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에관한단상'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20.03.10 [창작/독에 관한 단상2] 헤엄치는 영원

 동그랗게 뜬 눈에 가늘게 찢긴 틈을 닮은 초승달이 상처를 냈다. 망울지는 달빛은 홍채에 금을 내고도 파문을 일으키는 학교 뒤편의 연못으로 조용히 떠올랐다. 그러나 그 달보다 눈부시고 황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 ..., 이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린 말을 깨달을 새도 없이 첨벙 소리를 내며 그것의 꼬리가 흔들리며 매끈한 수면을 자잘하게 부서뜨렸다. 깨어진 달빛을 꿰어낼 틈도 없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연못가에 선 소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역력하게 드러나 싶더니 무서우리만큼 새빨간 입술이 초승달을 삼켰다. 그 미소에 소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조차 버거워 이내 털썩 주저앉아 버렸고, 그 서슬에 소녀가 출입금지인 장소에까지 일부러 들어가게끔 만든 지갑이 연못 가장자리로 빗겨져 나갔다.

 

 

 “......”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이 검정 바탕에 리본이 달린 가죽 지갑을 톡, 하고 건드렸다. 지갑의 표면에서 물방울이 퍼져나갔다.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진 소녀는 그것의 손가락이 자기의 지갑을 건드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은 흙 끌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소녀가 느끼는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의 지갑을 두어 번 건드리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쭉 밀려나간 지갑은 주저앉은 소녀의 발끝을 건드리며 멈추었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지갑을 움켜쥔 소녀는 그것이 혹여나 튀어 올라 저를 덮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눈도 깜박거리지 못하며 그저 몸만 뒤로 밀어내다가, 이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초승달이 등을 덮는 그 길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가던 소녀는 아파트 입구에 도달해서야 겨우 숨을 골라 내쉬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손에 쥔 지갑에는 물방울 모양의 얼룩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일이 그저 몸서리 쳐질 정도로 생생한 꿈인 것만 같았다. 다만 제가 어제 들렀던 교내 연못이 제가 학교를 다니는 삼 년 내내 출입금지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 지나가듯 앞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운을 띄웠다.

 

 

 “명지야, 저기, 우리 학교 동관 뒤에 있는 연못 있잖아. 거기 왜 폐쇄됐지?”

 “거기? 출입금지 된 지 엄청 오래 되지 않았어? 어차피 갈 일도 없는데 왜?”

 “아니, 생각해보니까 우리 입학할 때부터 쭉 그랬었잖아. 근데 뭐 공사하는 것도 아니고.”

 “동관 뒤에 있는 연못? 거기 엄청 음침하잖아. 우리 언니 때부터 계속 출입금지였다던데? 언니 말로는 옛날에 연합고사 잘못 친 고 3이 거기 빠져죽었다나 어쨌다나. 뭐 흔한 학교 전설인 거 같던데. 실제로 팻말만 그렇지 야자 튀는 애들 종종 그 쪽 담벼락으로 도망친다더라. , 유영이 너도 거기로 튈 생각이구나?”

 

 

 두 사람의 대화에 지나가던 친구가 장난스레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금세 실체를 얻어 평소 생활로 끌려 들어온다. 출입금지라고 적힌 낡은 팻말은 있으나마나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테고, 실상은 오늘 저녁에도 누구든지 다닐 수 있는, 현실 속에 온전히 발을 디딘 공간. 유영은 그제야 겨우 온기 있는 미소를 띠며 친구의 대답에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 오늘 그쪽으로 튀어서 노래방에나 가야겠다.”

 “, 너 그러다 담임한테 걸리면 병풍 뒤에서 향 냄새 맡아. 너한테 온 학교가 쩔쩔매는 거 빤히 알잖냐.”

 “유영아, 너 이따가 음악 샘이 너한테 교무실에 좀 와달래!"

 “너 벌써 들킨 거 아니냐?”

 

 

 풋풋한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웃음소리가 교실 너머 흘겨 들어온 바람에 실려 나간다. 유영은 제 손이 교복 주머니 속에 넣어둔 지갑을 꼭 쥐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어제의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 석식 메뉴가 무엇인지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기에 바빴다.

 

 

 “, 진짜. 쌤은 만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 너무 늦었잖아.”

 

 

 투덜거리며 터벅거리는 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목덜미에서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을 넘기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커다란 세일러 카라를 펄럭거리게 하는 바람은 학교의 동관 뒤편에서 불어오는 듯 했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아주 가느다란 소리 같은 것, 휘파람 소리를 닮기도 하고 피리 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얇은 이명이 희미하게 귓가에 감겨왔다. 유영은 아침부터 줄곧 제가 검정 리본을 단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음을 지금에야 깨닫고 흠칫 어깨를 떤다. 평소에는 학원을 가느라 야간 자율 학습은 거의 빠지는데, 최근 기말 고사가 다가와 야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라고 할까. 전국 규모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큼지막한 수상 경력도 있는 유영이었기에 학교에서는 성적 또한 나쁘지 않은 유영을 명문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꽤 신경을 써주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유영이 딱히 바란 바는 아니었지만.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유영은 지갑에서 손을 떼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이명이 아니었다. 유영의 귀는 음악을 전공하는 만큼 소리를 포착하기에 민감한 귀였고,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유영은 저도 모르게 불 꺼진 동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평소 공포 영화를 즐겨보는 유영은 항상 혼자서 위험한 공간으로 가는 조연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막상 제게 그 상황이 닥치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혹은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낡은 출입금지팻말이 적힌 그 앞에서였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유영은 이제 그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안다. 어두운 밤이면 특히나 심연을 닮아 더욱 검게 빛나는 수면을, ‘그것의 꼬리가 튕겨내고 있는 소리일 터였다. 7월 초, 한창 더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 팔뚝 위쪽부터 목까지 오스스 돋아오는 소름은 분명 날씨나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소리에 겹쳐 더욱 더 선명해지는 소리는 노랫소리였다. 가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선율과 리듬을 가진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 유영은 홀린 듯 비척거리는 제 걸음을 도저히 제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그것이 저를 기다리며 유유히 웃고 있음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커다란 지느러미가 홍채를 도려내듯 가득 채웠다. 달빛이나 별빛 같은 것, 혹은 오로라를 닮은 빛들을 여러 조각씩 섬세하게 직조한 레이스를 이어 붙인 듯 아름다운 꼬리였으나, 그 크기가 상어만하다면 아름다움보다 먼저 공포감이 밀려온다는 것을 유영은 태어나 처음 경험하였다. 저절로 무릎이 떨려오며 힘이 빠져나갔지만 어제보다는 덜했다. ‘그것은 유영이 제 꼬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꼬리지느러미로 수면 위를 느릿하게 튕기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서 아름다운 눈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유영에게 노래를 불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유영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는 듯 했다. 오히려 어제와 달리 가까워지는 유영이 기쁜 듯 둥근 눈에는 즐거운 기색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인어, , 맞지...?”

 

 

 유영에게 보이는 것은 인간과 같은 상체와, 느릿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꼬리지느러미뿐이었다. 꼬리지느러미와 상체가 이어져있는 허리는 물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은 탓에 묻게 된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인어는 노래를 그치지 않고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어제는 너무 놀라 몰랐지만, 단정한 외모를 가진 인어의 눈에서는 유영을 향한 막연한 호감이 드러나 있었다. 여전히 놀랍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제에 비해 꽤 이성을 찾은 유영은 인어에게서 거리를 둔 채 오래 된 벤치에 걸터앉았다. 꼬리지느러미를 제외하고 움직이지 않는 인어는 그저 하염없이, 가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상냥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저기, 너는 내 말을 알아들어?”

 

 

 당장이라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학교 측에 알려 연못 속의 괴 생명체를 없애거나, 적어도 멀리 보내버리는 것이 이성적인 흐름이었겠지만 유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학교 측에서는 이미 이 인어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여기에 사는 것을 묵인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라고, 유영은 재빨리 캐치해낸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 말마따나 학교 동관 뒤편은 말만 출입금지 상태일 뿐, 담배를 피려는 학생들이나 야자를 도망치는 자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임이 이미 널려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단 한 번도 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음을 보았을 때, 유영이 다른 사람들과 연못에 갔을 때에는 인어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인어는 오직 유영에게만 제 존재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유영은 결국 이해와 이성을 포기하고 조각과도 닮은, 신화 속의 존재를 만나기 위해 자주 동관 뒤편의 연못을 찾아갔다.

 

 

 며칠 간 인어를 관찰해본 결과 그녀는 유영의 말은 알아듣지만 유영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리고 유영에게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보이며, 유영 외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동관은 뒤편만 폐쇄되어 있을 뿐이라 복도에서 내다보면 그녀가 지내는 연못이 빤히 보이는데, 그 누구도 쓸쓸하게 폐쇄된 공간의 연못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로 좋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결론이었지만 유영은 어느 순간 인정해버렸다. 그저 그녀의 곁에 있으면 편안했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변하면서 유영은 그녀의 물갈퀴 달린 손가락을 만질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노래를 듣곤 했다. 가끔은 달빛에 반사되어 구슬 흐르듯이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지느러미를 손가락으로 훑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 그녀는 노래를 잠깐 멈추고 휘파람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동그랗게 나이테를 닮은 비늘은 매끄럽고도 또한 그녀의 온기를 지녀 따뜻해, 유영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유영의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다시 끊겼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인어, 라고만 부르기에는 너무, 평범하지 않아?”

 

 

 철벅, 커다랗게 지느러미가 튀는 바람에 유영은 깜짝 놀라 숨을 멈추었다. 저 커다란 지느러미에 한 번이라도 맞으면 가벼운 상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 당연한 생각이 지금에서야 스친 탓이었다. 굳어버린 유영의 반응에 당황한 인어는 미안하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지만 기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마치 말을 알아듣는 동물과도 같은 반응에 유영은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쉬고 옆에 있던 돌멩이를 들어 물고기 모양을 바닥에 그렸다.

 

 

 “, 물고기, 비늘이니까, 어린...? , 어린이라니, 이상하다.”

 

 

 손가락이 닿았다. 흠칫 놀란 유영을 바라보는 눈은 한없이 맑고 고요해서 유영은 말없이 제가 들고 있던 돌멩이를 건네주었다. 차가운 물에 오래 있었을 손가락이지만 유영에게 닿았던 그 손가락은 여전히 온기가 서려 있어, 유영은 조금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돌멩이로 그려내는 형태를 오래 바라보았다.

 

 

 “..., 영원... 영원?”

 

 

 유영이 느릿하게 그녀가 써낸 문자를 읽어내자 차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맑은 구슬 같은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 유영은 나중에서야 그것이 영원의 꼬리지느러미에 달린 비늘들이 부딪치는 소리임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영원이 글자를 쓸 줄 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 글씨 쓸 줄을 알고 있었어?”

 

 

 말투가 이상해진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영의 물음에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둥근 눈을 한 번 더 동그랗게 뜨나 싶더니 이내 방울 소리를 닮아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제가 쓴 글자를 느릿하게 손가락으로 한 번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자 두 어 번 그 행동을 반복했다. 유영은 이내 그 뜻을 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자만 쓸 줄 안다는 뜻이야?”

 

 

 유영이 그제야 제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자 으레 그랬듯 순진한 표정 위로 박담한 그리움이 번지다 물크러졌다. 유영은 문득 영원의 표정에 가슴 한가운데가 아파오는 느낌에 찡그린 미소만 지어보이다 평소보다 일찍 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잊지 않고서.

 

 

 영원은 투명하게 쌓이는 듯 했으나 깊은 해저를 닮아 있었다. 투명한 물이 쌓이고 쌓여 이윽고 보이지 않는 해저를 만드는 모순처럼, 청아하게 울리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나 말은 할 줄 모르며, 제 이름은 쓸 줄 아나 문자를 모르며, 또한 유영을 좋아하나 영원을 사랑하게 된 유영은 몰랐다. 어느 샌가 자신의 삶에 물들어 지워낼 수 없게 된 영원 곁에서 유영은 달빛에 되튀는 비늘을 쓰다듬으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그토록 달고 그리우며, 또한 고통스럽다는 것을 유영은 처음으로 가슴이 시리도록 깨닫고 있었다.

 

 

 제 노래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소리도 없이 제 비늘을 곤두세우는 영원을 볼 때면 가끔 까닭 모를 눈물이 났다. 고요하게 뺨으로 엮어 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노래를 부르는 유영에게 영원은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을 뻗어 그 눈물을 단아하게 닦아내었다. 보석이 되지 못하는 유영의 눈물을 그토록 소중하고 정결하게 닦아내는 영원에게 결국 그 온기 서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어버렸다.

 

 

 “영원, 내 영원. , 영원이 되어 주세요, 영원아.”

 

 

 말이 되지 않는 말임을 알면서 지껄였다. 입 밖으로 내어버린, 금지되었던 언어들은 날것의 흉기가 되어 무수히도 제 귀와 달빛에게 날카로운 생채기를 내었지만 유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빨갛게 꽃받침이 되어버린 입술 너머에서 잔혹한 언어들이 제멋대로 꽃을 피워냈다.

 

 

 “모르겠어요, 영원, 영원아. 그냥, 너를 보면 내 심장이 뛰어요. 너를 보면 너무 행복하고, 너무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아파요.”

 

 

 누워서 눈을 감으면 네 생각이 났다. 눈꺼풀에 휘감긴 어둠을 모조리 채우는 것은 너의 둥근 눈이거나 혹은, 청명하게 울리는 네 노랫소리 같은 것이었다. 너만 떠올리면 심장이 너무 뛰어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내일이 얼른 와, 모두가 학교를 떠난 밤이 재게 달려와 너를 만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만히 토해내는 숨결 속에 쿵, -,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아슬하게 새벽녘에나 잠이 들면, 이번에는 너의 목소리를 듣는 꿈을 꾸었다. 너의 노랫소리에 잠을 깨어선 온종일 너만 생각했다. 너로만 가득 찬 나였다.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래, 그랬다. 영원아. 네가 차라리 독이라고, 내 숨통과 목숨을 모조리 손아귀에 움켜쥔 독이라고, 그리고 그 독이 너여서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눈물과 오열이 뒤섞인 고백이었고, 찰나의 독을 품은 자백이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비탄과 노여움에 젖어 유영은 아주 자연스러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젖은 영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들이 너무도 익숙한 마냥 영원은 제게 입을 맞추어놓고 정신을 잃은 유영을 가지런히 눕혀준다. 연못에서 그리 멀리 떨어질 수는 없지만 머리카락을 가다듬어주고 옷을 정리하고, 그리고 그 위에는 영원이 흘리는 금강석들이 빛을 머금은 물고기들처럼 유영의 주변을 헤엄친다. 다시 한 번 더, 또 다시 한 번 더,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유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다시

 또.

 

 

 -느릿하게 시간이 휘감겼다. 둥근 영원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굳더니 빛나는 금강석이 되어 연못 주변에 떨어졌다.

 

 

 너는 또, 나를 잊어버리고, 유영아.

 이리도 나를 사랑한다 해놓고, 금시로 나를 잊어버리는 너인데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차라리 나를, 죽여주련?

 

 

 나에게 이름을 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멋대로 사랑한다 말해놓고, 이리도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네 마음대로 나에게 입을 맞출 때마다 그 모든 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너를 나는, 어쩌면 좋을까. 투명하던 금강석에 붉은 선이 아로새겨졌다. 어느 새 영원의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원은 처음으로, 천천히, 유영의 몸을 안아 연못 속 제 꼬리 위에 얹혀놓는다. 윤슬에 흔들리는 유영의 머리카락이 여아하게도 수영한다. 홀린 것처럼 그런 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원은 그 입술에 다시 제 입술을 맞추며, 깊이, 깊이 그대로 연못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래, 유영. 헤엄치는 나의 영원.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영원아.

 그렇다면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줄까.

 삼키고 녹고 끝내는 엉켜버려, 서로가 서로를 죽음에 이르는 줄도 모르게,

 누가 누구의 독인 줄도 모르게 그저 그렇게, 독이 될까.

 그렇게 할까, 우리,

 영원히.

 

---사담

인어의 입맞춤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얻고 써본 이야기입니다

독에 관한 단상은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독과 여성,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서 쓰고 싶은 큰 모티프가 되겠네요.

2차 창작이었던 십이국기의 '독' 또한 이 독에 관한 단상과 관련한 이야기랍니다.

재밌게 즐겨주세요 ㅋㅋㅋㅋ

 

 

'끄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작/독에 관한 단상4]교실 환상곡  (0) 2020.08.17
[창작/독에 관한 단상3]제나와 묘란  (0) 2020.07.29
[창작]꽃이 부서지다  (0) 2020.06.12
[창작] 미정2  (0) 2016.04.27
[창작] 미정  (0) 2016.04.26
Posted by habanera_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habanera_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