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6. 23:03 자캐

[요한은하]첫 눈

 감긴 눈 안에는 어느 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온전히 혼자라는 어둠과 고독은 저를 묻어버리기라도 할 것마냥 기도를 타고 들어와 혈관처럼 온 몸을 눅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온기 한 줌 없는 그 곳에서는 듣지 못했던 파도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고막을 찢어버릴 듯 감겨왔다.



 눈을 떠보니 시간은 오전 6시 34분. 여름이라면 희끄무레한 새벽빛이라도 비쳐들어올 시간이었지만 겨울에 가까워진 탓인지 커튼 너머 창문에는 서리서리 어둠이 달라붙어 있었다. 은하는 무거운 눈꺼풀을 문지르며 제가 몸부림친 흔적이 그대로 남은 이부자리를 바라보고, 은수가 사주었던 인형 초코를 한 번 바라본 다음, 깡똥하게 낡은 잠옷 바지 발목을 조금 끌어내렸다. -를 만난 이후 사라진 줄 알았던 악몽은 그러나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닌지 이따금씩 무수하게도 저를 짓눌렀다. 멍하니 곱씹듯 제 입술을 깨물며 초코를 끌어안던 은하는 이내 손을 뻗어 충전된 스마트 폰 잠금 화면을 열었다. 여러 번 망설이듯 머뭇거리던 손가락은 카카오톡을 열어 네게 메세지를 전송했다.



 -한아, 자나?



 답장을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안 온다고 해서 섭섭하지는 않았다. 굳이 따진다면 이렇게 이른 시간에 연락한 제 잘못이었다. 이렇게 연락하는 것이 무례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게 연락을 한 것은 그저 여기 이 곳에, 이 세계에 나 혼자 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받고 싶었던 탓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있는 이곳에, 내가 정녕 발을 붙이고 있는 것이 맞는지. -사실을 말하자면, 그 언젠가 부모님이 사라져버린 것처럼 네가 사라진 것은 아닐지 그것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한아, 이요한. 너, 정말 거기 있니-? 엄마처럼, 아빠처럼, 나 혼자 두고 어디로 가 버린 건, 아니지? 


 혹시나하는 두려움에 숨조차 삭아들고 눈물조차 메말라갔다.



 -뭐야, 묘은하. 남편 보고 싶어서 연락했냐.



 그러니 뒤이어 울린 전화벨과, 졸음이 뚝뚝 묻어나오면서도 나를 찾는 네 목소리에 울어버린 것은 속상해서가 아니라 안심해서였다. 당황한 네 목소리가 억누르지 못한 오열 사이 맺히는 것이 감사하고도 또한, 기뻐서. 내가 사랑하는 요한아.



 "한아아-."

 "묘은하,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애교가 많아졌냐."



 멀리서부터 요한의 인영이 보이자 은하는 그대로 달음박질쳐 달려와선 품에 덥썩 안겼다. 피식 웃으며 은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바닥의 온기에 다시금 눈물이 울컥거리며 밀려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이 걱정하는 건 보고 싶지 않은지 대답하지 않고 안긴 품 속에서 옷깃만 꾸욱 그러쥐기를 한참, 그제야 활짝 웃으며 은하는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더 이뻐가 그랬다이가."

 "뭐래. 이요한이 안 잘생겼던 적도 있었냐."



 평소처럼 뚱하니 대답하면서도 은하의 말이 싫지 않은 듯 웃음기를 머금은 요한의 대답에 버릇처럼 손을 꼭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다. 요한의 얼굴을 보고 커다란 손을 잡으니 이제서야 겨우 꿈과 현실의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여기, 너와 내가 서 있는 곳이 현실이며 부모님을 잡아먹은 어둠과 파도 소리는 내가 만들어낸 몽환일 뿐이라고. 그러나 무의식중에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요한은 앞장서 걸어가던 은하의 손을 끌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묘은하. 괜찮아? 어디 아파?"

 "어어? 아니,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새벽에도 그렇게 울어놓고. -혹시 무슨 일 있어?"

 "...그기 아이라."



 얼버무릴 것처럼 입술을 몇 번 여닫던 은하는 결국 물기 어린 눈을 깜박거리며 운동화 코를 바닥에 툭툭 쳤다.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언제나 나오던 습관이었다. 언젠가, 요한에게 제 부모님이 돌아가던 날에 대해 얘기할 때처럼 툭툭, 낮아지는 소리. 나지막하게 가라앉은 흐린 하늘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아, 악몽... 나쁜 꿈을 꿔가 글타이가. ...한이 니도 없고, 아무도 없는, 그런 꿈..."



 어린애처럼 꿈을 무서워한다고 네가 놀릴까, 입술을 꾸욱 깨물며 일 없이 잡은 요한의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던 은하는 느닷없이 저를 안는 품에 요한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에도 항상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던 요한은 언제나처럼 빙글 빙글 웃는 낯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보 묘은하네."

 "-어? 뭐, 뭐라노, 바보 한이가?"

 "내가 묘은하 두고 어딜 가. 안 그래?"



 장난스럽게 웃는 표정과 말투와는 다르게 은하를 끌어안은 팔은 따뜻하고도 또 묵직해, 은하는 저도 모르게 풋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지. 너는 나를 두고 가지 않을 거지. 온 몸을 온화하게 휩싸고 도는 안도감에 은하는 요한의 미소를 따라하기라도 하듯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네 두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시린 공기에 차가워진 뺨을 두 손으로 데워주고 난 뒤, 마주한 얼굴에 한껏 뒤꿈치를 들어 뽀뽀한 은하는 배시시 웃으며 네 손을 다시금 꼬옥 쥐었다.



 "맞다. 우야노. 한이 니가 갈라해도 내가 안 보내줄낀데, 그체?"

 "-너가 가라해도 안 갈게, 묘은하. 은하야."



 평소라면 낯 간지럽다며 네 뺨을 늘리거나 소리 내어 웃었을 은하지만, 이번만큼은 잠자코 온기를 나누어주는 네 손을 그러 쥐었다. 잡은 두 손 위로 올해 너와 내가 함께 보는 첫눈이 소리도 없이 조용히, 온화하게, 그리고 고요하게 떨어져 내렸다.



 "-좋아한디, 한아."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문정희, 겨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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