던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언젠가 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므로, 몰락하는 꽃을 바라보기보다는 먼저 무너뜨리는 상냥함도 있기에.

 

 

 바람이 분다. 시계를 가득 채우던 장미가 물보라처럼 산산히 부서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꽃잎들은 으깨어지기 전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너도 나도 모를, 미지의 어느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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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침이 되었고, 뜬 눈과 기도로 밤을 지새운 범신은 벌건 두 눈으로 첫 닭이 울자마자 잠든 준호를 걸머지고 단매의 처소 문을 열어젖힌다. 하품을 참지 못하고 청소를 하던 머슴이, 놀란 토끼 눈으로 두 사람의 태를 번갈아 바라보자 저와 마찬가지로 아마 한숨도 자지 못했을 채련에게 전갈을 한다.

 

 

 “채련에게 전하거라. 단매는 괜찮을 것이다. 오늘 부로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새벽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이었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이 발자국마다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움직임에 업혀 있던 준호가 웅얼거리며 그 등에 깊이 고개를 파묻는다.

 

 

 “아저씨, -괜찮아요?”

 “그래, 너 괜찮다.”

 “아니요, 아저씨 말이에요. 밤새, 누가 손을 잡아줬어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범신의 귀를 수놓는다. 나른하고, 낮지만 동시에 무구한 목소리다. 범신의 등에 파묻혀 몽롱한 목소리로 이야기 타래를 풀어놓는다.

 

 

 “아저씨 맞죠? 지현이가, 그렇게 된 다음에는 혼자 잤거든요.”

 “다 컸구나.”

 “아니에요, 혼자 자는 거 무서웠어요. 근데요, 같이 자달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 치헌이한테라도 같이 자달라고 하지.”

 “안 돼요. 지현이는, 지현이는 혼자, 매일 혼자 자야 하잖아요.”

 “...”

 “지현이를 혼자 보내놓고, 오빠인 내가 어떻게, 그래요.”

 “그래, 우리 준호. 장하다.”

 “근데 사실 너무 무서웠어요. 매일 밤, 지현이를, 괴롭힌, 개가 나왔어요.”

 “준호야.”

 “도망치려고 해도, 꿈이니까, 항상 신발이 없어서 발이 너무 아팠어요. 도와달라는 목소리도 안 나왔어요.”

 “마음속으로라도 불러보지.”

 “매일 불렀어요. 누구든지 좋으니 와달라고.”

 “안 와줬어?”

 “. 근데요, 어젯밤에야 겨우 왔어요.”

 “...”

 “누가 우는 내 손을 잡고, 밤새도록 내내 괜찮다고 해줬어요. 10년 만에.”

 “최준호.”

 “그거, 아저씨 맞죠?”

 “...”

 “아저씨 맞는 거죠?”

 

 

 대답 없는 그 뒤로 고른 숨결이 새근새근 내려앉는다. 범신의 등에서 마치 생전 처음으로 단잠을 자게 된 사람처럼 단정하고도 편안한 숨을 내쉬는 준호에게 범신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허위허위 걸어가는 등 뒤로 천천히 태양이 떠오른다.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제 집에 도착한 범신은 다시 한 번 더 자명루에 사람을 보내야 했다. 제 동백문 접선을 깜박, 단매의 처소에 두고 온 탓이었다.

 

 

 

 “듣기에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너는 혼자가 아니다.”

 

 

 ‘또 무슨 헛소리랍니까.’하며 한심해하는 눈빛을 보낼 줄 알았지만, 제 눈으로 보았던 어제 광경이 잊히지 않았던 준호는 순순히 범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제 결국 준호가 들어오지 않았던지라 밤새 잠 한 숨 못 자고 준호를 기다리던 치헌에게는 자명루를 나서는 길에 이미 전갈을 주었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범신의 집도 아닌, 크지 않지만 안팎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초가집이었다.

 

 

 “어제, 구마를 하던 도중에 마귀가 가까이에 있던 네 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무래도 그 말만큼은 믿기지 않았던지 반문한 준호는 새삼스레 제 손등과 몸을 둘러본다. 굽혀지는 긴 손가락과 하얀 팔뚝.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감각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범신은 그 손목을 끌어 소매를 조금 걷어준다. 손목에는 문모에게서 받았던 붉은 장미 묵주가 겹겹이 감겨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검은 색 장미가 군데군데 섞여든 묵주였다.

 

 

 “이 묵주가 네 안에 있는 놈을 자제시키고 있는 듯 싶으나, 얼마만큼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 있다간 네가 그 놈에게 삼켜질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것이다.”

 “-그럼, 죽어요?”

 “악마에게 삼켜진 영혼은 천국에도 연옥에도 가지 못한다. -미안하다, 준호야.”

 “아저씨가 왜...?”

 “내가 네 이름을 부른 탓에, 들어가 버린 듯 하다.”

 

 

 준호가 지닌 눈빛을 차마 마주 하지 못하고 범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당황해 만류하는 준호를 무시하고 장을 끊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맹세한다.

 

 

 “내 너를 책임지고 반드시 그 마귀에게서 되찾아 내겠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찾아내마. 그러니,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겠느냐.”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은 무저갱. 빛을 품을 수 없는 어둠 속에 담긴 것은 의지와 단호함뿐이었다. 말 그대로, 제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이루어내겠다는 결연한 세계. 한 점 반문도 허락지 않는 그 기세에 준호는 결국 그 날 오후 범신과 함께 문모에게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베드로 형제님. 어쩌자고 그리 무모한 일을 행하셨단 말입니까. 자칫 베드로 형제님의 목숨까지도 위험했습니다. 아니, 이미 뒤엣분에게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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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닥치거라.”

 

 

 두터운 눈썹이 움틀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단매의 입술이 쉼 없이 여닫힌다.

 

 

 “사랑한다던 네 놈 입은 거짓만 핥아먹는 입으로구나. 그 혀에서 나는 썩은 내에 내 코가 비뚤어지겠다.”

 

 

 긴 지팡이를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모한다더니, 경애한다더니, 그 말들은 모두 겉멋만 치장한 거짓이었구나, 영감쟁이. 그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네 그 알량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느냐. 사랑하던 여인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이름을 부르짖을 때, 너는 어디에 가있었느냔 말이다.”

 

 

 일순 수줍게 미소 짓는다.

 

 

 “-감사해요. 그대를 사모하겠노라는 그 말,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붉게 핏줄이 드러난 손이 가녀리게 허공을 휘젓는다. 침상의 네 귀퉁이에 묶인 채로 하늘하늘, 손가락을 움직이다 말고 발작적인 웃음이 터진다.

 

 

 “사람 잡아먹은 네놈들이 도대체 나와 무엇이 다르냔 말이냐. 어떤 자격으로 나를 쫓아내겠노라 하느냐. 입이 있다면 말을 해보거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사람 잡아 먹은 귀신 놈들아!”

 “할 말 없다, 마귀.”

 

 

 놀랍게도 평온한 얼굴로, 긴 봉을 단매의 목으로 들이댄다. 봉의 끝에는 반원형의 둥근 테가 붙어 있어 그 둥근 테 안으로 단매의 목이 꼼짝없이 갇힌다.

 

 

 “나는 죄를 지은 몸이고, 너와 다르지 않은 짐승보다 못한 놈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나직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에 걸쳐 죄를 이고 나갈 것이다. 내가 따르는 분께서는 인류의 죄를 온몸에 걸머지고 가셨는데, 나는 겨우 내 죄만을 지고 살아 갈 테니 누구에겐들 무어라 원망할 말이 남아 있겠느냐.”

 

 

 단매의 이가 무섭게 맞부딪친다. 말이 빨라지며 이국의 언어들이 튀어나온다.

 

 

 “诅咒你,又老又健的伪君子.(너를 저주한다, 늙고 건방진 위선자). Sterben Sie jeden Tag.(하루라도 빨리 뒈져버려라). 世界のどこにも歓迎されるところはない.(세상 어디에도 네가 환영받을 곳은 없다.)”

 “알고 있다.”

 

 

 짧게 말하더니 강하게 봉을 짓누른다. 그 기세에 괴로운 듯 몸부림치며 짧은 숨만을 다급히 내쉬지만 입술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굳이 강한 자를 노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위선자.”

 

 

 급작스럽도록 고요해진다. 썩은 숨결마저 사라진 착각에 빠졌지만, 범신은 반쯤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아까 단매를 제압하던 묵주가 준호의 것임을, 그리하여 준호에게는 어떠한 신성한 도구도 없음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준호는 고개를 떨구어, 숨을 가다듬을 때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어깨만이 범신의 눈에 들어찬다.

 

 

 “, 준호.”

 

 

 평소 준호의 목소리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가 그 어깨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범신은 아차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은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짧은 증거였다. 그리하여 일부러 저와 준호의 이름을 단매 앞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보이는 단정한 턱선과 살짝 구부러진 듯한 콧날은 그대로인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끌어올려지는 입술에 결국 범신은 숨기지 못한 장탄을 토해낸다.

 

 

 “여리디 여린 놈이로구나. 여직 그 여동생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눈이 마주쳤다. 일순, 바닥없는 새까만 눈에 심장이 떨어졌다. 준호야. 차마 혀끝으로 올리지 못한 이름을 되뇌며 움켜쥔 손목에 장미 묵주를 감아주었다. 손목에 묵주가 감기자마자 발작적으로 몸이 떨리다 말고 사그라지지 못한 악의를 토해낸다.

 

 

 “그래보았자. 믿음도, 자신도 없는 놈이다. 어디 마음껏 발버둥치거라. 그러나 이놈은-, 내 것이다.”

 

 

 미소가 활짝 벙그러진다. 눈물에 젖어 초승달보다 곱게 휘어진 두 눈에 붉은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만개한 모란보다 아름답다. 이성을 초월하는 감각에 아득함을 느끼면서 범신은 준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묵주를 감은 두 손을 쥐고서 기도를 시작한다. 찰나의 미소가 뇌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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