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밤은 별이 무수했다. 무수한 별들은 속삭임보다도 조용히 천공을 가로질러 숨결에 섞이곤 했다. 그 밤, 무거운 밤. 무겁고, -환희로웠던 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도 3개월도 전의. 그 날 밤을 떠올리면 심장이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뛰는 듯 했고, 숨결이 가빠져왔다. 네가 내게로 달려오는 그 모습을 무수히 떠올리고 억겁처럼 상기해봐도 그 떨림이 가시질 않아서, 심장이 멎는 것은 아닐까 싶었던 적도 있었다. 네가 내게로 온 지 이만큼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적 같은 네가.



 그에 결국은 지청은 나른한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하늘거렸다. 단정하게 교재의 표면을 가리웠던 손가락이 움직이자 무심코 그 손가락에 시선을 박아놓았던 몇몇 학생들의 시선이 당황에 젖었지만 드물게도 알아차리지 못한 지청이었다. 단조로운 목소리로 비트겐슈타인이 말했던 전기 철학을 늘어놓던 지청이 한숨을 쉬자 고요하던 강의실 전체에 일시적으로 침묵 섞인 소란이 일어나는 듯도 했다.



 "-네... 그럼, 아가씨들... 여기까지, 할까요...?"



 강의실 한 켠에 얌전히 놓여있던 시계에 시선을 던진 지청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자 학생들은 너나할 것 없이 눈초리에 경악을 담았다. 2시간 연강이 있다면 100분을 꼬박 하고도 모자라 10분을 더 하기로 악명이 높은 모지청이었다. 그런 모지청이-물론 8분 정도였지만- 수업을 일찍 마쳐주다니-? 당혹스럽다 못해 경악스러운 그 눈빛을 아는지 지청은 반쯤 감긴 눈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남학생에게 천천히 시선을 맞추었다.



 "으응, -아가씨. ...그래서, 싫어요...?"



 나비 날개보다도 우아하게 접혀 눈웃음을 보내는 지청의 물음에 남학생은 새빨개진 얼굴을 감추지 못했고, 그와 동시에 산발적으로 표지가 덮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행여나 지청이 마음을 바꿀까 우렁차게 대답한 학생들이 떠나가는 강의실에서, 지청은 잠깐 다시 한 번 더 느른한 숨을 내뱉더니 코트 주머니에서 보헴 시가 곽을 꺼내었다. 빈 담배를 입에 물고 교재를 정리하던 지청은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 아직 책을 정리하고 있던 여학생을 불렀다.



 "으응, 저기... 아가씨...?"

 "-네, 교수님."

 "만약, 아가씨가 선물 받으면, -뭐가, 좋을까요...?"



 제 눈을 쳐다보는 지청의 눈은 선악과를 따다 문 뱀과도 닮아있어, 여학생은 잠깐 소름이 돋아오는 제 팔을 문지르다가 이내 무난한 대답을 내놓았다. 여학생의 대답에 한참을 조용히 고개만 끄덕거리던 지청은 그제야 생긋, 나긋한 미소를 담배와 함께 입술에 물고 소리도 없이 천천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걸어가는 지청의 손에는 꽃 한 송이와 함께, 무언가가 들어있는 큼지막한 종이 봉투가 들려있었다. 역에서 내려 골목길로 4-5분만 걸어가면 이내 소란스러운 거리와는 믿을 수 없게 조용하고 인적이 드문 거리가 펼쳐졌다. 그 조용한 집에서 단정한 표정으로 저를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떠올리며 지청은 조금 걸음을 서둘렀다. 선물이라면 아무래도 꽃이겠지요, 라고 말한 여학생의 조언을 충실하게 받아들인 지청은 커다랗게 얇은 꽃잎을 반쯤 펼친 라넌큘러스 꽃송이에 잠깐 시선을 맺었다. 꽃집에서 살 때에는 괜찮겠지 싶었지만 아무래도 한 송이는 적어보였다. 돌아갈까 어쩔까하는 새 이미 닿아버린 발자국에 결국 지청은 느린 한숨을 쉬며 문을 열었다.



 "검아, 나, 왔어요...?"



 불이 꺼진 거실에 들어서 습관적으로 불을 켰다. 아마 제 사랑스러운 연인은 저녁 어스름이 내린 줄도 모르고 제 방에서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터였다. 어느샌가부터 거실에 제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수조로 다가가 다섯 마리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한 지청은 여전히 그 소리 죽인 발걸음으로 네 방문으로 다가섰다. 문밖에서도 희미하게 코 끝을 스치는 테레빈유 냄새를 맡으며 지청은 살짜근 불빛이 내려앉는 문을 조용히 열었다.



 "아, 벌써. -청아, 왔어요?"



 역시 지청의 예상이 옳았는지 앞치마를 두르고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고 있던 검학은 지청의 얼굴이 보이자 반색하며 일어나 허둥지둥 앞치마를 벗고 제게 달려왔다. 눈 아래 흔들리는 검학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지청은 언제나 그랬듯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손바닥 안에 와닿는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쓸어주고나서야 몸을 뗀 지청은 반쯤 감긴 느른한 홍채로 널 쳐다보다가 그제야 손에 들고 있던 꽃을 건네주었다. 옅은 분홍색을 띠고서 반쯤 벌어진 꽃은 한 송이의 자태만으로도 충분히 묵직하고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붉은 입술에 언제나처럼 고요한 미소를 띠고 있던 지청은 조심스레 제 뒷머리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냈다.




 "내 예쁜 아가씨, 검이한테 주려고, 사왔어요..."



 꽃말은, 매력이라는데... 나직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새까만 눈을 크게 뜨고서 지청과 꽃을 번갈아 바라보던 검학은 하얀 뺨에 엷은 꽃빛을 덧씌운다. 부끄러운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고맙다고 웅얼거리듯 작게 말하는 검학을 다시금 품 안에 안아든 지청은 그 이마 위에 살짝 입술을 댔다. 마주친 지청의 얼굴도 검학을 따라서 조금 붉어졌다. 조금 더 몸을 낮추어, 부드럽게 흐트러진 네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는 그 귓가에 달콤하고도 고요하게.



 "축하해요, 우리. -사랑해요, 내 검아."



밤에는 눈을 감았다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황인찬, 무화과 숲


공미포 2,008

-

늦었습니다 너무했지요 청님 ㅠㅠㅠㅠㅠㅠ제가 컾록을 안 써드린 게 계속 마음에 걸려서

100일에는 꼭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약속 때문에 하루 늦게 완성했네요ㅠㅠㅠ

언제나 우리 청이 이뻐해주셔서 감사하구ㅠㅠㅠ

사랑해요 청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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