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2. 14:59 자캐

[자캐] 달 없는 밤

 하얗게 일그러진 세계 속에서 숨죽여 외쳤다. 죽고 싶다, 고. 명확한 의지를 가진 네 글자는 입밖에 설니 하얀 입김에 섞여 소리 소문 없이, 그러나 돌이킬 수도 없이 깊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눈 내리는 밤, 나타샤도 하얀 당나귀도 없는 그 밤에 담배 연기가 구름 얽듯 세계를 옭아매었다. 하얀달은 한없이 달겨들어도 차마 쓰지 못하는 시의 구절들을 삼켜내며 눈을 감았다.





 하얀달.



 하, 얀달.



 입술 새 제 이름이 눌리면 소년은 창백한 하얀 얼굴을 숙이며 다만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마른 어깨는 한 손에 잡힐 듯 가늘었고, 허름한 핏기조차 가신 입술을 얼마나 잘근 잘근 씹어댔는지 아랫 입술은 너덜거렸다. 그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던 사내애들은 저들끼리 모여 낄낄거리다 익숙하게 나뭇가지를 꺾어냈다. 두텁게 꺾인 나뭇가지는 그대로 속도를 늦추지 않고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꾸욱 눌렀고, 제법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하얀 관자놀이에 사정 없이 생채기를 냈다. 금시로 새빨갛게 상처를 메운 피는 가늘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으. 씨발, 쟤 봐. 피난다."

 "야, 그거 버려. 존나, 너도 병 옮는다?"

 "저 새끼 에이즈라 그랬어. 후장 따였다던데?"

 "와. 진짜냐? 개쩔게 더러운 새끼네. 야. 후장 따인 기분 어떠냐?"



 원색적일만치 지저분한 비난에도 헐렁한 교복을 입은 하얀달은 익숙한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손등에 떨어지는 핏방울을 쳐다보았다. 뼈마디가 울릴 정도로 마른 손등을 얽은 핏방울은 기이한 문양을 그리며 손톱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이제는 하루의 일과가 되어버린 그들의 욕설을 듣던 하얀달이 문득, 어깨를 떨었다. 새하얀 운동화 코가 툭툭 바닥을 차며 다가왔다. 하얀달은 서둘러 피를 바짓자락에 닦아냈다. 그 순간이 지나기가 무섭게 부드러운 손아귀가 새까만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잡아올렸다. 아픔에 찡그려진 눈썹이 햇살 아래 드러나자 화끈한 통증이 뺨에 새겨졌다.



 "더러운 새끼가 어딜 눈을 마주쳐?"



 단정한 얼굴을 가진 소년은 하얀달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뺨을 내리쳤다. 소년은 여름철 상한 음식이라도 본 듯 비위가 상한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다가 이내 장난치듯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그러나 그 손길만큼은 조금도 부드럽지 않아 뚜둑 뚜둑, 짧은 머리카락이 끊기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얼얼한 뺨을 감싸쥐지도 못한 하얀달은 소년의 몸짓에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면서 말을 없앴다.



 "야, 씨발. 하얀달, 아, 존나, 이름도 좆같이 이상한 새끼. 너 내가 뭐랬냐."



 한참을 마음대로 하얀달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던 소년은 밀치듯 머리카락을 놓아버렸고, 그 서슬에 비틀거리면서 허우적거리던 하얀달은 눈을 감았다. 밀려드는 새카만 어둠은 고독이었고, 그 외로움은 오히려 저를 안심하게 했다. 제발, 이 순간이 끝나길, 저들이 지나간 뒤의 혼자를 뼈저리게 탐하며 하얀달은 입술을 몇 번이고 짓씹었다. 갈라진 입술 끝에서 피가 비어져나와도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말하지 않는 하얀달의 모습이 오기를 불러 일으켰는지 소년은 신발 끝으로 가는 무릎을 툭툭 치다가 종내에는 발길질로 종아리를 까내렸다. 맥없이 무너지는 하얀달을 내려다보던 소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귓가에 속닥거리듯 입술을 열었다.



 "야, 하얀달, 개새끼야. 후장에 박히는 기분, 어땠냐? 존나 앙앙거렸겠네, 씨발 새끼."



 하얀달은 주먹을 쥐었다. 비어져나오는 제 입술 너머의 붉은 피를 떠올리면서 그 머릿속에는 온통 시가 쓰였다. 하얗게 천공을 감싸 안는 달, 청금색 잉크로 지워지는 우주. 봄이 되면 비단처럼 벌어지는 다홍색 모란 꽃잎, 들. 사랑한다 속삭이는 연인들의 날갯짓. ...그러니까, 떠올릴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모아서 이 순간을 견디도록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순간을 헤아리면서.



 뺨에는 피가 아닌 미적지근한 것이 끈적하게 흘러내렸다. 피에 섞인 침이 하얀달의 볼을 타고 내리자 혐오가 뒤섞인 탄성이 소년들 사이에서 피어올랐다. 제각각 다시금 의식처럼 그에게 한 마디씩 건넸고, 욕설이 한 마디씩 들려올 때마다 하얀달의 심장은 십 년을 삼켜갔다. 어린 몸을 지탱하는 늙은 심장은 아마도 오래 견디지 못할 텐데, 그렇다면 나의 나이 든 심장은 조금쯤은 더 빠르게 그 죽음을 당겨와도 좋을 텐데, 나직한 한숨을 쉬며 하얀달은 고요히 눈을 내리떴다. 마지막으로 제 곁에 서 있던 소년이 운동화 신은 발로 무릎 꿇은 하얀달의 허벅지를 내리누르고 자리를 뜨자 그제야 하얀달은 무감한 눈으로 천공을 올려다보았다.



 달뜬 감청색으로 번진 하늘에는 아직 달을 맞이하지 못하여 지상에 뜬 하얀달을 내리 누르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온전히 저 뿐이라는 적막감이 아릿하게 몸을 감싸고, 덩굴처럼 저를 감아드는 고적함은 하얀달은 운명처럼, 신탁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치 제가 하늘을 받치는 아틀란티스가 된 것마냥 차가운 거리를 무겁도록 천천히 걸어가며 하얀달은 어깨를 움츠렸다. 제 시선 아래 구두를 신은 발, 운동화를 신은 발이 지나갈 때마다 하얀달은 몸서리치며 공포를 삼키고, 저를 삼키고-, 살아있음을 삼키고.



 삼켜낸 아픔과 공포와 삶은 시가 되었다. 시를 씀으로써 하얀달은 그나마 살 수 있었다. 모든 죽어감을 꿈꾸면서도, 삶을 써내려간 하얀달은 더듬거리며 말하는 대신 시를 썼고, 그리로부터 10년 뒤, 그는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처음으로 더듬지 않고 펜을 꺾어버리겠노라 말했다.



 저를 살게 했던 그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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