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0. 19:31 2차 끄적/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검은 사제들/범신준호]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8
친구들과 논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자주 가던 주막에서 국밥에 막걸리 너 댓 병이 그만인 준호였다. 옆에 기생을 낀 채 호화로운 안주가 나오는 곳은 처음인지라 습관처럼 소매 안에 넣어둔 붉은 장미 묵주를 매만진다. 간만에 회식자리를 가진 탓에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저들끼리 얘기하는 선배 사이에는 끼지 못하고 연신 굳은 미소만 짓던 준호는 분내와 사향내를 풍기며 제게 교태를 부리는 기생에게서 짐짓 어색하게 팔을 빼며 곱게 화장한 여인들의 낯을 살폈다. 1년에 두 어 번 있는 형조의 회식 자리가 ‘단매’라는 기생이 있다는 자명루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던 만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단매를 찾을 숫기가 있을 리 없는 준호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제 소맷부리 속 묵주만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이를 민감하게 알아챈 기생 중 하나가 살며시 준호의 팔짱을 끼며 생글 생글 눈치를 본다.
“어머, 잘-생기신 선비님이셔. 제가 오늘 함께 자리해도 괜찮겠사옵니까?”
“아, 아니, 그, 저-.”
“허허, 역시 젊은이는 다를세. 벌써 아가씨 하나가 달겨들었구만. 잘생기고 볼 일이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육조에서 제일 예쁜 사내 아닌가.”
장난처럼 이어지는 좌랑들과 참의의 말에 준호는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수그린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기생은 형조의 어른들에게 눈웃음을 쳤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새빨개지는 준호의 귓불에 여인은 생긋 웃으면서 콧소리 섞인 목소리를 낸다.
“어머, 선비님. 부끄러움이 많으시다~ 괜찮사옵니다. 주령이라 하옵니다. 편히 놀다 가소서.”
싱글 싱글 웃는 낯이 애교스럽다. 주령에게 끌려가다시피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주령의 젓가락으로 옮겨지는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권하는 대로 마시면서 술이 조금 올라 용기가 났는지 준호는 슬쩍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본다.
“음, 어, 주령. 그, 혹시 단매, 라는 기생을 아는지?”
썩 좋은 대화 주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매라는 말에 순간적이지만 단박에 주령의 눈썹이 위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기생인만큼 금세 익숙하게 표정을 풀면서 빈 술잔에 술을 채운다. 맑은 술이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준호는 제 손가락에 얽은 묵주를 그제야 깨닫는다.
“아이 참, 선비님도,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이야기 꺼내는 것이 아닌데. 이 주령, 속상하옵니다.”
“아, 아니, 그. 저기, 그게 아니라 형조에, 사건 서간이 와 있길래.”
허둥지둥 말을 고치다 별 수 없이 채워진 잔을 비운다. 오히려 그것이 정답이었던지 아까보다 조금은 다정하고 심술궂어진 표정으로 주령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아, 그 항아 팔을 부러뜨린 것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하긴, 저희도 보면서도 어이가 없었사옵니다. 아니 무슨, 제 두 배나 되는 계집 팔을 단박에 부러뜨리다니요. 항아 고것도 높으신 분들이 이뻐한다 기고만장이어서 솔직히 속은 시원했지만요, 아무리 봐도 요새 단매 고년이 이상하다니까요.”
훨씬 더 편해진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빈 술잔과 접시에 음식을 담아내며 종알 종알 말을 이어나간다.
“사실 단매 고게 썩 이쁜 얼굴은 아니거든요. 삐쩍 말라가지구, 말수도 없구요. 꼭 자기처럼 말 없는 분들께서 좀 찾나 싶더니 두 달 전쯤부턴가? 갑자기 저희 단골손님들 자리에 상도도 없이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 새 고것한테 홀랑 빠져 버리셨다더라구요. 속상해 죽겠어요! 거기다 힘은 어찌나 센 지, 우리끼리 조금 제 흉을 봤다고 이렇게 손톱을 세우지 뭐예요? 아무리 분으로 찍어도 가려지지가 않아서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맷부리로 거짓 눈물을 찍어내는 척 하면서 슬쩍 제 손등을 내민다. 과연 제 말마따나 하얗게 분칠한 그 손등 위에는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흉터가 푹 패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작지 않은 상처에 의혹은 더해만 갔다. 단기간에 성격이 확 바뀌었다던가, 갑자기 힘이 세졌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변화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약초의 오남용과 관련된 듯한 느낌에 준호는 이 일만큼은 반드시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곱씹어본다.
어젯밤 일을 되새김질하다가 결국 목덜미를 북북 긁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얀 목덜미에 붉은 손톱자국이 장미 덩굴처럼 피어났다가 조금씩 삭아간다. 머리통을 싸매 쥔 채 괴로워하는 준호를 보던 무심은 책상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간을 쌓아 올리면서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요거 오늘 안에 안 하시면 이번에야말로 참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겝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다 말고 제 앞에 쌓인 서간 더미에 결국 울상이 되어버린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숙취는 머리를 울리지, 오늘 안에 정리해야 하는 사건 서간은 저렇게나 밀려있다. 거기다 어제 회식의 여파인지 늦는 사람들이 많아 그렇지 않아도 형조참의는 그야말로 심기불편 그 자체였다. 부지런히 서간을 나르며 어지러운 형조 안을 정리하던 무심조차 무거운 공기에 조심스럽게 혀를 차고는 몸을 사린다.
“거 아직 덜 됐는감?”
“아, 예. 아닙니다, 영감님. 하, 하고 있습니다. 하하, 영, 사건이 많은 지라.”
“에잉. 그거 하나 빨리 빨리 못하남? 그리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서간이 술술 쓰이기라도 하는지!”
짜증서린 상사의 말에 준호는 허둥지둥 정신 줄을 잡고 작업에 골몰한다. 아직 신출내기에 불과한 준호에게 어차피 단매와 관련 있는 사건을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어려워보였으므로, 먼저 제게 주어진 일과부터 해결한 뒤 찬찬히 확인해보자고 마음속으로 결론을 낸 참이기도 했다.
“아가, 너, 뭐에 신경을 쓰고 있더냐?”
평소라면 참판 어른이 일어나자마자 집이나 주막으로 줄행랑을 쳐버렸을 준호였지만 아까 마음먹은 대로 조금이나마 그 사건을 더 알아보려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접선으로 준호의 보드라운 뺨을 톡톡 친 범신은 준호가 펼쳐놓은 두루마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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