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런 느낌은 깡그리 무시하는 준호는 최근 한성에서 일어나 간단한 치정 싸움으로 판결난 서간을 다시 검토하느라 그 고운 눈매가 찌푸려져 있었다.




 “오셨는가.”

 “뭔 일로 불렀다요?”




 간단한 치정 싸움이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에는 나름 한양에서 잦은 소문을 만들어 냈다던 사건이었다. 지금에야 피해자였던 여성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서로 간 합의로 무마했다고는 하나 어쩐지 찝찝함이 느껴졌던 터라 부른 다모였다. 자주 만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래 말버릇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형조의 망나니라고 익히 들은 탓인지, 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다모 남순이 소맷자락을 끌어내리며 눈매를 치떴다.




 “아니, 이 사건 말이야. 둘이서 잘 해결했다고는 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 그 사건요?”




 심드렁하게 준호의 말을 받아 넘기나 싶더니 서간을 확인하고 알겠다는 양 갑자기 생기를 띤다.




 “그게 긍께 신기하다 요 말이요. 아니 우째 여자 힘이 그만치 세단 말잉가? 한 손으로 팔이 뿌러졌다고 하니, 내 참말로 내 눈으로 보고도 신기허다, 이랬제!”




 사실 별 다른 일이 아닌 것도 맞았다. 애초에 가해자와 피해자 여성 둘 다 천민 신분이었고, 흔히 있을 수 있는 치정 싸움이었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해자 여성이 피해자 여성의 팔뚝을 한 손으로 부러뜨려버렸다는, 여성의 힘으로는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뿐. 피해자의 팔을 직접 확인했던 남순도 준호가 그 사건에 흥미를 가진 것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기억 속 피해자와 가해자 여성의 대화까지 설명하는 것이다.




 “하여튼간에 사내놈들 거시기가 문제여. 둘이 죽고 못 사는 줄 알았재비, 따른 기생년이 또 있는 줄 알았것어? 사랑한다, 기적에서 빼내준다 어쩐다 하던 마당에 딴 기생년헌티두 똑~같이 한다는 말에 확 눈이 허옇게 돌아뿐 기집이 쪼르르 쫓아간게제.”




 둘 사이에 언쟁이 오간다 싶더니 먼저 그 남자를 만났다던 여자, 단매라는 기생이 소리를 팩 지르더니 다른 기생의 팔뚝을 꾹 부여잡았다는 것이다. 그에 붙잡힌 여자가 죽는 소리를 내 확인해보았더니 이상한 각도로 꺾인 팔뚝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한다. 한 손으로 팔뚝을 부러뜨렸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두 기생 간의 체격 차이도 꽤나 컸다고 한다. 둥근 얼굴과 부드러워 보이는 몸태 덕에 항아라 기명을 정한 피해자 여성의 몸집이 단매의 두 배라고 했으니, 보던 사람들 입이 떡 벌어질 만도 했다.




 “, 다행시럽게 기방 행수들끼리 말도 잘 오갔고, 그 남자도 더 이상 안 보인다고 하니 문제야 어찌저찌 해결 됐기는 한데 신기헌 일은 맞지비.”




 사건을 맡아 여성들의 증언까지 확보한 다모에게서 직접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이번 사건은 그 정도에서 해결된 것이 맞다고 보아야 했다. 준호는 여성의 힘으로 그럴 수가 있나, 몇 번 곱씹어보다가 천천히 서간을 정리하고 가는 숨을 뱉었다.




 “근디 이상헌 것은 맞긴 맞는 게, 고 단매라는 기집이 요새 부쩍 그런 일에 연관된단 말여.”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원체 얌전시런 기집이었다던디, 요사이 고 기집이랑 얽힌 놈들이 몇 놈 돼. 아 뭐 노류장화 한 놈이 꺾든 열 놈이 꺾든 벨 일 아니라 허지만, 갑자기 지명도가 높아졌다 그러대? 그래서 기생들 사이에서 좀 말이 도는 가베.”

 “...”

 “아아니, . 뭐 낯쩍 반반허면 그렇게 되는 게 맞기는 헌디, 고 기집이 또 앙칼져 싸나워부러. 수군대는 걸 못 견딘다대? 몇 기집이 고 기집 손톱 맛을 봤다허던디, 또 그 상처가 고렇코롬 깊다 드라고. 얄쌍허니 생겨가지구 힘이 보통이 아니대.”




 서간을 정리하던 준호의 손이 멈칫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순은 제 허리춤에 찬 칼을 톡톡 치더니 몸을 쭉 뻗어 일으켜 장난스런 미소를 입가에 씨익 떠올렸다.




 “형조 망, 아니 형조정랑, 께서는 부~디 고런 얄쌍헌 기집헌티 샅 물리는 일 없이 조심허쇼잉. 그러라 내 말 더한 것이니께.”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발로 문간을 뻥 차고 시원스런 몸짓으로 형조를 빠져나간다. 그런 뒷모습에 정신이 팔릴 겨를도 없이 준호는 서간을 쥔 채 생각에 잠긴다.




 가는 여성의 손으로 제 몸집의 두 배가 되는 여성의 팔을 부러뜨린다? 그것으로도 꽤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지만 갑자기 지명도가 높아진 점, 갑자기 바뀐 성격까지 한 번 눈길이 가자 신경 쓰이는 부분이 턱 없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습관처럼 제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던 준호는 조용히 읊조리듯 한 글자를 말했다.




 “-약초?”

---

시대물 쓰는 건 재미있지만 경국대전을 모조리 섭렵하지 못한 바, 오류가 많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D

조선에서 모티브를 따온 건 맞지만 얼기설기 꿰어맞춘 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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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4. 30. 19:58

[한달] 나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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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시간은 깊어가는 삼경.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까만 어둠을 한 줄기 촛불로 찢어발기기에는 역부족이구나, 준호는 가만가만 단정한 입술을 다물며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온기를 품은 봄바람이 새겨진 어둠은 벌써 준호의 긴 속눈썹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자네 첫사랑이 쓴 연서라도 들어있을지 모르겠구먼.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어둠 속에서 준호는 무의식중으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잊은 줄 알았던 상처가 따끔거리며 아가리를 벌려 어둠을 삼켰다. 감지 못한 눈꺼풀 너머 어둠은 긴 머리채를 빗겨 내리다가 물그림자 위에 엉겨오는 동백처럼 준호의 목덜미를 조르듯 내려앉았다.




 -오빠! 살려줘, 오빠, 오빠!




 열 살. 겨우 그 나이였다. 제가 서당에 다녀오면 산들바람처럼 제게로 와 오늘은 무엇을 배웠냐며 재잘거리던 아이였다. 오빠에게 주려고 만들었다며, 서툰 솜씨로 수를 놓아 손수건을 수줍게 건네주던 아이였다. 나는 매일처럼 네 빨간 댕기를 당겨 뺏으며 놀렸지만,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풀꽃 냄새가 나는 듯도 한 그 빨간 댕기가, 내 어여쁜 누이를 예뻐하는 내 마음처럼 고운 것 같아 좋아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네 뒤에 숨어 너를 놀래키다가, 오늘은 서당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훈장님께 혼났다는 말을 하면 너는 한참을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흘려보냈지.




 말을 할 것을.




 새파랗게 눈이 시려 뜨거운 것이 관자놀이를 적셨다. 지연아. 10년 전 이래로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못했던 이름이 제 목덜미를 틀어쥐는 어둠 속으로 지독하게 스며들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를 죽여주련? 부모님께는 단 한 번도 말해보지 못했던 소망이 허무하게 제 후두 안으로 삭아드는 것을 느끼며 준호는 제 발꿈치 께가 뜨끈하게 아려오는 것을 생각했다. 그 때 벗겨진 갓신이 무슨 색이었더라. 아마도 제 눈을 가린 어둠처럼 핏기 어린 암홍색이었겠거니, 조용히 오열하듯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호조의 망나니가 오늘은 무슨 일로 낯 색이 어두우십니까?”

 “-아닙니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




 장난스럽게 농을 건네는 좌랑의 말에 느릿하게 대답하고 제 자리로 향하였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찡그리며 거칠게 서간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한테 망나니라고?”

 “어이쿠, 깜짝이야! ...아니, 정랑께서 형조의 망나니라는 건 육조 사람들 다 아는 말 아닙니까. 뭘 새삼스레.”




 청소나 잔심부름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무심이 형조 내에서 오늘 보아야 할 서간을 들고 오다 말고 큰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나이도 저와 비슷하고 마음 씀씀이도 무던하여 평소 편하게 농을 주고받는 무심이 그렇게 말하자 준호는 그린 듯 우아한 눈을 들어 무심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는 거지?”

 “, 아침에 늦게 오시는 것이야 예사에다 점심만 되면 졸지 않으심까. 잠깐 들리셨던 호조 참의 어른 앞에서 잠꼬대를 할 때에는 쇤네가 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슴다.”

 “, 밤에 잠을 못 자게 만드는 것이 누군데 그래. 아버지가 매일 밤 내리는 벌이 뭔지 무심 네가 알면 까무라칠 테다.”




 어제의 일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치헌이 주는 벌은 대개가 사서삼경 중 하나를 정해 구절을 베껴 쓰는 것이었다. 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쩔 때에는 그 내용을 토대로 시조와 글을 써내라 하니, 이거야말로 머리에 쥐가 저릿저릿하게 나도록 만드는 주범이었다. 형조에서 시원찮은 자신의 모습을 제 나름 변명하는 준호가 불퉁하게 볼을 내밀며 불평을 늘어놓자 무심은 두터운 손으로 그 곁에 물 잔을 내려놓으며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거기다 예리하다 못해 예민하기까지 하시니, 망나니보다야 형조의 애기씨가 더 어울리시겠습니다.”

 “아서라. 지금 누구 앞길 막으려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것보다, 어제 보던 사건은 어떻게 됐어?”

 “-그러네요. 이 성격에는 확실히 애기씨보다야 망나니가 더 어울리지요. 아무튼 자료는 여기.”

 “고맙네.”




 감히 노비가 전랑인 참의의 아들을 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워낙에 형조의 일이 바빴고, 또 막상 농을 받는 본인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어영부영 지나가는 말들이었다. 거기다-.




 “이 부분이 이상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아이고, 형조 망나니가 또 시작이시네.”

 “시끄럽고, 사건을 고한 사람과 만나 볼 테니 준비 좀 해다오.”




 태생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감각이 그렇게 이끄는 것인지 준호는 일을 이렇다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바쁘다며, 혹은 이상 없다고 그저 넘어가는 송사나 사건 하나조차 꼬박 제가 보고서와 피의자를 확인하는 것이다. 제게 넘어온 사건 중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는 기어이 사건 현장까지 가고, 현장을 검증한 다모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야 비로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곤 했다.




 시간 감각이라던가 신분의 상하는 안중에도 없어하는 둔감함과, 일에 관해서만큼은 결벽이라도 일컬어질 만큼 민감하게 파악해내는 그 성향이 동시에 존재하는 덕분인지 준호는 단숨에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단어에는 분명 준호를 친근하게 여기는 느낌도 풍겼으나 그와는 별개로 법을 토대로 죄를 처벌하는 형조 특유의 고지식한 분위기를 깡그리 무시한다는 경멸의 뉘앙스도 은근히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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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이놈, 이리 와 앉거라.”



 귓가에 찡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낮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준호는 하얀 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목덜미를 움찔거리면서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풀이 죽어 고개를 조아리는 준호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호조의 참의답게 엄준하게 문책하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꽃구경을 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사실이더냐.”

 “아버님, 그것이 아니오라.”

 “그렇다면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아니, ...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닌지라.”

 “어허.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할까! 네가 나라의 녹을 먹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 벌써 콧바람이 들어 살랑거리느냐.”



 준호의 아버지인 치헌은 나라의 호구 조사나 기타 경제에 관련한 일을 맡고 있는 호조에 있지만 최근 형조의 낭관으로 임명 받은 제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아는 바였다.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임관을 한 것으로 보아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워낙에 유들거리는 성격에다 사내치고 예민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이미 형조 내에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준호에게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어준 지 오래라 하였다.



 “어디 한 번 변명이나 들어보자꾸나. 성균관 동기들과 꽃구경을 갔다거나 하면 오늘 내 너를 집에서 당장 내쫓을 줄 알거라.”

 “...그것이 아니오라, 아버님을 아신다던 분과 잠깐 대화를.”

 “누구를 말하는 것이더냐.”

 “, 범자 신자를 쓰시는 분께서 아버지를 아신다며, 형조에 가려던 저를 다짜고짜 끌고 가시지 뭡니까.”



 원래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제 관서인 형조로 바꾸며 준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치헌의 눈치를 보았다. 치헌은 준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가만 되씹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범신? 김범신이라 했단 말이냐?”

 “. 아버지랑 잘 아시는 분이라 말씀하시기에, 저 또한 당연히 그러한 줄 알고.”

 “그래, 네가 범신과 만났다는 말이지.”

 “아시는 분이 맞으십니까?”

 “내 그 사람을 모를 리가 있나. 허허, 그래, 범신이 준호 너를 알아보더라는 말이냐?”

 “, 알아보았다기보다는 이름을 말씀하니 -네가 그, 최치헌의 첫째구나, 하시고.”



 그가 저를 일컫던 형조의 망나니라는 말은 쏙 빼두고 준호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치헌은 준호가 범신을 만난 것이 마음에 드는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기분이 풀린 것을 깨달은 준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치헌이 얘기한 바에 의하면, 범신은 호조참판을 지냈던 김인회의 둘째 아들로 약관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능력을 인정받아 제 아버지가 참의로 있는 호조에서도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워낙에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인해 왕에게 잘잘못을 고하는 사간원에서도 은근하게 청을 받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호조도 사간원도 아닌, 아예 엉뚱한 춘추관 쪽으로 관직에 오르겠다고 말해 김인회가 골치를 썩혔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서양의 문물에도 관심이 많아 걸핏하면 새로운 물건을 사서 집안을 어지럽히기 일쑤였고 당시에는 연행사에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여 몇 번이나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현재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는 저로써도 발치에 닿을 수도 없는 범신의 기행에 준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치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그런 분과 알게 되셨습니까?”



 그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당시 호조에 있던 치헌은 범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김인회의 넋두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인회가 치헌에게 지시를 내리는 도중,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그야말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묵묵히 제 일을 잘해내는, 그야말로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듯한 치헌을 보며 내 아들이 너의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농담이나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 호조의 관끼리 따로 저녁을 먹는 날에는 저건 내 아들이 아니라 원수라며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인회가 몇 번이나 치헌에게 호소에 호소를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호조에 들어서는 범신을 보자마자 치헌은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서간을 떨어뜨리면서 호조참판의 원수라고 중얼거렸고, 이를 들은 범신이 저놈의 샌님 자식이라며 달려드는 걸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의 웃긴 작전이었던지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서로에게 호감을 샀다고.



 물론 지금도 가끔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기는 하나, 호조참의에 오른 치헌과 춘추관에서도 동지사에 오른 범신 둘 다 일이 너무나 바빠 제대로 얼굴 보는 날도 희미해진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치헌은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제게 망나니라는 말씀을 하실 게 안 된다는 이야기네요.”



 어딘지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가던 치헌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린 준호에게 엄한 표정으로 맹자에서 우정에 관한 내용을 찾아 모조리 베껴 적으라는 벌을 내리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 치헌에게 검사받기 전까지는 꽃구경은커녕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에 준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물가물한 눈으로는 촛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이라.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깨어 있으려니 영 몸이 쑤시고 눈이 피로했다. 아버지도 설마, 그냥 하신 말이겠거니 제 멋대로 생각한 준호는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위에 잠깐 내려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

아ㅏ아ㅏ아니 쓸 때에만 해도 분명히 이렇게 길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엔딩은 정해져 있습니다

5편이나 6편 이내로 끝마쳤으면 좋겠네요 흑ㄱ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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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3. 25. 01:35 일상

커미션 안내

:D 커미션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글 위주의 창작을 하기 때문에 글 커미션입니다.


*아래 주의 사항을 읽지 않아 생기는 불이익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모든 커미션 글의 저작권은 하바네라 habanera 에게 있습니다



1. 작업과정


메일 및 guest란, DM을 통해 조율 - 입금 확인 - 모티프 컨펌 및 작업 시작 - 완료


2. 주의 사항


 ♡♡


-슬롯이 비게 되면 커미션을 받습니다

-1차, 2차 HL, BL, GL, 논커플링 모두 받습니다만 2차의 경우 제가 몰라 캐릭터 붕괴가 있을 것 같은 작품, 혹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작품은 받지 않으니 문의 부탁드립니다.

-장르별 지뢰가 있어 그 부분은 의뢰를 받지 않으니 커플링의 경우 반드시 문의 부탁드립니다.

-2,000자 기준 대체로 1일에서 최대 3일까지 소요가 됩니다. 

-커미션 요청을 주실 경우 100자 정도의 간단한 모티프 작성에 들어가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모티프가 통과되었을 경우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갑니다. 모티프 컨펌은 최대 2번까지 가능합니다.

-이미지나 원하시는 상황을 알려주시면 좀 더 디테일한 작업이 가능합니다.

-작업의 진행량에 따라 환불액이 변동됩니다. 30% 이상 진행하였을 때에는 50% 환불, 50%이상 진행되었을 때에는 환불이 불가능하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모든 커미션 글에 대한 저작권은 저에게 있으니 2차 배포, 임의 수정, 상업적 도용으로는 사용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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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9세의 경우 1,000자 당 3,000(공미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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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배경

*범신준호(?)


 숨결이 고왔다. 나직하게 제가 왔노라 고하는 봄날은 뱉어내는 숨마저 향그러워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담장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담장 너머 야트막하게 흐트러지는 개나리가 눈이 부시도록 고왔다. 어저께 제가 들렸던 기생 선월이의 저고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선명한 노랑에 저도 모르게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어. 봄이 와 네가 핀 것인지, 네가 피어 봄이 온 것인지 모르겠구나."



 가지를 조심스레 들어보이곤 시라도 읊듯 개나리를 칭찬하는 느릿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선이 두텁고 사내다운 기백이 뚜렷한 외모로 얼기설기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는 손짓이 자못 위엄이 있었다. 입고 있는 도포의 아련한 구름 무늬, 갓끈에 매어놓은 화려한 비취와 호박에다, 길가에 핀 개나리를 칭찬하는 말마저 싯구를 연상시키게 하는 그는 과연 풍류가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흘끗 흘끗 자신을 훔쳐보는 여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처녀 아이의 치맛저고리를 연상시키는 개나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나리 가지를 함부로 따지 않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린 것은 사내 본인도, 사내를 훔쳐보던 여자들도 아닌, 이제 갓 약관을 넘긴 것처럼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었다.



 "댁께서는 아주 풍취가 좋으십니다?"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에게 들으니 썩 기분이 좋은 칭찬은 아니구먼."



 자연스럽게 들었던 개나리를 내려놓으며 사내는 어렴풋하게 새겨놓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제게 말을 건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매 폭이 넓은 짙은 남색의 도포 위에는 비취와 옥을 달아놓은 붉은 세조대가 우아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와 맞추기라도 한 듯 남색 바탕에 하얀 당초 무늬가 들어간 갓신까지, 누가 보아도 멋스럽게 차려입은 청년은 기실 차림새보다 생김새가 훨씬 인상이 깊었다. 날카롭게 허공을 눅히는 콧날과 어울리게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 한쪽 눈의 깊은 쌍꺼풀, 단정한 외모와 자태가 한층 더 돋보이는 청년은 사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사내를 따라 개나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 집 안쪽이 저와 관련이 있는 집이라, 그 개나리를 칭찬하는 말에 무심코 말을 걸었습니다."

 "-개나리가 워낙 이 색깔이 명랑하고 현저하여 나도 모르게."



 그러나 이미 시선은 개나리에 가있지 않다. 개나리를 바라보는 청년의 옆모습을 깊이감 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버릇처럼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웃음 서린 눈으로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우이. 내, 김범신이라 하네."

 "...저는, 최준호라고 합니다."

 "최준호? 혹시 자네가 최치헌네 첫째 아들, 형조의-"

 "저를 아십니까?"

 "...망나니 아닌가."



 내키지 않은 듯 손을 내민 범신과 악수를 한 준호는 아버지의 성함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깜짝 놀란 듯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곧 뒤이어지는 말에 소태를 씹은 듯 비틀리기는 했으나. 범신은 준호가 반응하는 모양새가 흥미로운지 짙은 눈으로 껄껄 웃으며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자네 춘부장 이야기라도 좀 들려주게."

 "아니, 제 부친과 아시는 사이시면..."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앞장서는 범신의 걸음에 맞추어 준호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저 집이 어떤 집인 줄 알고 그 담장 위에 핀 개나리가 무어라고, 칭찬하는 것이 얄미워 잠깐 농지거리를 건 것이 이리 큰 일이 될 줄이야. 제 앞에서 펄럭거리는 옥색의 도포 자락을 보며 준호는 새삼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신시(申時:오후 3시-5시)까지 이조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이리 된다면 아버지 몰래 도망나온 보람이 없어진다. 어찌 해야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배탈이라도 났다며 뒹굴까, 별 생각을 다 하며 앞서 가는 이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급작스럽게도 우뚝, 윤기 나는 말총으로 만든 갓이 멈춰선다.



 "좋은 곳이 예입니까?"

 "아, 아직 도착은 안 했네만 여기서 술 좀 사려 하네. 여기 탁주가 맛이 그만이거든."

 "저 술은 못 합니다."

 "예끼. 내가 자네 춘부장한테 다 얘길 들었는데."



 깨끗하게 동백 기름으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저와는 달리 봉두난발을 한 농민들이 땀냄새 들큰하게 풍기는 주막에서 탁주 두 병을 산 범신은 숫제 준호에게 술병을 다 맡기고 저는 한들한들, 유랑이라도 하는 듯 느긋한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갓끈과 세조대 끝에 매달린 비취와 홍옥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다 도착했네."



 자연스러운 손길로 준호가 옮긴 탁주 한 병을 다시 가져가며 먼저 시원스레 입을 축였다. 아무리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고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불만 어린 눈으로 범신을 빤히 바라보던 준호도 남은 한 병에 입을 대면서 낮은 감탄을 흘렸다.



 연못 가장자리가 몹시도 붉어 제가 잘못 보았나 눈을 두 어 번 깜박였지만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직 서늘한 산 그늘 아래 넓게 퍼진 호수 위에 붉은 꽃송이가 단정하게도 가라앉고 있었다. 엷게 퍼지는 찻향 같기도 한 동백 향기에 가느름하게 눈을 뜨고 있으려니 문득 범신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 붉은 동백은 처음 봅니다. 절경이로군요."

 "어떤가. 그 집 개나리보다는 낫나?"

 "...이제 개나리 이야기는 그만하십시오."



 한 번 더 병에 입술을 대며 퉁명스레 말을 뱉았다. 하지만 범신은 오히려 그런 준호의 모습이 더 흥미를 돋우는지 피식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개나리 핀 집 아래 뭐라도 묻혀 있나? 자네 첫사랑이 쓴 연서라도 들어있을지도 모르겠구먼."



 농담처럼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와 그 내용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노여움에 손이 떨려 술병 안의 술이 찰랑거리는 물 소리를 냈다. 온통 붉은 동백이 마치 그날의 핏줄기 같아 아무래도 평소처럼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개자식. 내가 형조의 망나니라고? 그러는 당신은 어디서 도망쳐 온 지옥의 옥졸이길래 나를 이리도 몰아붙여.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그 집에서요."

 "-자네 부친이 술을 많이 마시던 때가 있었지. 10년 전쯤 얘기인 것 같네만."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시지요. 이따위 얘기나 하려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옳아. 자네 이야기를 들으니 아귀가 맞춰지는 구만. 며칠을 집에 안 들어가고 주막에서 술이나 퍼지르는 것 같더라니."



 경멸 어린 시선이 몸을 훑는다. 그러나 범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쿨렁이는 물 소리를 내며 술을 마신다. 어쩌면 조금쯤은 웃는 표정으로, 뚝뚝 제 살점을 떨어뜨리는 동백과 그 위에 일렁이는 붉은 물 그림자를 안주 삼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개나리 밑에 묻혔나?"



 주먹이 떨렸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파고든 손톱이 손바닥 안에 동백 꽃빛으로 자국을 남기며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핏줄기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범신은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는 손을 휘휘 흔들어보인다. 마치 이제는 네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 다는 듯.



 "손바닥은 잘 소독하시고, 춘부장께 말씀 전해주시게. 조만간 뵙겠노라고."



 대답조차 하지 않고 크게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는 준호의 뒷모습 뒤로 소리도 없이 깊은 물속으로 잠기는 짙은 동백꽃 모가지가 처연했다.

==

헉...쓰다보니 장편이 될 거 같은데...

최근 조선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라 동양풍으로 쓰는 것이 즐겁네요 ㅎㅎ

Posted by habanera_

2016. 12. 30. 01:32

[한달]손에 담긴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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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2. 12. 14:59 자캐

[자캐] 달 없는 밤

 하얗게 일그러진 세계 속에서 숨죽여 외쳤다. 죽고 싶다, 고. 명확한 의지를 가진 네 글자는 입밖에 설니 하얀 입김에 섞여 소리 소문 없이, 그러나 돌이킬 수도 없이 깊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눈 내리는 밤, 나타샤도 하얀 당나귀도 없는 그 밤에 담배 연기가 구름 얽듯 세계를 옭아매었다. 하얀달은 한없이 달겨들어도 차마 쓰지 못하는 시의 구절들을 삼켜내며 눈을 감았다.





 하얀달.



 하, 얀달.



 입술 새 제 이름이 눌리면 소년은 창백한 하얀 얼굴을 숙이며 다만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른 어깨는 한 손에 잡힐 듯 가늘었고, 허름한 핏기조차 가신 입술을 얼마나 잘근 잘근 씹어댔는지 아랫 입술은 너덜거렸다. 그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던 사내애들은 저들끼리 모여 낄낄거리다 익숙하게 나뭇가지를 꺾어냈다. 두텁게 꺾인 나뭇가지는 그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꾸욱 눌렀고, 제법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하얀 관자놀이에 사정 없이 생채기를 냈다. 금시로 새빨갛게 상처를 메운 피는 가늘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 씨발, 쟤 봐. 피난다."

 "야, 그거 버려. 존나, 너도 병 옮는다?"

 "저 새끼 에이즈라 그랬어. 후장 따였다던데?"

 "와. 진짜냐? 개쩔게 더러운 새끼네. 야. 후장 따인 기분 어떠냐?"



 원색적일만치 지저분한 비난에도 헐렁한 교복을 입은 하얀달은 익숙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손등에 떨어지는 핏방울을 쳐다보았다. 뼈마디가 울릴 정도로 마른 손등을 얽은 핏방울은 기이한 문양을 그리며 손톱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제는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그들의 욕설을 듣던 하얀달이 문득, 어깨를 떨었다. 새하얀 운동화 코가 툭툭 바닥을 차며 다가왔다. 하얀달은 서둘러 피를 바짓자락에 닦아냈다. 그 순간이 지나기가 무섭게 부드러운 손아귀가 새까만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잡아올렸다. 아픔에 찡그려진 눈썹이 햇살 아래 드러나자 화끈한 통증이 뺨에 새겨졌다.



 "더러운 새끼가 어딜 눈을 마주쳐?"



 단정한 얼굴을 가진 소년은 하얀달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뺨을 내리쳤다. 소년은 여름철 상한 음식이라도 본 듯 비위가 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장난치듯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 손길만큼은 조금도 부드럽지 않아 뚜둑 뚜둑, 짧은 머리카락이 끊기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얼얼한 뺨을 감싸쥐지도 못한 하얀달은 소년의 몸짓에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면서 말을 없앴다.



 "야, 씨발. 하얀달, 아, 존나, 이름도 좆같이 이상한 새끼. 너 내가 뭐랬냐."



 한참을 마음대로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소년은 밀치듯 머리카락을 놓아버렸고, 그 서슬에 비틀거리면서 허우적거리던 하얀달은 눈을 감았다. 밀려드는 새카만 어둠은 고독이었고, 그 외로움은 오히려 저를 안심하게 했다. 제발, 이 순간이 끝나길, 저들이 지나간 뒤의 혼자를 뼈저리게 탐하며 하얀달은 입술을 몇 번이고 짓씹었다. 갈라진 입술 끝에서 피가 비어져나와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하얀달의 모습이 오기를 불러 일으켰는지 소년은 신발 끝으로 가는 무릎을 툭툭 치다가 종내에는 발길질로 종아리를 까내렸다. 맥없이 무너지는 하얀달을 내려다보던 소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귓가에 속닥거리듯 입술을 열었다.



 "야, 하얀달, 개새끼야. 후장에 박히는 기분, 어땠냐? 존나 앙앙거렸겠네, 씨발 새끼."



 하얀달은 주먹을 쥐었다. 비어져나오는 제 입술 너머의 붉은 피를 떠올리면서 그 머릿속에는 온통 시가 쓰였다. 하얗게 천공을 감싸 안는 달, 청금색 잉크로 지워지는 우주. 봄이 되면 비단처럼 벌어지는 다홍색 모란 꽃잎, 들. 사랑한다 속삭이는 연인들의 날갯짓. ...그러니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서 이 순간을 견디도록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순간을 헤아리면서.



 뺨에는 피가 아닌 미적지근한 것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피에 섞인 침이 하얀달의 볼을 타고 내리자 혐오가 뒤섞인 탄성이 소년들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제각각 다시금 의식처럼 그에게 한 마디씩 건넸고, 욕설이 한 마디씩 들려올 때마다 하얀달의 심장은 십 년을 삼켜갔다. 어린 몸을 지탱하는 늙은 심장은 아마도 오래 견디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나의 나이 든 심장은 조금쯤은 더 빠르게 그 죽음을 당겨와도 좋을 텐데, 나직한 한숨을 쉬며 하얀달은 고요히 눈을 내리떴다. 마지막으로 제 곁에 서 있던 소년이 운동화 신은 발로 무릎 꿇은 하얀달의 허벅지를 내리누르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하얀달은 무감한 눈으로 천공을 올려다보았다.



 달뜬 감청색으로 번진 하늘에는 아직 달을 맞이하지 못하여 지상에 뜬 하얀달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온전히 저 뿐이라는 적막감이 아릿하게 몸을 감싸고, 덩굴처럼 저를 감아드는 고적함은 하얀달은 운명처럼, 신탁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치 제가 하늘을 받치는 아틀란티스가 된 것마냥 차가운 거리를 무겁도록 천천히 걸어가며 하얀달은 어깨를 움츠렸다. 제 시선 아래 구두를 신은 발, 운동화를 신은 발이 지나갈 때마다 하얀달은 몸서리치며 공포를 삼키고, 저를 삼키고-, 살아있음을 삼키고.



 삼켜낸 아픔과 공포와 삶은 시가 되었다. 시를 씀으로써 하얀달은 그나마 살 수 있었다. 모든 죽어감을 꿈꾸면서도, 삶을 써내려간 하얀달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대신 시를 썼고, 그리로부터 10년 뒤, 그는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처음으로 더듬지 않고 펜을 꺾어버리겠노라 말했다.



 저를 살게 했던 그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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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habanera_

2016. 11. 26. 23:03 자캐

[요한은하]첫 눈

 감긴 눈 안에는 어느 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온전히 혼자라는 어둠과 고독은 저를 묻어버리기라도 할 것마냥 기도를 타고 들어와 혈관처럼 온 몸을 눅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온기 한 줌 없는 그 곳에서는 듣지 못했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고막을 찢어버릴 듯 감겨왔다.



 눈을 떠보니 시간은 오전 6시 34분. 여름이라면 희끄무레한 새벽빛이라도 비쳐들어올 시간이었지만 겨울에 가까워진 탓인지 커튼 너머 창문에는 서리서리 어둠이 달라붙어 있었다. 은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문지르며 제가 몸부림친 흔적이 그대로 남은 이부자리를 바라보고, 은수가 사주었던 인형 초코를 한 번 바라본 다음, 깡똥하게 낡은 잠옷 바지 발목을 조금 끌어내렸다. -를 만난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악몽은 그러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닌지 이따금씩 무수하게도 저를 짓눌렀다. 멍하니 곱씹듯 제 입술을 깨물며 초코를 끌어안던 은하는 이내 손을 뻗어 충전된 스마트 폰 잠금 화면을 열었다. 여러 번 망설이듯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카카오톡을 열어 네게 메세지를 전송했다.



 -한아, 자나?



 답장을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안 온다고 해서 섭섭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연락한 제 잘못이었다. 이렇게 연락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게 연락을 한 것은 그저 여기 이 곳에, 이 세계에 나 혼자 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던 탓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있는 이곳에, 내가 정녕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사실을 말하자면, 그 언젠가 부모님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네가 사라진 것은 아닐지 그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한아, 이요한. 너, 정말 거기 있니-? 엄마처럼, 아빠처럼, 나 혼자 두고 어디로 가 버린 건, 아니지? 


 혹시나하는 두려움에 숨조차 삭아들고 눈물조차 메말라갔다.



 -뭐야, 묘은하. 남편 보고 싶어서 연락했냐.



 그러니 뒤이어 울린 전화벨과, 졸음이 뚝뚝 묻어나오면서도 나를 찾는 네 목소리에 울어버린 것은 속상해서가 아니라 안심해서였다. 당황한 네 목소리가 억누르지 못한 오열 사이 맺히는 것이 감사하고도 또한, 기뻐서. 내가 사랑하는 요한아.



 "한아아-."

 "묘은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교가 많아졌냐."



 멀리서부터 요한의 인영이 보이자 은하는 그대로 달음박질쳐 달려와선 품에 덥썩 안겼다. 피식 웃으며 은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바닥의 온기에 다시금 눈물이 울컥거리며 밀려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이 걱정하는 건 보고 싶지 않은지 대답하지 않고 안긴 품 속에서 옷깃만 꾸욱 그러쥐기를 한참, 그제야 활짝 웃으며 은하는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더 이뻐가 그랬다이가."

 "뭐래. 이요한이 안 잘생겼던 적도 있었냐."



 평소처럼 뚱하니 대답하면서도 은하의 말이 싫지 않은 듯 웃음기를 머금은 요한의 대답에 버릇처럼 손을 꼭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한의 얼굴을 보고 커다란 손을 잡으니 이제서야 겨우 꿈과 현실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여기, 너와 내가 서 있는 곳이 현실이며 부모님을 잡아먹은 어둠과 파도 소리는 내가 만들어낸 몽환일 뿐이라고. 그러나 무의식중에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요한은 앞장서 걸어가던 은하의 손을 끌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묘은하. 괜찮아? 어디 아파?"

 "어어? 아니,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새벽에도 그렇게 울어놓고. -혹시 무슨 일 있어?"

 "...그기 아이라."



 얼버무릴 것처럼 입술을 몇 번 여닫던 은하는 결국 물기 어린 눈을 깜박거리며 운동화 코를 바닥에 툭툭 쳤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나오던 습관이었다. 언젠가, 요한에게 제 부모님이 돌아가던 날에 대해 얘기할 때처럼 툭툭, 낮아지는 소리.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흐린 하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 악몽... 나쁜 꿈을 꿔가 글타이가. ...한이 니도 없고, 아무도 없는, 그런 꿈..."



 어린애처럼 꿈을 무서워한다고 네가 놀릴까, 입술을 꾸욱 깨물며 일 없이 잡은 요한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은하는 느닷없이 저를 안는 품에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항상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요한은 언제나처럼 빙글 빙글 웃는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보 묘은하네."

 "-어? 뭐, 뭐라노, 바보 한이가?"

 "내가 묘은하 두고 어딜 가. 안 그래?"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과 말투와는 다르게 은하를 끌어안은 팔은 따뜻하고도 또 묵직해, 은하는 저도 모르게 풋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지. 너는 나를 두고 가지 않을 거지. 온 몸을 온화하게 휩싸고 도는 안도감에 은하는 요한의 미소를 따라하기라도 하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네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시린 공기에 차가워진 뺨을 두 손으로 데워주고 난 뒤, 마주한 얼굴에 한껏 뒤꿈치를 들어 뽀뽀한 은하는 배시시 웃으며 네 손을 다시금 꼬옥 쥐었다.



 "맞다. 우야노. 한이 니가 갈라해도 내가 안 보내줄낀데, 그체?"

 "-너가 가라해도 안 갈게, 묘은하. 은하야."



 평소라면 낯 간지럽다며 네 뺨을 늘리거나 소리 내어 웃었을 은하지만, 이번만큼은 잠자코 온기를 나누어주는 네 손을 그러 쥐었다. 잡은 두 손 위로 올해 너와 내가 함께 보는 첫눈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온화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떨어져 내렸다.



 "-좋아한디, 한아."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겨울 사랑


공미포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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