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27. 10:25 끄적

[창작] 미정2

 "제국 대학 학생이라면 좀 더 언행에 주의해야지."



 쌍커풀이 없는 가늘고 긴 눈이 순간 더 기름해졌다. 북해를 연상시키는 서늘한 시선에 헌병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희고 단정한 얼굴에 떠오른 어렴풋한 경멸에 헌병은 한층 더 사나운 동작으로 청년의 팔을 이끌었다. 다가오는 팔을 보고 있던 한서는 그 팔을 뿌리쳤고, 그 서슬에 한서의 긴 코트 자락이 날리며 지나가던 여인의 발치에 엉켜왔다.



 "어어-."

 "계집애는 상관 없으니 갈 길이나 가."



 짜증 섞인 말투에 걸음을 멈춘 도혜가 빤히 헌병을 바라본다. 작은 키의 도혜는 종아리에 감긴 검은 외투를 걷어 내고 미색의 스커트를 정리한다. 그리고는 작지만 명료한 목소리로 헌병에게 말을 건다.



 "혹시 타카하시 상 아니신가요?"



 유창한 일본어로 자신을 부르자 헌병은 찡그린 인상 그대로 도혜를 다시 쳐다본다. 하얗고 단정한 재킷에 종아리까지 오는 아코디언 스커트를 입은 도혜를 찬찬히 바라보다가 타카하시는 이내 미간을 펴고 그녀에게 신경을 돌린다.



 "이거, 다시 보니 천라 포목점의 토오루 아닌가?"

 "네. 어제도 마님께서 저희 가게에 들러주셨는데, 자수는 완성하셨는지 모르겠네요."

 "하하, 덕분에 내가 호강일세. 아, 안 그래도 야회복 때문에 옷감 뜨러 간다고 하니, 꼭 가게에 전해주게."

 "네. 아, 저기 그런데 이 분은...?"



 순식간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바꾼 도혜는 조심스럽게 한서에게 시선을 보낸다.



 "이 녀석? 신경 쓰지 마. 경성 제국 대학 학생이라는 자가 아주 불손해. 한 번 서에 가서 주의를 받아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아 데리고 갈 참일세."



 헌병 앞에서도 저런 태도를 고수하는 한서를 보건대 일반인보다 고초를 겪을 것이 손에 잡힐 듯 빤했다. 다카하시를 한 번, 그리고 한서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본 도혜는 생긋 웃으면서 한서에게로 입을 열었다.



 "멍청한 사람이군요."



 일본어로 말했지만 경성 제국 대학의 학생으로 못 알아들을 바는 아니었다. 물론 다카하시도 도혜의 말에 당황하였지만 초면의 여인에게서 폭언을 들은 한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얀 얼굴이 금새 붉게 열기를 띄었지만 도혜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금 말을 이어나갔다.



 "일본 제국의 후의로 고등 교육까지 받으시는 분께서 이러한 태도로 일관하다니 한심하다고 할 수밖에 없네요."



 깊이 있는 눈으로 한서를 바라본다. 말하는 내용과는 다르게 고요하게 침잠하고 호의를 띤 그 눈빛에 한서는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짧게 숨을 내쉰다. 그리고는 정중하게 다카하시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죄송합니다. 앞 전에 친구와 언쟁이 있어 감정이 달아올랐던 상태였습니다. 언행 주의하라는 말, 새겨 듣겠습니다."

 "-물론 당연한 말이지만 어쨌거나 서로 가야지. 자네 학부에도 말을 해두어야겠어."

 "앗, 그러고보니 다카하시 상, 마님이 오늘 꼭 가져와달라고 하신 린넨이 들어왔습니다. 다카하시 상 셔츠에 꼭 쓰고 싶다고 얼른 가져다달라고 하셨는데, 이런 멍청한 내선인 때문에 늦을까 걱정이 되네요."



 도혜가 그리 말하자 미간을 찡그리고 마뜩찮게 한서를 노려보던 다카하시는 이내 혀를 한 번 차고는 숙여진 고개를 손으로 툭툭 친다. 마찬가지로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도혜에게 보낸 다카하시는 헛기침을 하고는 한 마디 툭 내던진다.



 "지금은 이렇게 가지만 다음에는 토오루 자네가 감싼다 해도 그냥 가지는 않을 거야."



 여전히 웃는 상으로 도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들었다. 멀어지는 다카하시의 모습을 보던 도혜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 숙인 한서를 툭 치고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자 한서는 당혹한 표정으로나마 도혜의 뒤를 따른다.



 "저, 감사했습니다."

 "아닙니다. 항상 조심하셔야지요."



 차박차박하게 흘러 떨어지는 검은색 케이프 코트를 바라본 도혜가 흥미로운 듯 나란히 서서 걷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검문 당하셨나요?"

 "무슨 일이랄 것도 없습니다. 저 치들은 조선 사람이라 하면 길가의 돌멩이 보듯 하니까. 차라리 돌멩이가 더 나을지도 모르지요."



 허망한 체념을 삼키는 답변에 도혜는 진지한 눈으로 언어를 피워낸다.



 "저는, 개처럼 빌지언정 살아 있는 것이 낫고, 살아 있다면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내보다 기개가 있고 절조가 있는 도혜의 말에 한서가 문득 그녀를 내려다본다. 반만 땋은 머리를 자연스럽게 감청색 공단 리본으로 묶어 나머지 머리카락은 곱게 빗질했다. 그 시대 여인치고도 크지 않은 키지만 흔히 볼 수 없는 고급 미색 양장을 차려입은 미인.



 단순히 일본인의 발을 핥으며 영욕을 누리는, 오욕과 수치도 모르는 자인 줄 알았지만 말을 들어보니 다른 느낌이다. 해서, 한서는 조금 더 도혜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졌다.



 "아가씨는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최한서라고 합니다. 아직 대학생이지요."

 "저는 이도혜라고 합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양장 기술을 가르쳐주러 가는 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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