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의 그 겨울 이래로 묘은하는 겁이 많아졌다. 새카맣게 여울지는 밤을 무서워했고, 아가리를 벌린 어둠을 두려워했다. 짧게 제 발목조차 가리지 못하는 스누피 잠옷과 제 인형 초코가 아니면 잠조차 못자는, 어린 아이 같은 묘은하. -실은, 그 16살의 겨울 이래로 한 치도 자라지 못한 것은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는 가느다란 슬픔에 잠기어.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도 이 어린 정신은 자라지 못해, 홀로 자취방에서 잠 못 이루는 밤들을 헤아리기 힘들었다. 새벽녘, 제가 끄지 않고 잠든 브라운관의 새파란 잔광이 유리창에 날개를 펴는 것을 보며 은하는 울음을 삼키곤 했다. 제 이름처럼 아득하게 펼쳐진 어둠 속은 저 홀로 별세계로 떨어뜨려 놓은 것마냥 잠들어 뒤채지조차 않았다. 심장을 갉아먹으며 잠든 평온한 밤 속에서, 혼자서 시커멓게 물들어 가쁜 숨을 토해내는 제가 무섭고도 경멸스러워, 단음을 명멸하는 브라운관에 기대어 오래 새벽을 기다리기도 했었다. 아니, 차라리 그것은 의식처럼 잊힐 때쯤 제 꿈에 파고들어와 낯선 숨결을 나울지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결이 아니고서야 울지 못한 것은, 제 형 은수조차 몸부림치며 눈물을 삼키던 옛 기억 때문이었고, 아직 덜 자란 제 청춘에 바치는 기묘한 제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래서 묘은하는 겁이 많았고, 그래서 묘은하는 온기를 갈구했다.



 타인이 곁에 있다면 먼저 손부터 잡아 그 온기를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은 강박처럼 제를 옭아매는 잔향이었고, 고치기 힘든 버릇이기도 했다. 그 날, 제가 부모님 손을 잡아주지 않은 탓에 그리되었다고 믿는 저로서는 최선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그런 습관. 습관처럼 제 뒤를 따라붙는 그 어둠만큼이나 공허하고 애달픈 흔적.



 그 흔적은 끈질기게도 고통스러웠다. 부러 창피함을 무릅쓰고 숙면을 위한 초코와 낡은 스누피 잠옷까지 챙겨왔더랬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는 어둠은 묘은하를 가만히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던지 여름 합숙까지 저를 따라와 또 다시 후두를 짓쳐 눌렀다. 요란한 숨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킨 그 새벽, 달이 나울거리는 그 아름다운 밤에 저도 모르게 쏟아진 눈물을 닦아내며 나간 복도에서 너와 마주했다. 어둠은 무서웠고, 홀로인 그 새벽도 무서웠지만. 네 손을 쥐었고, 다시 네가 내 손을 잡아준 덕에 숨소리가 고요해졌다.



 숨소리만 고요해진 것이 아니었다.



 네가 들려주는 고요한 여름밤의 피아노를 들으며 은하는 아득한 하늘을 떠올리고, 묘막한 공허를 생각했다. 팔 벌린 네 품에 안겨 소리 죽인 눈물을 흘리면서 제 형에게조차 보여주지 못했던 슬픔을 쏟아냈다. 그때부터였을까, 네가 내 우주를 채우기 시작한 것이.



 도서실은 은하의 또 다른 우주이기도 했다. 그 우주에 저를 가둬놓았던 네가 밉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리라. 겁 많은 것을 빤히 알면서 홀로 저를 가둬놓는 네게 눈물이 차올랐지만 이유를 알고 나자 말간 웃음이 떠올랐다. 나에게는 너뿐이라는, 그런 말을 듣고 나서야 문을 열어주었던 너.



 사실은 나도 너뿐이라고, 말하고 싶었어.



말했제. 내 사랑 안 쉽다고. ...받아줄끼가.

...한아. ... 내 별, 되줄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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