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다.”

 

 

 간결하게 말하고는 준호가 가져온 제 짐 꾸러미를 연다. 안에는 알아볼 수 없는 이국의 글자가 적힌 투명한 병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단매가 누워있는 침상에서 뚜렷하게 경계를 그리는 하얀 선. 요 사이 잘 나간다는 평판치고는 의외일 정도로 살풍경한 단매의 처소에서 거의 유일한 가구인 화장대 위에 그 병들을 차례로 올려두며 범신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제 되었다. 너는, 이 아가씨를 잊어버리고 살아도 된다. 성공한다면 내일부터는 멀쩡해질 테니.”

 

 

 그리고는 다시 꾸러미에서 긴 천을 꺼낸다. 한쪽 꼬리가 긴 십자 모양이 자수로 놓인 보랏빛 천 여러 개를 꺼내어 침상의 네 귀퉁이에 묶고, 다시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꼬아 그대로 단매의 사지를 결박한다.

 

 

 “, . 아니, 이 말도 안 되는 모습이랍니까.”

 

 

 비명에 가까운 준호의 외침이었지만 범신의 귀에는 이미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십자가와 성수, 이국의 여인이 그려진 종이까지 꺼낸 범신은 낮게 읊조리며 성호를 그었다. 성호를 그으면서도 연신 들릴 듯 말듯한 중얼거림을 이어나간 범신이 침상 곁 소금 선을 건넌 순간, 단매의 몸이 들썩였다. 그저 흔히 보이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천장에서부터 누군가 단매의 배를 붙잡고 들어 올리는 것처럼, 전신이 무지개처럼 둥글게 일으켜진다.

 

 

 “감히 네가 나를 부르느냐.”

 

 

 몸이 굳었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범신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보려던 준호가, 저 어리고도 가는 몸을 지닌 여인의 한 마디에 온 몸이 경직되었다. 움직임이 멎고서야 제 등에 흘러내리는 땀을 알아차린 준호는 후들거리는 제 다리를 내려다본다. 지금 명백하게 자신의 몸에 새겨지는 증거들은 공포의 흔적. 온 방을 채우는 악취보다도 먼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공포에 신체가 얼어붙었다.

 

 

 “위대하신 하느님을 따르는 내게, 너 따위 것은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다.”

 

 

 코웃음을 치며 십자가를 집어든 범신이었지만 그 손등에 가는 떨림이 번짐을 민감하게도 알아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상 위로 풀썩 몸을 다시 뉘인다. 곧 몸이 반으로 접히려다 말고 범신이 묶어놓은 팔과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힘이 빠진 개구리처럼 전신이 펼쳐졌다 접히기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온통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하얗게 반짝이는 것이 웃고 있는 단매의 입매인 것을 알아차리자 팔에 소름이 끼친다. 그 미소가 향하는 것이 자신이 아님을 빤히 알고 있음에도.

 

 

 “늙다리 겁쟁이 따위는 내 간식거리도 되지 않는다. 거추장스럽게.”

 

 

 흐트러져 엉망이 된 머리카락 새로 비식 미소를 짓는 이만이 하얗다. 머리카락을 헤쳐 이마에 성호를 그으려 하자, 눈이 마주친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던 단매의 눈은 사각으로 벌어진 염소의 눈. 당황한 범신의 손목을 단매의 이가 깊게 베어 문다.

 

 

 “아저씨!”

 “최준, .”

 

 

 찰나의 순간 간신히 단매에게서 범신의 손목을 낚아챈 준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마자 범신은 나지막이 탄식한다.

 

 

 그리고 단매는, 준호를 보자마자 깊이 입술을 끌어올린다.

 

 

 “이 새파랗게 어린 꼬맹이는 좀, 쓸 만 하겠는데.”

 

 

 범신을 구하느라 이미 소금선 안으로 들어와 버린 순진한 어린 양. 하느님을 믿지도 못하면서 그저, 사람을 구하겠다는 선한 일념으로 선을 넘어버린. 짙은 탄식에 저를 맡기면서도 준호에게 단매의 신경이 넘어간 그 때를 노려 단매의 이마에 성호를 긋고 가슴팍에 십자가를 놓는다. 여전히 쳐다보는 사람의 신경을 태워버릴 듯 거친 눈빛이었지만 아까처럼 괴이한 움직임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아가.”

 “아저씨.”

 

 

 저가 잡아놓고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눈에는 차마 떨쳐내지 못한 죄악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구하겠노라는 의지가 공존하고 있어, 범신은 더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단매는 떠나갈 듯 날카로운 웃음소리를 내더니 거침없이 말을 줏어 삼키기 시작했다.

 

 

 “이마에 피도 안 마른 어린 핏덩아, 세상에나! 너는 저보다도 훨씬 어린년을 잡아먹었구나. 개만도 못한 치. 그래, 너보다야 네 어린 동생년 살점이 개한테는 딱이었겠지.”

 

 

 다리가 휘청거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그 어린 날 제가 저질러버렸던 죄가 천지에 낱낱이 까발려진다. 농도 짙은 땀이 수려한 얼굴을 뒤덮고, 벌써 그 날로 되돌아가버린 아이의 동공으로 입술만 덜덜 떤다.

 

 

 “핏덩이야, 아가! 왜 그러느냐? 이제와 발이 아프기라도 하든? 하긴 제 발에서 꽃신이 벗겨지든, 가죽신이 벗겨지든 알아차리기나 했겠느냐. 저 뒤에서는 아드득, 아드득, 제 동생 뼈 부숴 삼키는 소리만 요란했건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지상에 떨어진 별처럼 방 안을 집어삼켰다. 범신에게 맹랑하게도 대들었던 모습은 간 데 없이,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부서진 동공으로 비척, 단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정신 차려. 정녕 마귀의 말에 넘어가려느냐.”

 

 

 찰싹, 가볍게 뺨을 맞는다. 멍하니 정신이 빠져 있던 준호가 그 몸짓에 그제야 잠깐 고개를 흔들고 범신을 바라보았다. 구원처럼 제 눈에 박혀드는 그윽한 그림자에 눈에서 눈물이 둑 터지듯 줄줄 흘러나왔다. 망가진 인형처럼 범신 뒤에 주저앉아 눈물만 툭툭, 갓끈과 검은 두루마기에 퍼져나간다.

 

 

 “, 아저, 아저씨.”

 “비겁한 것. 이 어리석은 이를 현혹시켜 네 것으로 만들려 했더냐? 가소롭다.”

 “, 늙다리 고기는 줘도 안 먹을 텐데.”

 

 

 인간보다는 이형에 가까운 눈이 마주치자 비싯,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보게나. 사람 잡아먹은 이들끼리 서로 상처라도 핥아주는 태냐? 아주 보기 좋구나. 늙다리 네놈도, 편히 죽기는 틀려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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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나, 이것은 사이비가 아닙니까.”

 “세종께서 왜 훈민정음을 반포하셨는지, 그리고 그 글이 암클이라 경멸당하면서도 어찌하여 낮은 이들 모두 그를 사용하는지 아가, 너는 좀 생각할 필요가 있겠구나. -그러하면 이 사이비라는 서학이 왜 낮은 이들 가운데 퍼져 가는지 조금은 짐작이 될 터이니.”

 

 

 알 듯 모를 듯한 범신의 대답에 준호는 눈썹 한 쪽을 들어 올렸다 내리고는 결국 어깨를 늘어뜨렸다. 시간이 없다는 범신의 말도 사실이었다. 형조의 이름을 들먹이기는 했으나 엄연히 준호 독단으로 벌인 일이었다. 이로 인해 형조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되었기에,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단매의 향낭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아가, 너 뭐하느냐.”

 “? , 아니, , 약초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을 좀 하려고...”

 

 

 말끝을 흐리자 범신의 입꼬리가 실룩거린다. 간신히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단매를 제 어깨에 짊어진다.

 

 

 “여전히 약초 타령을 한다는 말이지. -그렇다 한들, 이 아가씨가 매 순간 그것들을 가지고 다닐 정도로 그리 어수룩하겠느냐.”

 “그러면 어디서...?”

 “일이 생각지도 못하게 굴러갔으니, 아가, 너도 이 아가씨 방으로 가자꾸나. 요새 이리도 전도유망한 이라 한다면 저 개인 처소 정도는 가지고 있을 터이다. -채련아.”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자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린다. 기척도 없이 제 처소로 돌아가지 않고서 그들을 기다리고-, 혹은 감시하고 있던 채련도 채련이었지만, 그를 예상하고 불러낸 범신도 범신이었다. 당황스러워하는 준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당연한 말투로 채련에게 앞장설 것을 지시했다. 이미 제 속도를 되찾아 느긋한 채련을 앞세우고, 범신은 무엇인가가 잔뜩 들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제 짐을 준호에게 안긴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영문도 모르는 채로 준호는 쫄랑쫄랑 두 사람을 쫓아간다.

 

 

 “너는 나를 본 적이 없을지언정, 내 너를 본 적이 있다. -주 선비의 댁에서.”

 “-그러합니까.”

 

 

 가채를 화려하게 틀어 올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똑바로 눈을 마주한 채 설핏 가는 웃음을 띄운다. 그 웃음에 마주 웃어 보이며 한없이 진지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 또한 단 한 명이신 주인을 믿는 사람이다. 그러한 나를 믿고, 이 아이를 맡길 수 있겠느냐.”

 

 

 일순 주저하지 않았다하면 거짓일 것이다. 세월이 새겨진 눈매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고, 입술 끄트머리에 핏기가 희게 지워졌다 다시 서린다. 그러나-, 의외일 정도로 순순히 채련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범신이 그제야 숨을 길게 몰아쉬더니 하늘을 확인한다. 쪽빛보다 일렁이는 남색 하늘에 둥근 달이 휘영청 어금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 딱 보름이구나. 오늘 밖에는 날이 없다. -채련이 준비는 잘해두었을 테지.”

 

 

 중얼거리다 말고 문을 열어 성큼 성큼 발을 옮긴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준호는 별안간 올라오는 욕지기에 내던지다시피 범신의 짐을 내려놓고 요란하게 헛구역질을 했다. 방 안을 떠도는 악취가 워낙에 강렬했던 탓이었다. 범신은 코를 찌르는 그 냄새가 느껴지지도 않는지 조심스레 침상에 단매를 내려놓고는 가슴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하는 준호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초심자에게 강렬하기는 하겠구나. 천이라도 주랴?”

 “뭡니까, 이 냄새? 정말, 시체라도 썩는 내 같습니다. 대체 어떤 식물이 이리 냄새가 납니까?”

 “허허, 아직도 약초 타령이더냐. 너는, 저것이 진정 약으로 만들어진 모습 같으냐.”

 

 

 낮게 혀를 차면서 몸을 틀어준다. 범신의 커다란 등에 가려져 있던 단매가 드러난다. 아니, 그것은 제가 아까까지만 해도 보았던 단매가 아니었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 붉게 변한 피부에 제 손목을 피가 날 때까지 할퀴는 긴 손톱. 단정하게 가채를 틀어 올렸던 머리는 온통 흐트러져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오싹한 형태를 하고 있는, -어떤 것. 준호는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대체, , 저게,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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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의심은 가지만 두 사람 다 이렇게 말하는 데다가, 동지사와 형조의 사람이라는 직위에 채련도 어쩔 수 없이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치떴던 눈매에 다시 가느름한 웃음기를 피우며 곤란하게 눈썹을 늘어뜨린다.

 

 

 “두 분 다 이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고개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아이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며칠간 말미를 주시겠습니까.”

 “아닐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낸다. 부드러워졌던 채련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다시 날을 세웠다. 이번에는 범신이 더욱 진지하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형조의 정랑으로,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와 함께 단매라는 이 기생을 조사하러 온 것이네. 실은 오늘 확인만 하러 온 차였으나 상태를 보아하니 하루라도 더 빨리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지네만.”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뜻에 준호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지다 말고 금세 가라앉는다. 설명하겠다는 말이 이 뜻이었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황에 설명 요구는 뒤로 미뤄두고 아닌 척 저 또한 채련에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어쩌시겠단 겁니까. 오라라도 묶어 형조로 데려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떠돌던 미소가 간 데 없다. 범신의 묵직한 언사를 정면에서 맞받아치는 채련에게서 또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났다. 채련의 말에 범신이 조금 웃음을 짓나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이 아가씨를 그냥 보내주었다가는 단서 은닉의 위험이 있다는 말이지. 날이 밝는 대로 즉시 함께 조사할 다모를 불러올 테니 오늘 밤만 같이 있어도 되겠는가?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함께 있어도 좋네. 내가 따르라는 지침만 모두 따른다면 말일세.”

 “보셔요, 어르신. 지금 이 아이는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가 어찌 단서를 숨긴단 말입니까. 내일 날이 새자마자 제가 이 아이를 데리고 형조로 직접 출두할 터이니,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그럴 수는 없네. 아까도 말했고, 그대가 확인했다시피 우리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이 모든 행각이 이 아가씨의 연기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앞서도 말했듯 원한다면 우리와 함께 있어도 좋네. 다만, 우리 눈 밖에 이 아가씨를 벗어나게 허락할 수는 없네.”

 

 

 조용히 눈을 마주치나 싶더니 단매의 목에 걸린 묵주를 슬쩍 눈짓한다. 그 눈빛에 채련의 낯빛이 일순 하얗게 질린다. 금세 돌아오기는 했으나 채련은 아까까지의 반대가 거짓말인 것처럼 온순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어르신을 따르도록 하지요. 제가 곁에 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오직 영감만을 믿고 나가보겠습니다.”

 

 

 창보다 날카롭고 직설적인 눈빛으로 범신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맺는다. 과연 그저 공으로 이 자명루의 기생 어멈이 된 것은 아닌 듯 웬만한 장수만한 기백이 느껴지는 눈빛과 태도였지만 범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부탁 몇 개만 하겠네. -이 종이대로 준비 좀 부탁하네.”

 

 

 여유만만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종이까지 쥐어주며 손짓으로 그녀의 퇴실을 허락한다. 단숨에 바뀐 행동에 문이 닫히자마자 준호는 범신을 빤히 바라본다.

 

 

 “아가, 왜 그러냐.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느냐.”

 “농치지 마시고, 저 사람도 서학 쪽입니까.”

 “시간이 없구나.”

 “모르는 척 마십시오. 맞지요? 아니, 아무리 기생이라고 한들 아녀자까지 사이비 학문을 배운단 말입니까?”

 

 

 행동이 멎는다. 느릿하게 준호를 돌아다보는 눈빛은 기묘하게 형형하다. 동백문 접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마디가 새하얗다.

 

 

 “아녀자라 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며, 여인이라는 이유로 기껏해야 수예나 놓을 뿐, 더러는 짐승 같은 사내를 만나 평생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오직, 여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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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디를, 가십니까?”

 “아까도 듣지 않았느냐. 제 침소로 가 금이나 연습하라고. 이런 일들은 빨리 해결할수록 좋다.”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그보다 저 기생은 결국 뭡니까? 저것도 독초를 잘못 사용한 것입니까?”

 

 

 제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 장면들이 너무나도 빨리 지나갔다. 준호는 단매를 짊어진 범신이 문을 열려다 말고 흘끗 저를 바라보자 그 때를 놓치지 않고 그 앞으로 다가서 문을 막는다.

 

 

 “설명해주십시오. 설명하시기 전에는 못 보내드립니다. 제게 저 여인은 사건과 관계된 중요한 용의자입니다.”

 “, . 형조의 망나니, 애기씨, 둘 다 어찌 생긴 별칭인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구나. 급하다, 아가. 비키거라.”

 

 

 범신은 굳이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은지 다른 편 손에 든 부채로 가로막고 선 준호의 팔을 툭툭 치지만 범신의 말마따나 그 별칭들이 괜히 생긴 것은 아니었다. 한 치도 흘러내리지 않는 명징한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굳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명 전에는 못 보내드립니다. 이리 두 눈 똑바로 뜨고 중요 관계자를 놓칠 순 없습니다.”

 “비키래두.”

 “안 됩니다.”

 

 

 실랑이가 몇 번 벌어지나 했더니 결국 두 손을 든 것은 범신이었다. 제 어깨 위에서 축 늘어져 꼼짝도 못하는 단매를 곁눈으로 흘끗 보더니 느릿하게 귀찮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겠다. 설명할 테니 이 집 기생 어미 좀 불러다오.”

 

 

 기생이라 할지언정 이 한양에서도 손에 꼽는 이 자명루의 기생들을 책임지는 기생 어멈이었다. 얼핏 보아도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 이 자명루의 주인, 채련은 금으로 새긴 연꽃과 새 등 화려한 비녀를 여러 개 꽂은 가채를 무겁게 틀어 올린 채로 나타나선 범신의 어깨에 엎어진 단매를 쳐다본다. 그 눈에 뜨악한 빛이 서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연륜이라 해야 할지, 금세 표정을 다잡고 먼저 모란 봉오리 모양을 새긴 은비녀를 뽑아내어 정신을 못 차리는 단매의 입술을 훑어낸다.

 

 

 “-거 의심이 심하구만. 독 같은 거 먹인 적 없수다.”

 

 

 짐짓 기분 나쁜 척 말하지만 그 표정에는 여유로움이 풍겨온다. 채련 또한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범신을 향해 말을 잇는다.

 

 

 “용서하세요, 동지사 영감. 요새 워낙 이 아이를 찾는 분들이 많다 보니.”

 

 

 통성명을 하지도 않았건만 이미 범신의 직위까지 알고 있었다. 범신 역시 얕잡아볼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면서도 예상했던 반응에 입가에 떠오르는 쓴웃음을 굳이 지우지는 않았다.

 

 

 “은에도 반응하지 않는 걸 보니 무얼 잘 못 먹인 것 같지는 않고, 대체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르신.”

 

 

 확인을 끝낸 은비녀를 제 고름에 얽어매며 범신을 쳐다본다. 여전히 웃음기가 서려 있지만 그 눈매 끝에 서릿발 같은 냉엄함은 마모되지 않은 날것이었다. 노려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호의적이라고도 볼 수 없는 채련에게 범신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연다.

 

 

 “나 또한 뭐라 설명할 말이 없구만. 가야금 솜씨 때문에 몇 마디 하였다고 제풀에 발끈하지 않겠나? 급작스레 홧병이 올라 쓰러졌다고 할 수밖에는. , 이 형조에서 나온 핏덩이 생각은 조금 다르지 싶다마는.”

 

 

 자신에게 쏠리는 시선에 준호가 급하게 고개를 숙이지만 채련의 시선이 떨어질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호하게 제게 답변을 요구하는 그 태도에 결국 준호는 목덜미를 조금 긁다가 결심이라도 한 듯 채련과 눈을 맞춘다.

 

 

 “실은 사건 서간을 보고, 형조에서 나온 참일세. 나는 형조정랑으로, ,”

 

 

 제 이름을 소개하려던 순간 범신이 제 몸처럼 지니고 다니던 부채를 펼쳤다. 사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에 대한 방지책이라고 여긴 준호는 말없는 제지에 보일 듯 말 듯 고갯짓을 하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최근 이 단매라는 기생과 관련된 여러 사건과 소문이 신경 쓰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데, 실제로 보니 아무래도 좀 더 조사할 필요가 있어 보여 이리 실례를 범하게 되었네.”

 “조사라면 얼마든지 하셔도 좋습니다만, 이렇게 아이를 괴롭히는 행동은 저희로써도 곤란합니다.”

 “, 아니, 그런데 정말 우리는 아, 무런...”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고 하면야 거짓이지만, 그렇다고 콩 한 줌 무게쯤 되는 목걸이 하나 걸었다는 사실이 그리 크게 잘못이라고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결국 점잔 빼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는 범신에게 동조하여 말하는 수밖에는.

 

 

 “믿기지 않겠지만 실로 정말일세. 저기 계신 동지사 어른께서 금 타는 실력에 몇 마디 말을 덧붙였더니 그세 바르르해서는 이렇게 맥을 못 추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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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기, 단매. 귀하신 두 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화려하게 퍼져 자수가 들어간 자색 치마 위에 얇게 은사를 먹인 듯한 반투명한 치마를 한 겹 더 덧두르고, 홍색과 감색이 섞인 좁은 반회장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단매는 들은 대로 그리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아니었다. 다만 주막에서 들었던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었는지, 곱게 눈웃음으로 휜 눈은 크지도 않을뿐더러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홍채를 지니고 있었다. 얄쌍하여 보호 본능을 자극하게 하는 하얗고 몸집이 가는 기생. 조금 안심하여 낮게 숨을 쉰 준호는 슬쩍 범신의 눈치를 보았고, 범신 또한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나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매라 하였던가. 네 기명이 육조대로 건너 운종가에까지 자자하더구나. 어디 네 솜씨 한 번 들어나 보자꾸나.”

 

 

 들고 있던 가야금을 보며 말하자 단매는 다시 한 번 더 눈을 초승달로 만들더니 자색 치마를 정리해 자리를 잡는다 .

 

 

 “그리 칭찬해주시니 송구합니다. 곡은 제게 맡겨주시는 것인지요.”

 “그리해 보거라. 네 노래가 술맛을 돋우는지, 아니면 버리는지 확인이나 해보마.”

 

 

 그리고는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잔에 넘치도록 술을 붓는다. 부러 거친 말과 행동으로 망나니 행세를 잘하는 범신에게 저도 모르게 풋, 웃어버린 준호는 근본을 모를 악취에 콧잔등을 찡그리면서도 또한 술잔을 쥐었다. 범신의 무례한 태도에 잠깐 손을 거두려던 단매는 이내 생글 생글 미소를 지으며 연주를 시작한다.

 

 

 “, -, 동지사 어른,”

 “편하게 아저씨라 불러도 된다, 아가.”

 “-그럼 아저씨. 저 이가 특별히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디서 계속 냄새가 나질 않습니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사람이지. 너도 느꼈느냐.”

 “. 저 아가씨가 들어온 이후인 것 같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냄새가. -혹여나 저 기생이 쓰는 독초 같은 것은 아닐지.”

 

 

 분명 단매가 들어올 때 향낭이라도 매었는지 아주 진하면서도 독한 향이 났고, 그에 섞여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악취도 겹쳐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도 저와 비슷하게 악취를 느꼈다는 것을 확인한 범신은 별안간 벽을 향해 마시던 술을 흩뿌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야금을 타던 단매가 손을 멈춘다.

 

 

 “그만두거라. 그리 비싼 술도 아니건만 네 금 타는 소리에 술 맛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고얀. 일어 나거라, 아가.”

 

 

 뒤엣 말은 준호를 향한 것으로 이미 저는 항시 들고 다니던 동백선을 손에 쥔 채 몸을 일으키고 있다. 여전히 가야금 줄을 놓지 않고서 안족을 향해 시선을 내꽂던 단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뱉는다.

 

 

 “아무리 이년의 배움이 짧다 한들, 술맛을 버릴 정도는 아니라 사료되었습니다만.”

 “계집이 말이 많구나. 우리가 아니라 하면 아닌 것이지 무에 그리 말이 많느냐.”

 “허나 두어 가락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듣지 않은 걸로도 네 실력이 미천함을 알겠다. 어흠, 나가서 귀도 한 번 다시 청소해야겠구나.”

 

 

 그제야 고개를 든 단매에게 준호가 숨을 삼킨다. 쌍꺼풀이 없어 얇은 눈 안에 마치 사각형처럼 홍채가 가로로 벌어진다. 짐승을 연상시키는 눈에 준호가 움찔, 뒤로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범신이 씩 웃는다.

 

 

 “오라, 드디어 네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요망한 것아.”

 “말씀을 먼저 심하게 한 것이 뉘신데 그러시는지요.”

 

 

 손가락으로 가볍게 농현한 줄만으로 알았는데 팍, 하고, 겹겹이 꼬였던 선이 터져버린다. 저 가는 몸에서 어찌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은 통에 범신은 오히려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다가선다.

 

 

 “네 실력이 그밖에 안 되는 것을 내 어찌 거짓을 말하랴. 오늘부터는 침소에서 나오지 말고 금이나 연습하거라.”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무심코 눈을 돌린 단매는 범신의 소맷자락을 보고, 정확히는 그 손에 감긴 묵주를 보고 몸을 떤다. 그 떨림에 담긴 것은 명백한 공포와 분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구슬더미를 왜 저리 두려워하는지 알 턱이 없는 준호는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기류 속에서 잠깐 제 손목 속 묵주를 쥔다.

 

 

 “, 순순히 이리 오너라. 너 정도 충분히 묶을 실력이 되느니.”

 

 

 원래도 몸집이 작다 할 수는 없는 이였다. 그런 그가, 작정을 하고 다가서니 호롱불빛에 비친 그림자까지 겹쳐 위압감에 숨조차 막혀왔다. 박력에 밀려 꼼짝도 하지 못하던 단매가 이를 악물고 범신 앞에 버티고 선다. 긴박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항시 몸에 지니고는 있으나 정확히 어떠한 용도인 줄 몰랐던 그 묵주를 손에 꿴 채 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 외람되지만 묶기에는 좀 짧지 않겠습니까.”

 

 

 방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듣자 저도 모르게 범신의 기운이 사그라진 찰나, 단매가 그 소맷자락 옆으로 몸을 틀어본다. 그러나 엉겁결에 묵주를 꿰어 든 준호의 손이 단매의 손목을 부여잡고, 단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가, 핏덩이인 줄 알았더니 용케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자연스레 준호의 손에서 묵주를 빼어내, 무릎을 꿇은 단매의 목에 걸어주며 빙긋 웃어 보인다. 그와는 정 반대로, 단매는 목에 묵주가 걸리자마자 마치 칼이라도 진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움직이지 못한다. 괴로워 보이는 숨소리에 준호가 눈썹을 찡그리고 범신을 쳐다보았지만 그 시선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단매를 번쩍 안아 제 한쪽 어깨에 걸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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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그랗게 뜬 눈에 가늘게 찢긴 틈을 닮은 초승달이 상처를 냈다. 망울지는 달빛은 홍채에 금을 내고도 파문을 일으키는 학교 뒤편의 연못으로 조용히 떠올랐다. 그러나 그 달보다 눈부시고 황홀한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 ..., 이야...?”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린 말을 깨달을 새도 없이 첨벙 소리를 내며 그것의 꼬리가 흔들리며 매끈한 수면을 자잘하게 부서뜨렸다. 깨어진 달빛을 꿰어낼 틈도 없이 물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연못가에 선 소녀를 바라보는 눈에는 숨길 수 없는 호기심이 역력하게 드러나 싶더니 무서우리만큼 새빨간 입술이 초승달을 삼켰다. 그 미소에 소녀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조차 버거워 이내 털썩 주저앉아 버렸고, 그 서슬에 소녀가 출입금지인 장소에까지 일부러 들어가게끔 만든 지갑이 연못 가장자리로 빗겨져 나갔다.

 

 

 “......”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이 검정 바탕에 리본이 달린 가죽 지갑을 톡, 하고 건드렸다. 지갑의 표면에서 물방울이 퍼져나갔다. 가벼운 패닉 상태에 빠진 소녀는 그것의 손가락이 자기의 지갑을 건드리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제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은 흙 끌리는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것은 소녀가 느끼는 공포를 아는지 모르는지 소녀의 지갑을 두어 번 건드리다 말고 손가락을 튕겼다. 쭉 밀려나간 지갑은 주저앉은 소녀의 발끝을 건드리며 멈추었다. 떨리는 손을 내밀어 자신의 지갑을 움켜쥔 소녀는 그것이 혹여나 튀어 올라 저를 덮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눈도 깜박거리지 못하며 그저 몸만 뒤로 밀어내다가, 이내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초승달이 등을 덮는 그 길을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가던 소녀는 아파트 입구에 도달해서야 겨우 숨을 골라 내쉬고는 눈을 깜박거렸다. 손에 쥔 지갑에는 물방울 모양의 얼룩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말을 하지는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어젯밤의 일이 그저 몸서리 쳐질 정도로 생생한 꿈인 것만 같았다. 다만 제가 어제 들렀던 교내 연못이 제가 학교를 다니는 삼 년 내내 출입금지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라, 지나가듯 앞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운을 띄웠다.

 

 

 “명지야, 저기, 우리 학교 동관 뒤에 있는 연못 있잖아. 거기 왜 폐쇄됐지?”

 “거기? 출입금지 된 지 엄청 오래 되지 않았어? 어차피 갈 일도 없는데 왜?”

 “아니, 생각해보니까 우리 입학할 때부터 쭉 그랬었잖아. 근데 뭐 공사하는 것도 아니고.”

 “동관 뒤에 있는 연못? 거기 엄청 음침하잖아. 우리 언니 때부터 계속 출입금지였다던데? 언니 말로는 옛날에 연합고사 잘못 친 고 3이 거기 빠져죽었다나 어쨌다나. 뭐 흔한 학교 전설인 거 같던데. 실제로 팻말만 그렇지 야자 튀는 애들 종종 그 쪽 담벼락으로 도망친다더라. , 유영이 너도 거기로 튈 생각이구나?”

 

 

 두 사람의 대화에 지나가던 친구가 장난스레 끼어들면서 이야기는 금세 실체를 얻어 평소 생활로 끌려 들어온다. 출입금지라고 적힌 낡은 팻말은 있으나마나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일 테고, 실상은 오늘 저녁에도 누구든지 다닐 수 있는, 현실 속에 온전히 발을 디딘 공간. 유영은 그제야 겨우 온기 있는 미소를 띠며 친구의 대답에 맞장구를 친다.

 

 

 “그러게. 오늘 그쪽으로 튀어서 노래방에나 가야겠다.”

 “, 너 그러다 담임한테 걸리면 병풍 뒤에서 향 냄새 맡아. 너한테 온 학교가 쩔쩔매는 거 빤히 알잖냐.”

 “유영아, 너 이따가 음악 샘이 너한테 교무실에 좀 와달래!"

 “너 벌써 들킨 거 아니냐?”

 

 

 풋풋한 아이들의 생기발랄한 웃음소리가 교실 너머 흘겨 들어온 바람에 실려 나간다. 유영은 제 손이 교복 주머니 속에 넣어둔 지갑을 꼭 쥐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어제의 일은 훌훌 털어버리고 오늘 석식 메뉴가 무엇인지 친구들과 잡담을 나누기에 바빴다.

 

 

 “, 진짜. 쌤은 만날 나한테만 뭐라 그래. , 너무 늦었잖아.”

 

 

 투덜거리며 터벅거리는 걸음이 점차 느려진다. 목덜미에서 단정하게 자른 머리카락을 넘기는 바람이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다. 커다란 세일러 카라를 펄럭거리게 하는 바람은 학교의 동관 뒤편에서 불어오는 듯 했다. 기분 탓일지는 몰라도 아주 가느다란 소리 같은 것, 휘파람 소리를 닮기도 하고 피리 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한 얇은 이명이 희미하게 귓가에 감겨왔다. 유영은 아침부터 줄곧 제가 검정 리본을 단 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음을 지금에야 깨닫고 흠칫 어깨를 떤다. 평소에는 학원을 가느라 야간 자율 학습은 거의 빠지는데, 최근 기말 고사가 다가와 야자를 하기 시작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라고 할까. 전국 규모 콩쿠르에서 여러 차례 큼지막한 수상 경력도 있는 유영이었기에 학교에서는 성적 또한 나쁘지 않은 유영을 명문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꽤 신경을 써주고 있는 상태였다. 물론 유영이 딱히 바란 바는 아니었지만.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은 유영은 지갑에서 손을 떼었을 때 문득 깨달았다.

 

 

 -이명이 아니었다. 유영의 귀는 음악을 전공하는 만큼 소리를 포착하기에 민감한 귀였고,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유영은 저도 모르게 불 꺼진 동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평소 공포 영화를 즐겨보는 유영은 항상 혼자서 위험한 공간으로 가는 조연들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막상 제게 그 상황이 닥치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혹은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은 낡은 출입금지팻말이 적힌 그 앞에서였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유영은 이제 그 소리가 어떤 것인지 안다. 어두운 밤이면 특히나 심연을 닮아 더욱 검게 빛나는 수면을, ‘그것의 꼬리가 튕겨내고 있는 소리일 터였다. 7월 초, 한창 더운 여름이 시작될 무렵 팔뚝 위쪽부터 목까지 오스스 돋아오는 소름은 분명 날씨나 기온 때문은 아니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소리에 겹쳐 더욱 더 선명해지는 소리는 노랫소리였다. 가사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선율과 리듬을 가진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아름다워, 유영은 홀린 듯 비척거리는 제 걸음을 도저히 제지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그것이 저를 기다리며 유유히 웃고 있음을 빤히 알고 있으면서도.

 

 

 커다란 지느러미가 홍채를 도려내듯 가득 채웠다. 달빛이나 별빛 같은 것, 혹은 오로라를 닮은 빛들을 여러 조각씩 섬세하게 직조한 레이스를 이어 붙인 듯 아름다운 꼬리였으나, 그 크기가 상어만하다면 아름다움보다 먼저 공포감이 밀려온다는 것을 유영은 태어나 처음 경험하였다. 저절로 무릎이 떨려오며 힘이 빠져나갔지만 어제보다는 덜했다. ‘그것은 유영이 제 꼬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면서도 여전히 꼬리지느러미로 수면 위를 느릿하게 튕기는 것을 그만두지 않고서 아름다운 눈으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유영에게 노래를 불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유영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지는 않는 듯 했다. 오히려 어제와 달리 가까워지는 유영이 기쁜 듯 둥근 눈에는 즐거운 기색마저 떠오르고 있었다.

 

 

 “...너는, 인어, , 맞지...?”

 

 

 유영에게 보이는 것은 인간과 같은 상체와, 느릿하게 움직이는 거대한 꼬리지느러미뿐이었다. 꼬리지느러미와 상체가 이어져있는 허리는 물에 잠겨 있어 보이지 않은 탓에 묻게 된 멍청한 질문이었지만, 인어는 노래를 그치지 않고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었다. 어제는 너무 놀라 몰랐지만, 단정한 외모를 가진 인어의 눈에서는 유영을 향한 막연한 호감이 드러나 있었다. 여전히 놀랍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었지만 어제에 비해 꽤 이성을 찾은 유영은 인어에게서 거리를 둔 채 오래 된 벤치에 걸터앉았다. 꼬리지느러미를 제외하고 움직이지 않는 인어는 그저 하염없이, 가사는 결코 알 수 없지만 부드러우면서도 상냥한 노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저기, 너는 내 말을 알아들어?”

 

 

 당장이라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학교 측에 알려 연못 속의 괴 생명체를 없애거나, 적어도 멀리 보내버리는 것이 이성적인 흐름이었겠지만 유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마도 학교 측에서는 이미 이 인어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여기에 사는 것을 묵인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라고, 유영은 재빨리 캐치해낸 것이다. 그리고 친구들 말마따나 학교 동관 뒤편은 말만 출입금지 상태일 뿐, 담배를 피려는 학생들이나 야자를 도망치는 자들에게는 최적의 장소임이 이미 널려 알려져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단 한 번도 인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음을 보았을 때, 유영이 다른 사람들과 연못에 갔을 때에는 인어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인어는 오직 유영에게만 제 존재를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유영은 결국 이해와 이성을 포기하고 조각과도 닮은, 신화 속의 존재를 만나기 위해 자주 동관 뒤편의 연못을 찾아갔다.

 

 

 며칠 간 인어를 관찰해본 결과 그녀는 유영의 말은 알아듣지만 유영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그리고 유영에게 호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결코 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보이며, 유영 외의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것 같았다. 실제로 동관은 뒤편만 폐쇄되어 있을 뿐이라 복도에서 내다보면 그녀가 지내는 연못이 빤히 보이는데, 그 누구도 쓸쓸하게 폐쇄된 공간의 연못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로 좋았다.

 

 

 정말 말도 안 되는 결론이었지만 유영은 어느 순간 인정해버렸다. 그저 그녀의 곁에 있으면 편안했고, 그녀의 노래를 들으면 행복해졌다. 시간이 지나고 날이 변하면서 유영은 그녀의 물갈퀴 달린 손가락을 만질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노래를 듣곤 했다. 가끔은 달빛에 반사되어 구슬 흐르듯이 흔들리는 그녀의 꼬리지느러미를 손가락으로 훑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 그녀는 노래를 잠깐 멈추고 휘파람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동그랗게 나이테를 닮은 비늘은 매끄럽고도 또한 그녀의 온기를 지녀 따뜻해, 유영은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쓸어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녀는 어쩐지 조금 쓸쓸해 보이는 눈으로 유영의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다시 끊겼던 노래를 불러주었다.

 

 

 “너를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인어, 라고만 부르기에는 너무, 평범하지 않아?”

 

 

 철벅, 커다랗게 지느러미가 튀는 바람에 유영은 깜짝 놀라 숨을 멈추었다. 저 커다란 지느러미에 한 번이라도 맞으면 가벼운 상처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그 당연한 생각이 지금에서야 스친 탓이었다. 굳어버린 유영의 반응에 당황한 인어는 미안하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지만 기쁜 기색은 숨기지 못했다. 마치 말을 알아듣는 동물과도 같은 반응에 유영은 그제야 겨우 숨을 내쉬고 옆에 있던 돌멩이를 들어 물고기 모양을 바닥에 그렸다.

 

 

 “, 물고기, 비늘이니까, 어린...? , 어린이라니, 이상하다.”

 

 

 손가락이 닿았다. 흠칫 놀란 유영을 바라보는 눈은 한없이 맑고 고요해서 유영은 말없이 제가 들고 있던 돌멩이를 건네주었다. 차가운 물에 오래 있었을 손가락이지만 유영에게 닿았던 그 손가락은 여전히 온기가 서려 있어, 유영은 조금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돌멩이로 그려내는 형태를 오래 바라보았다.

 

 

 “..., 영원... 영원?”

 

 

 유영이 느릿하게 그녀가 써낸 문자를 읽어내자 차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맑은 구슬 같은 것들이 부딪치는 소리. 유영은 나중에서야 그것이 영원의 꼬리지느러미에 달린 비늘들이 부딪치는 소리임을 알았지만, 당시에는 영원이 글자를 쓸 줄 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 글씨 쓸 줄을 알고 있었어?”

 

 

 말투가 이상해진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유영의 물음에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둥근 눈을 한 번 더 동그랗게 뜨나 싶더니 이내 방울 소리를 닮아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제가 쓴 글자를 느릿하게 손가락으로 한 번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유영이 영문 모를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자 두 어 번 그 행동을 반복했다. 유영은 이내 그 뜻을 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글자만 쓸 줄 안다는 뜻이야?”

 

 

 유영이 그제야 제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자 으레 그랬듯 순진한 표정 위로 박담한 그리움이 번지다 물크러졌다. 유영은 문득 영원의 표정에 가슴 한가운데가 아파오는 느낌에 찡그린 미소만 지어보이다 평소보다 일찍 몸을 일으켰다. 처음으로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잊지 않고서.

 

 

 영원은 투명하게 쌓이는 듯 했으나 깊은 해저를 닮아 있었다. 투명한 물이 쌓이고 쌓여 이윽고 보이지 않는 해저를 만드는 모순처럼, 청아하게 울리는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나 말은 할 줄 모르며, 제 이름은 쓸 줄 아나 문자를 모르며, 또한 유영을 좋아하나 영원을 사랑하게 된 유영은 몰랐다. 어느 샌가 자신의 삶에 물들어 지워낼 수 없게 된 영원 곁에서 유영은 달빛에 되튀는 비늘을 쓰다듬으며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누군가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이 그토록 달고 그리우며, 또한 고통스럽다는 것을 유영은 처음으로 가슴이 시리도록 깨닫고 있었다.

 

 

 제 노래에 가만히 귀 기울이며 소리도 없이 제 비늘을 곤두세우는 영원을 볼 때면 가끔 까닭 모를 눈물이 났다. 고요하게 뺨으로 엮어 내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노래를 부르는 유영에게 영원은 물갈퀴가 달린 손가락을 뻗어 그 눈물을 단아하게 닦아내었다. 보석이 되지 못하는 유영의 눈물을 그토록 소중하고 정결하게 닦아내는 영원에게 결국 그 온기 서린 목덜미에 입술을 묻어버렸다.

 

 

 “영원, 내 영원. , 영원이 되어 주세요, 영원아.”

 

 

 말이 되지 않는 말임을 알면서 지껄였다. 입 밖으로 내어버린, 금지되었던 언어들은 날것의 흉기가 되어 무수히도 제 귀와 달빛에게 날카로운 생채기를 내었지만 유영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도 못했다. 빨갛게 꽃받침이 되어버린 입술 너머에서 잔혹한 언어들이 제멋대로 꽃을 피워냈다.

 

 

 “모르겠어요, 영원, 영원아. 그냥, 너를 보면 내 심장이 뛰어요. 너를 보면 너무 행복하고, 너무너무 행복해서 가슴이 아파요.”

 

 

 누워서 눈을 감으면 네 생각이 났다. 눈꺼풀에 휘감긴 어둠을 모조리 채우는 것은 너의 둥근 눈이거나 혹은, 청명하게 울리는 네 노랫소리 같은 것이었다. 너만 떠올리면 심장이 너무 뛰어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내일이 얼른 와, 모두가 학교를 떠난 밤이 재게 달려와 너를 만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가만히 토해내는 숨결 속에 쿵, -,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귓속을 가득 채웠다. 아슬하게 새벽녘에나 잠이 들면, 이번에는 너의 목소리를 듣는 꿈을 꾸었다. 너의 노랫소리에 잠을 깨어선 온종일 너만 생각했다. 너로만 가득 찬 나였다.

 

 

 네가 아니면 안 되는 순간들이었다.

 

 

 그래, 그랬다. 영원아. 네가 차라리 독이라고, 내 숨통과 목숨을 모조리 손아귀에 움켜쥔 독이라고, 그리고 그 독이 너여서 나는,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눈물과 오열이 뒤섞인 고백이었고, 찰나의 독을 품은 자백이었다. 뿌리를 알 수 없는 비탄과 노여움에 젖어 유영은 아주 자연스러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젖은 영원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그 순간들이 너무도 익숙한 마냥 영원은 제게 입을 맞추어놓고 정신을 잃은 유영을 가지런히 눕혀준다. 연못에서 그리 멀리 떨어질 수는 없지만 머리카락을 가다듬어주고 옷을 정리하고, 그리고 그 위에는 영원이 흘리는 금강석들이 빛을 머금은 물고기들처럼 유영의 주변을 헤엄친다. 다시 한 번 더, 또 다시 한 번 더, 셀 수 없을 만큼 무수히 유영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뺨을 어루만진다.

 

 

 -그렇게,

 다시

 또.

 

 

 -느릿하게 시간이 휘감겼다. 둥근 영원의 눈가에서 투명한 눈물이 굳더니 빛나는 금강석이 되어 연못 주변에 떨어졌다.

 

 

 너는 또, 나를 잊어버리고, 유영아.

 이리도 나를 사랑한다 해놓고, 금시로 나를 잊어버리는 너인데도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지.

 

 

 -차라리 나를, 죽여주련?

 

 

 나에게 이름을 주고, 노래를 불러주고, 멋대로 사랑한다 말해놓고, 이리도 너를 사랑하게 만들어놓고. 네 마음대로 나에게 입을 맞출 때마다 그 모든 순간을 영원히 잊어버리는 너를 나는, 어쩌면 좋을까. 투명하던 금강석에 붉은 선이 아로새겨졌다. 어느 새 영원의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원은 처음으로, 천천히, 유영의 몸을 안아 연못 속 제 꼬리 위에 얹혀놓는다. 윤슬에 흔들리는 유영의 머리카락이 여아하게도 수영한다. 홀린 것처럼 그런 유영의 모습을 바라보던 영원은 그 입술에 다시 제 입술을 맞추며, 깊이, 깊이 그대로 연못의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래, 유영. 헤엄치는 나의 영원. 도저히 붙잡을 수 없는 영원아.

 그렇다면 우리, 서로에게 독이 되어줄까.

 삼키고 녹고 끝내는 엉켜버려, 서로가 서로를 죽음에 이르는 줄도 모르게,

 누가 누구의 독인 줄도 모르게 그저 그렇게, 독이 될까.

 그렇게 할까, 우리,

 영원히.

 

---사담

인어의 입맞춤은 모든 기억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이야기에 흥미를 얻고 써본 이야기입니다

독에 관한 단상은 옴니버스 식 구성으로

독과 여성,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엮어서 쓰고 싶은 큰 모티프가 되겠네요.

2차 창작이었던 십이국기의 '독' 또한 이 독에 관한 단상과 관련한 이야기랍니다.

재밌게 즐겨주세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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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하시는 겁니까. 그거 다, 제가 정리해놔야 하는 건,”

 “이 사건은 노비가 앙심을 품고 제 주인을 내건 사건이구만. 노비에게, 허위로 사건을 만들었을 경우 경국대전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일러주거라. 금세 자백할 것이다.”

 “...?”

 “또한 이러한 사건은, 경신년에 일러 말씀하시기를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사건의 피의자와 직접 대질시켜서는 아니 된다 하셨으니, 필히 도와줄 다모가 필요할 걸세. 이날엔 아마 연지가 당번인 날일 테니, 일러놓도록 하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도 않았지만 척척, 사건을 정리하여 곁에 있던 무심에게 자연스럽게 넘긴다. 준호가 끙끙 싸매던 삼분지 일의 시간으로 반 이상 서간을 정리한 범신은 허리를 쭉 한 번 펴나 싶더니 그대로 접선을 준호의 턱으로 갖다 대어 눈을 맞춘다.

 

 

 “, 이제는 이 일 안 하는 동지사와 함께 갈 수 있겠느냐, 아가.”

 

 

 시간 맞춰 동시에 형조의 문턱을 넘은 두 사람은 행여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름을 날리는 기생일수록 부르기가 어렵다 하더니, 최근 단매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조차 겨우 잡았다는 말을 하는 범신의 뺨에는 드물게 홍조가 올라있었다.

 

 

 “, . 민망하더구만.”

 “-아니, 가보아도 몇 십 번을 혼자 가보았을 것 같은 양반이 무슨 소리십니까.”

 “나를 그리 보았더냐.”

 

 

 걷다 말고 살짝 미소를 띤 채 준호를 돌아다본다. 당연스레 말을 이어나가던 준호는 저를 바라보는 범신에게 눈이 동그래져 걷는 것조차 잊고 빤히 쳐다본다. 모르긴 몰라도 주워듣는 도중에 선월이라는 기생과는 정을 통한 사이라고 이미 육조 내에서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기생집에 가는 것을 꺼려하다니.

 

 

 “허허, 그랬던 모양이구만.”

 “, 아니... , 선월, 이라는 기생을...”

 “네가 그를 알더냐?”

 

 

 그저 지나가듯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잇자 의외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잠깐 껄껄거리며 호탕한 웃음을 낸 범신은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내 명나라 다녀오는 길에 주워온 아이다. 어린 아이가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영영 조선으로 못 돌아올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에 데리고는 왔다만, 그 아이가 형조 내에서도 이름이 날 정도로 컸다는 말이지.”

 

 

 이쯤 되면 정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키워준 보호자로서의 마음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저에게 이런 헛소문을 흘린 형조 사람들에게 남몰래 이를 갈며 준호는 어설프게 맞장구를 칠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선월에 대한 이야기로 긴장이 풀린 것인지, 자명루에 도달해서 범신은 연륜이 느껴지는 몸짓과 목소리로 자리를 안내 받았다.

 

 

 “이야, 이거. 적응 안 되는구만. 나 같은 사람한테는 그저 접때 갔던 주막이 최곤데 말이야.”

 

 

 낮은 목소리로 옆에 얼어붙어 앉은 준호에게 귓속말 같은 농담을 건네며 킬킬댄다.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이렇게 화려한 곳이 낯설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매번 저를 데리고 갔던 곳이 본인이 말한 주막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준호는 범신을 따라 젓가락을 들었다. 호화찬란한 만찬도 만찬이었지만, 이제 나올 단매라는 기생이 진실로 법을 어긴 자인지 확인하려면 먼저 배를 채워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아가, 마음은 알겠다만 오늘은 무엇도 하지 말아야 헌다. 확인이 우선이다, 우선이야. 괜한 생사람 잡을라 걱정이 되는구나.”

 “누굴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로 아십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입으로 들어간 맛나고 기름진 찬들의 맛이 도무지 느껴지질 않는다. 높으신 분들이 오신다 하여 꾸미느라 좀 늦는다 하는 급사의 말도 들어오지 않고, 준호는 전날 밤 책에서 보았던 다양한 약의 증상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다시금 곱씹었다. 확인만 된다면야 내일 아침에라도 곧장 형조에 아뢰어 단매의 방을 확인해보아야 할 터였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날카롭게 구는 준호에게 범신은 조금 눈살을 찌푸리나 싶더니 술잔을 홀로 따랐고, 그와 동시에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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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를 죽이는 건 나, 나여야지,

 -나의 어여쁜 독.

 

 귓가에 닿아오는 투명한 햇살 같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한없이 잔혹하고도 지독한 저주를 담은 언어들이었다. 뒤이은 사물들에게 슬픔을 빚진 목소리는 말이 끝나고도 한동안, 어렴풋한 자취를 남기며 공기 속으로 위태하게 흐려져 갔다. 느릿하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호우린은 엷다 못해 은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미로(明露).”

 

 

 체온보다 조금 높게 느껴지는 온기가 제 어깨를 가다듬어 호우린은 움찔, 커다란 눈을 들었다. 마주친 눈동자는 얼어붙은 북해보다 채도가 낮은 은회색. 제 머리카락과 견주었을 때에도 색이 옅은 긴 눈에 호우린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춘다. 이를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잠깐 시선을 멈춘 여인은 씁쓸한 미소를 야윈 뺨에 밀어내었다 거두며 호우린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미안, 일 보느라 바빴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신 것을요.”

 

 

 삼켜낸 기침 뒤로 나지막한 울림이 목 안에서 되튄다. 걱정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린 여인은 옆에 선 여사의 손에서 따뜻한 차를 빼앗듯 들어 호우린의 작은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춥지는 않아?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고?”

 “아닙니다,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세리(世理).”

 

 

 그러나 멈춰지지 않는 기침이 거세지며 어깨가 들썩거리고, 깎은 듯 단정하던 호우린의 이마가 괴로운 듯 좁혀지자 세리라 불린 여인은 가냘프고 여린 손 위에 있던 찻잔을 쳐내듯 내던지며 그 등을 끌어안는다. 종이 치듯 맑은 소리로 깨어진 찻잔 안에서 말간 붉은 색이 바닥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미로, 괜찮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야.”

 

 

 제 눈과는 달리 밤보다도 새카맣게 여울지는 머리카락이 호우린의 창백한 뺨으로 걸쳐진다. 처음 저를 만났을 때, 달빛보다 맑게 비추는 금발과 청안이라고 감탄하며 세리가 지어준 자()였다. 왕을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모르고 그저 하염없이 울던 그 순간이, 지금은 떠올리기조차 힘든 과거처럼 느끼는 스스로에게 느릿한 혐오를 가지면서 호우린은 잠깐 눈을 감았다.

 

 

 “길을 잃은 게 아니야. 미로를 아프게 하지 않을게. 나를 믿고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나의 이슬아.”

 

 

 끝말은 울음에 가까웠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베어 죽일 듯 날카로운 눈매에, 약소한 지방 호족 출신으로 당당하게 봉산했던 그 호기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어깨였다.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마른 손을 뻗어 안아본 그 등은 의복 너머 척추가 느껴질 정도로 여위어, 호우린은 고개를 들어 세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리, 밥을, 먹지 않아요?”

 “미로.”

 “먹어야 돼요. 그래야, 그래야 힘을 내서 일을 하죠.”

 

 

 울지는 않았지만 젖은 눈매였다. 쌍꺼풀이 없어 일견 온순해 보이지만 양 끝으로 길게 뻗은 눈매와 그 눈매를 촘촘히도 둘러싼 속눈썹은 회청색이 도는 눈동자 사이에 깊은 경계를 이루며 보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힘이 있었다. 칼날을 닮아 위태로우면서도 예리한 눈매로 한동안 호우린을 바라보던 세리는 졌다는 듯 물기 없는 미소를 띤 채 몸을 일으켰다.

 

 

 “나의 미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용기가 안 나네. 대신, 나와 같이 식사는 해주겠지?”

 

 

 궁을 나서자 싸늘하다 못해 베어낸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내쉬는 숨결조차 보석으로 만들어버리는 냉기에 저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세리가 단단히 지탱해준다. 제가 지닌 색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여린 기린을 보는 눈썹이 자애롭기 그지없다. 마른 입술 위를 거칠게 흩어 놓는 동풍을 억지로 밀어내며 호우린은 세리를 올려다본다.

 

 

 1365일 차디찬 기운이 가시질 않는 방극국에 어울린다는 말도 우습지만, 하얗고 신경질적인 턱 선은 백색으로 어리는 겨울의 풍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짙은 묵색으로 허공을 수놓는 긴 머리카락과, 북극해를 닮아 차가운 청색을 담은 잿빛 눈까지, 말 그대로 세리는 동장군(冬將軍)을 사람으로 옮겨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한없이 강인하면서도 차가운 미로의 주상. 그녀를 볼 때면 언제부터인가 등에서부터 목덜미까지, 한 줄기 전율이 가없이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춥지, 미로? 미안해. 폭설이 내린 후주 지방에 지원을 보내느라 궁들을 많이 닫아 놓았거든. 조금만 참아줘, 금세 도착할 테니까.”

 

 

 그런 만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 안을 길쭉하게 벼혀내듯 밀어닥치는 기침을 애써 참았지만 호우린의 병은 분명 실도(失道)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로불사에 가까운 호우린이 이리 괴로워하며 심신의 고통을 호소할 리 없었다. 그러나 호우린의 눈에 비친 세리, 즉 방극국의 왕은 여전히 백성을 위하고 있었으며, 호우린을 자애로 보살피며, 하늘의 뜻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호우린은 결국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제 어깨를 품어주는 세리에게 기대어 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상.”

 “-.”

 

 

 말없이 올려다보는 서늘한 시선에 일순 언어를 잊었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건만 불쑥 불쑥 밀어닥치는 저 겨울 색 안정에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여사 메이시는 할 말이 있으면 이어 말하라는 듯한 세리의 눈에서 도망치듯 눈을 내리깔며 들고 온 두루마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엔 어디에서 올라온 상소지?”

 “복주입니다.”

 “, 어라? 정추산 옥천이 벌써 마를 시기던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었다. 실정하고 있던 조정에서조차 유명세를 날리지 못하던 한낱 약소 지방 출신의 여장군이라고만 했다. 봉기조차 일어날 일 없는 작은 지방에서 소일거리 삼아 장군 놀이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을 들을 정도의. 그러나 봉산하였을 때 자신만만한 모습도 놀라웠건만, 세리는 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현저한 능력을 보였다. 장군 출신인 만큼 문무관들의 면면과 이름, 특출난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지방의 주요 산물과 지역적 이점을 무서우리만큼 적확하게 이해하였고, 이는 곧 조정 대신들 뿐 아니라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만큼 호우린의 실도는 방극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한 번 확인부터 해보소서.”

 

 

 말로 거들 것도 없이 벌써 세리의 눈은 상소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최근 상소가 올라온 후주처럼 복주 또한 오랜 폭설로 중앙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일 터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용을 모두 확인한 세리는 직접 몸을 일으키더니 각 지역의 지원을 담당하는 하관 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무지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저렇게 성실하며 또한 유능한 주상이, 어째서 호우린의 실도를 일으켰는지. 조정대신들 각각의 능력과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어울리는 관으로 배치하였으며, 대계를 바라보는 눈을 지녀 지방마다 유능한 관리를 키우기 위한 여러 시설들도 이미 마련하여 기반을 잡아가고 있던 터였다. 냉혹한 추위에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방극국의 실정을 알고 기술과 정보를 기반으로 한 산업을 생각해낸 것도 세리의 능력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백성들과 관리들은 믿었을지 모르겠다. , 조만간, 세리의 능력을 하늘이 이해하여 호우린의 실도를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얇고 마른 세리의 붉은 입술에 노랫가락처럼 말이 피어나며 가는 호선을 그려냈다.

 

 

 “너를 죽이는 건, 나여야지.

 사랑스러운 당신아.”

 

 

 

 쓰고 있던 종이를 집어던지자 그 서슬에 청명산 벼루가 슬픈 소리를 맑게 내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비취색 화려한 옷 위로 먹물이 튀어 오르자 신경질적으로 잡아 뜯다가는 종내 아주 찢어버린다. 마른 몸에서 억지로 찢어발긴 비단 옷을 바라보며 얇고 가느다란 입술에 독살스러운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렇지, 너를 죽이는 건 나뿐이어야지. 나의 아름다운 이슬.

 

 

 후주를 지원하느라 궁을 닫았다는 것 또한 거짓말, 복주는 애초부터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다. 지금 이 방극국에서 세리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호우린 미로뿐이었으므로.

 

 

 유능하지 않느냐? 그건 아니었다. 성실하지 않은 것도 결코 아니었다. 다만 세리가 그 유능과 성실을 사용하는 곳이 오직 호우린의 실도 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한없이 다정하고 다감하며, 한시도 백성을 잊은 적 없는 세리는 모두 호우린에게 만들어준 환상에 불과했다. 기나긴 실정에 지쳐있었던 호우린을 돌아보게 하려면 세리는 유능한 주상이어야 했고, 세리는 그러한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호우린을 돌아보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며 세리는 조정과 방극국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놓았고, 그곳에서부터가 실정(失政)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조정에 들어서 눈이 아닌 심장에 각인시켰던 호우린의 아름다운 모습을. 얇게 자아낸 금실 위에 눈이 얹힌 것이 아니라면, 금빛으로 빛나는 유리달이 운해 위로 내려앉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부드러운 은백색 금발과, 청정한 운해 아래의 호수를 닮아 자애롭게 미소 짓는 영롱한 비취색 눈. 부드러운 뺨과 청아한 목소리까지, 세리는 호우린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그 연심은 차츰 커지다 못해 세리가 왕이 되자 절정에 달해버렸다. 원래라면 약소 지방의 여장군으로 평생 호우린을 그리다 가끔 알현할 때에만 숨기는 것이 가능한, 그런 연심으로 스러져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언제든 저를 향해 웃어주며, 원한다면 제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 가능한 데다 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충정 또한 지닌 제 반려가 되어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름답다 못해 차라리 부서져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저의 기린을 볼 때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었다. 아무리 삼키고 숨기려 해도 너를 바라보는 눈길에, 가끔 쓰다듬는 네 볼의 부드러움에, 걱정스레 건네는 말 두어 마디에도 붉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너는 알까. 제 아무리 방극국의 겨울이 모질고 무섭다 하더라도, 나뿐만이 아닌 모두에게 자애로운 네 모습 그 한 자락이 내 모든 신경을 끊어버리고 찢어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미로야, 네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운해 아래를 바라볼 때, 아니면 네 침실을 정리하는 시녀에게 나에게 보내는 미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을 향기롭게 띄어 보낼 때마다 내 심장은 터져버렸다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윤회를 반복하다 못해 탈진한 내 심장은 아마 너를 향한 내 단심을 견디기 어려워할 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미로야. 우리 함께 죽자. 태어나기를 함께 태어나지는 못했으니, 죽음만큼은 너와 내가 함께 해야지. 나의 반려야.

온 생애를 통틀어, 그 모든 바다와 우주를 찢어 보아도, 천 번의 윤회를 반복하고 만 번의 피안을 건넌다 해도,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다. 그저 너여야 한다, 사랑스러운 나의 독().

 나의 사랑스러운 독아.

--사담

십이국기는 중학생 시절부터 진짜진짜 좋아하는 소설인데

최근에 대국 이후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에 기쁨의 오열을...ㅠㅠㅠㅠㅠ하며

지금은 없는 방극국의 왕과/기린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독이라는 테마가 좋아서 여기에 맞춘 여성끼리의 이야기를 쭉 써보고 싶어요 이건 그 스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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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네. 아주 돈이 넘치다 못해 썩어 나는구만? 자명루에까지 행차하시고 말일세. 그럼 이 술상은 자네가 사는 건가?”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리. 금쪽같은 마누라를 두고 어디를 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마누라가 얼마나 바느질 솜씨가 좋아. 그래서 자명루에서 가끔 옷을 지어달라고 옷감을 보낸단 말이지.”

 “그래, 허긴, 제수씨 솜씨가 워낙에 좋아야 말이지. -, 그래서 자네가 제수씨가 만든 옷을 갖다 주었단 말이구먼?”

 “이제야 이야기가 좀 되네. 그렇지!”

 “? 너무 예뻐서 혼이 쏙, 빠지겠던가?”

 “예쁜 건 둘째 치고, 혼이 쏙, 빠지겠는 건 모를 일일세.”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술이나 한 잔 더 가져오란 말인가?”

 

 

 농담처럼 받아넘기고는 탁주 반 되를 더 시킨다. 그것이 정답이었던지 앞에 앉은 사내의 입가에 벌쭉한 미소가 걸린다.

 

 

 “눈이, 아무래도 이상했단 말임세.”

 

 

 술 마시는 손이 멎은 준호는 물론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발을 입가에 댄 범신의 눈매 또한 가늘어진다. 몸의 이상 상태를 알기 쉬운 설명이었다.

 

 

 “아니, 잠깐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흠칫, 여간내기 눈짓이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뜻인가?”

 “, 그그, 눈이 말일세, , 쩌기, 얌생이 새끼 같기도 하고, 배암 새끼 같기도 한 것이,”

 “에이, 사람이 허언은. 어째 사람 눈이 그래 생긴단 말이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 마주쳤는데 소름이 쏴아, 하니 돋는 것이, 요새 왜 그리 고 여편네가 인기인 줄 모르겠단 말일세. 거기다가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런 처자가 마음에 드나?”

 “, . 높으신 어르신네들 마음을 누가 알겠어.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한테야 무섭다, 사납다, 허지만 또 모를 일 아닌가.”

 “허긴, 그렇긴 해. 아이쿠, 술 식겄네. 한 잔 합세.”

 

 

 소리 나게끔 사발을 부딪치더니 이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자기들끼리야 별 생각 없이 주고받은 대화라지만 사건 서간을 읽었던 두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깨달음을 준 모양이었다. 빈 사발을 쥔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준호가 이마를 든다. 어느 한 곳 무너진 데 없이 맑고 투명한 눈이 연거푸 엎드린 심연과 마주한다.

 

 

 “저랑 자명루, 한 번 안 가실래요?”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을 것이란 짐작처럼, 이윽고 신탁처럼 무겁게 사발을 소리도 없이 상 위로 내려놓는다.

 

 

 “내 형조로 너를 데리러 가마. 그 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말거라, 핏덩이야.”

 “내가, 아무리 형조의 망나니라고 한들 동지사께 대겠습니까? 걱정 마시지요.”

 

 

 , 뱉듯 말을 잇고 빈 사발을 보며 슬쩍 입술을 핥는다.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린 범신은 꽤나 유쾌한 표정으로 다시 탁주 한 되를 주문한다.

 

 

 “아가, 너 이 일을 무에라 생각하느냐.”

 “아가라니, 소름끼칩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엄연히 준호라는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술이 올라 불콰해진 얼굴로 고운 눈썹을 찡그리나 싶더니 쌍꺼풀이 지지 않은 쪽 눈을 치뜬다. 도홧빛으로 붉어진 눈가에 어지러운 생각이 맴도는 양이었지만 범신은 말을 달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이골이 난 어떤 것처럼.

 

 

 “앞서 말했다시피 약초의 오남용에 관련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 같지 않은 힘도 그렇고, 꼭 동물을 닮은 눈이라니, 저는 아무래도 의심이 갑니다.”

 “그러하냐.”

 

 

 한동안 말이 없다. 쿨렁대는 물소리를 들으니 사발 째 들이키는 술이다. 어쩐 일로 제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술만 마셔대는 걸 보아하니 호기심이 동한다. 멍한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보니 만난 지 몇 번 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들고 다니는 동백문 접선이라 준호는 불쑥 입 꼬리에 말을 담는다.

 

 

 “동지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동백꽃처럼 어여쁜 아가씨라니, 마음에 걸리시나 봅니다.”

 

 

 농이라면 농이었지만, 그 한 마디에 저를 쳐다보는 시선은 등골이 싸하게 만든다. 마신 술이 단숨에 일깨워지는 듯 날카롭게 벼린 시선. 숨을 삼키게끔 만드는 그 홍채의 만남에 준호는 흠칫 어깨를 굳힌다.

 

 

 “아가, -핏덩이야. 너는 모를 테다.”

 

 

 굳게 다물린 입술에는 단 한 모금의 미소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준호에게 그 말을 꺼낸 것조차 후회하는 듯 몸을 일으킨 범신은 남겨진 준호에게 단호하게 등을 돌린 채 도포 자락을 펄럭인다.

 

 

 그래서인지 준호는 범신이 그 접선을 가지고 평소처럼 쌓인 송사 서간 더미를 무너뜨렸을 때 오히려 안도해버렸다. 마치 그렇게 헤어진 적이 없었던 마냥 느긋한 여유를 눈가에 띄운 채 파묻혀 있는 듯한 준호의 두루마리 서간들을 툭, , 지치지도 않고 건드린다.

 

 

 “아가, 이거 언제쯤 끝나느냐.”

 “-그러니까, 아가라 부르지 말라니까요. 아니, 저번에도 여쭈었지만 일을 하시기는 하십니까?”

 

 

 일부러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찾아온 것이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눈매에 떠오른다. 준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숫제 자리를 잡아버린 범신은 제가 건드린 두루마리를 쭉 펴 눈으로 읽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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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여긴 또 어쩐 일이시랍니까, ? , 동지사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형조로 오시다니요.”

 

 

 저도 모르게 짜증스럽게 접선을 쳐내고 제가 보던 두루마리를 멀찍이 밀쳐둔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넘쳐나는 와중에 굳이 끝난 사건을 다시 끌어오는 제 성정이 상사들이 좋아할 만한 군상은 못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과연, 치헌이 핏줄이 맞기는 한가 보구나.”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준호의 섬세한 턱선과 눈을 맞추며 껄껄 웃어젖힌 범신은 기어이 걸상을 끌어 그 앞에 자리를 잡아 단매의 사건 기록을 읽어본다.

 

 

 “요상하긴 하구나. 같은 여자가 다만 한 손으로 여자의 팔뚝을 부러뜨리다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그렇긴 하죠? 영 신경이 쓰여서요. 아무래도 저는 약초나 독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범신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뺏으려 했던 준호였지만 제 짐작과 비슷한 발언을 하자 금세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범신을 쳐다본다. 제가 여러 번 놀려 먹기는 했으나 제 말마따나 이제야 약관을 겨우 지난 핏덩이였다. 제 나이처럼 맑게 투명한 시선에 낮게 헛기침을 뱉은 범신이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슬쩍 미소를 띠며 접어내린 접선을 소리가 나게 펼친다. 미색 화선지에 붉은 동백이 올라앉은 고급스러운 접선 너머 묵직한 홍채가 가라앉는다.

 

 

 “아가, 이 문제가 궁금하더냐?”

 

 

 

 “아니, 어째 한동안 안 보이시나 싶더니, 어찌하여 또 주막이랍니까? 제가 정말로 숙부님께 혼쭐이 나는 꼴을 보고 싶으시단 말입니까?”

 

 

 끌려온 제가 또 잘못이다. 그 날 제가 캐물을 때에는 영문 모를 미소만 날리나 싶더니 칼날처럼 발길이 뚝 끊겼다. 아무리 제멋대로라지만 너무한 것 아니냐고 불평하면서도 은근히 그의 연락을 기다리길 보름, 연일 이어지는 격무에 지친 준호가 귀가하는 길에 막무가내로 끌고 온 곳은 단매나 항아가 있는 금화루가 아닌, 허름한 주막이었다.

 

 

 “이놈아, 귀 안 먹었다. 우선 앉아라.”

 

 

 울컥해서 소리를 지른 준호였기에 시선을 돌린 뒤 금세 다시 자리로 돌아앉는다. 능청스럽게 주모에게 술 두 사발과 간단한 국밥을 주문한 범신은 준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막걸리 사발을 단박에 쭉 들이키더니 손등으로 짙은 입술을 슥 훑는다. 아무 것도 아닌 몸짓 하나에도 두터운 존재감과 연륜이 드러나 준호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엉거주춤 그 앞에 자리를 잡는다.

 

 

 시큼털털한 땀 냄새에,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 때 묻은 앞치마를 두른 주모가 내던지듯 내려놓은 국밥은 그리 맛있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를 진한 그리움과 친밀감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막걸리 사발을 쥐자 그제야 범신의 눈썹 한 쪽이 꿈틀거린다.

 

 

 “핏덩이 너, 술도 먹느냐?”

 “먹는다는 말은 안했지만, 안 먹는다는 말씀도 안 드렸습니다.”

 

 

 끊어내듯 말을 하고 맹랑하게도 사발을 앞으로 쑥 민다. 그 서슬에 범신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릇이 철철 넘치도록 탁주를 들이붓는다.

 

 

 “예민한 것이 과연 형조의 애기씨라는 말을 들을 법도 하구나.”

 “예민하면, 안 됩니까?”

 

 

 기어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준호를 유심히 바라본다.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범신에게 애써 눈을 피하며 한 사발을 다 들이마신 준호 또한 젖은 입술을 닦아낸다. 갓 피어난 꽃처럼 붉게 젖은 입술을 바라보다 툭, 한 마디 던져놓는다.

 

 

 “아가, 너 월경 하느냐?”

 “, 무스...!?”

 

 뱉어내려던 막걸리를 겨우 삼키고 눈을 크게 뜬다. 당황한 것이 빤한 준호를 바라보며 접선으로 입가를 가리고 이죽거리는 눈가에 준호는 결국 어깨에 힘을 뺀다. 아무 소리도 안 한 양 그새 두 개의 사발에 막걸리를 채워놓고 제게 잔을 들어보이자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었지만 이내 말없이 사발을 부딪친다. 사발끼리 부딪치는 소리 너머로 땀 냄새 들큰한 농민들의 대화 소리도 들려왔다.

 

 

 “봤어?”

 “이 사람은, 뭘 봤느냐 물어도 안 보고 다짜고짜 말부터 하는 이 버릇을 좀, 고쳐놔야 해. 그래, 봤다, 이 사람아.”

 “아니 글쎄, 미안함세. 그런데 말이야, 진짜 봤느냐는 말이지.”

 “그래 무얼 말인가. 이제는 좀 말이나 하게. 들어나 봅세.”

 

 

 듣기만 해도 우스운 대화에 준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린다. 대대로 지체 높은 양반 집 자제라지만 숙부인 치헌은 신분제의 모순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를 전복시킬 의도도, 생각도 없었지만 그 미묘한 기류는 준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덕분에라고 해야 할지, 준호 또한 형조의 정랑이라는 직책까지 올라 있었지만 형조의 노비인 무심과도 친하게 지낼 만큼 허물이 없었다. 모두가 저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노골적이라 생각될 만큼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상민들의 대화가 즐겁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자명루 단매말일세.”

 

 

 준호의 손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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