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6. 12. 14:17 끄적

[창작]꽃이 부서지다

오랜만의 손풀기용 :D*

 

 

 아침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이는 유월의 그림자 속에서도 짙은 장미 향기는 숨길 수 없었다. 선명한 그리움을 안은 붉은색이기도 하고, 도톰하게 고운 진분홍빛깔을 그러모은 듯한 장미는 말 그대로 눈이 부신 자태로 담벼락을 흉폭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이마 위로 사정없이 내려앉는 햇빛에 손을 가려 그늘을 만들고서는 잠깐 우두커니 멈추어 장미 울타리를 바라본다. 낯설게 옅은 갈색 홍채에 진한 장미 향기가 물결처럼 아로새겨졌다.

 

 

 언제였더라, 이토록 많은 장미를 보았던 것이. 열린 동공을 굽어 살피던 장미꽃잎은 머리 안쪽으로 밀려 피어나듯이 어린 기억을 자극했다. 이마에 얹히는 이 햇볕과 강렬한 향기,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장미 무리는 분명, 미지의 것은 아니었다.

 

 

 문득, 장미 꽃잎 하나가 바람도 없이 느릿하게 발치로 떨어진다.

 

 

 벌거벗은 발톱 끝에 부드럽고도 생생한 꽃잎이 와닿았을 때, 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지는 두근거림. 그러나 결코 긍정적인 느낌의 설렘은 아닌. 부엌 찬장에 숨겨져 있던 간식을 몰래 꺼내어 먹은 뒤 입맛 없던 저녁식사 자리, 혹은 우연히 지나치는 골목길 한 구석에 펼쳐진 도색 잡지를 훔쳐본 듯이, 기분 나쁘게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그런 두근거림이었다. 왜일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이토록 버려진 느낌이 드는 이유가.

 

 

 -율하야. 같이 가자!

 

 

 낯설지 않은 그 울림에 경악을 애써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낮아진 시선 안에 방글 방글 웃으며 뛰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술을 그제야 자각한다.

 

 

 -지민아.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해보이는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유난히도 홍채가 크고 까만 눈은 반짝거리는 흰자와 경계를 이루어 더더욱 맑은 눈빛을 타인에게 보내주곤 했다. 폭신해보이는 머리카락, 어린 아이에게서 나는 우유에 적신 쿠키 향기 같은 것들은 지민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느낌을 더해주었다. 물론 지민이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에는 그 사랑스러운 외모 덕분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을 거라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서 귀로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멀뚱히 선 나는, 지민과 가장 친한 존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가장 그녀를 빛내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구부러든 등에 어눌한 말투.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의 대부분을 가려 타인과 제대로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절친한 친구였다. 음험한 첫인상에 저절로 뒷걸음질 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햇살보다 환하게 웃어주는 지민에게 나는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지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 시커먼 감정들을 여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금세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사랑스러운 지민.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지민. 그랬기에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는 필연적인 환상이 덧씌워지기 마련이다. 타인이 꿈꿔왔던 사랑의 이상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었던 지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아주는 나에게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고.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나누었다. 나는 지민이 악을 쓰며 우는 것을 보았다. 이를 갈며 쌍욕을 하는 것도 보았다.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웃다가 침이 흐르는 것도, 전날밤부터 저녁을 먹지 않아 그다음날 점심에야 입가에 케첩과 소스를 묻히며 탐욕스레 정신없이 햄버거를 먹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지민이 나에게만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민은 나에게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잘라주기도 하였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해주었고, 말수가 적은 내 성향을 두고 사려 깊고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고 주변에 칭찬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지민만 나에게서 본 것들이었다. 나는 나조차 내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었는데 오직 지민만이 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서 나는 지민을 속였다. 지민은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있었다. 울고 웃고 화내는 인간인 주제에 감히 저는 그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듯 항상 사랑스럽고 완벽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 등에 기대어 훌쩍거리며 욕을 퍼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 그 완벽한 표정과 몸짓으로 멀어져가는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조차 모르는 내가 되게끔 타인들을 속이는 지민이니까, 나도 지민을 속일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걷다가 나를 향해 웃어주자, 나는 어두운 쾌감이 등골을 내달리는 흥분을 느꼈다.

 

 

 -선생님이 부르신 적 없다고 하시네.

 -어? 아까 부르시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들은 건가봐, 미안해.

 -아니야, 착각할 수도 있지 뭐. 다음 시간은 음악시간이지, 율하야?

 

 

 아무렇지도 않게 음악책을 챙기러 교실의 제 자리를 찾아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자 오싹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처음에는 그걸로 만족했다. 지민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속인다는 건, 내 스스로의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그 뒤부터는 더욱 쉬웠다. 사소한 거짓말과 미묘한 속임수에 지민은 쉽게도 넘어갔다. 교묘한 칭찬과 사실을 섞은 거짓은 진실보다도 쉽게 지민의 경계를 통과했다. 어느 반 남학생이 지민이 너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좀 모자라보인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던지, 선생님들끼리 얘기하는 걸 몰래 들었는데 이번 시험에서 지민 네가 생각 외로 성적을 잘 받지 못해 조금 실망하셨다던지의 이야기들. 그 남학생이 지민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지민의 성적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 입 속에서 튀어나온 은밀한 거짓들이 지민의 귀에서 만개할 때마다 지민은 조그만 주먹을 꼭 쥐며 분개한 듯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결론적으로 지민의 완벽함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완전하게 사랑스러운 소녀는 가끔씩 지나치는 남학생들을 쏘아보기도 했고, 도와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모르는 척 내 팔짱을 끼며 지나가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조금 무너져 더더욱 인간적이 된 사랑스러움은, 사실은 내가 인위적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그 사실에 기묘하고도 은밀한 쾌감을 느끼며 작은 진실을 섞은 거짓을 자랑스레 쌓아갔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공원이 있었다. 학교 가까이에 있었지만 한밤중의 공원은 놀라울 정도로 적막하면서도 동시에 밤의 기품으로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마련된 벤치에 걸터 앉아 불꺼진 교정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거기서 완벽한 소녀는 사라지고, 제 감정에 충실한 생기발랄한 소녀 두 명이 마음껏 떠들곤 했다. 공원에 흩어놓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모두 청아하게 몸을 뒤틀며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삼십분을 먼저 공원에 나와서 기다렸던 날, 그리고서는 그녀에게 왜 잘못 기억했느냐고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날 지민은 나에게 내 거짓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밤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하얀 종아리께에서 침묵이 부서졌다. 회오리치는 그 검은 정적을 응시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왜 속아줬어...?

 -그냥.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지민의 담담한 고백은 줄곧 그녀를 속였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심을 부서뜨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발언이었다. 어떠한 미움이나 증오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이하고도 또한 단정해,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지민을 미워한 적 없었다. 증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왜 나는 그녀를 속이고 싶었을까. 속여야만 했을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물음표들을 채반에 받치듯 잡아끌며 나는 애써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렇다면 지민은 왜 나에게 속아줬을까. 잠자코 내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다 알면서도 왜 나에게 속은 듯 불완전한 소녀가 되었을까.

 

 

나는 왜. 너는 왜. 우리는 왜.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배신자였고, 그럼으로써 믿음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결코 믿지 않으리라는 모순된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진심일 수 있었겠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온전히 서로를 향한 등뿐이었다. 그러나-, 그랬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등을 기댔던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언젠가 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므로, 몰락하는 꽃을 바라보기보다는 먼저 무너뜨리는 상냥함도 있기에.

 

 

 바람이 분다. 시계를 가득 채우던 장미가 물보라처럼 산산히 부서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꽃잎들은 으깨어지기 전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너도 나도 모를, 미지의 어느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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