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눈 안으로 뜨거운 것이 괴어왔다. 용암을 연상시키는 그 뜨거움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처음 바라보게 된 것은 낯설게 하얀 천장.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하자 위로 당겨진 손목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직후 차례로 제 가슴팍의 십자가, 묶인 발목,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감각을 침범해 들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유일한 구원을 불러보았다.



 "박범신, 베드로 신부님...?"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만 굳은 표정으로 제 눈 위에 영대 자락을 올리기 위해 다가오는 모습만이 담길 뿐. 준호는 흘러내리는 눈물도 닦지 못하고 길 잃은 아이처럼 범신을 올려다 보았다.



 "신부님, 제가, -제가, 굴복하였나요?"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동시에 제 입에서 나는 말로도로의 썩은 내에 구역질이 밀려왔다. 폐까지 썩어버린 듯한 냄새에 어딘가 이마라도 짓찧고 싶은 심정을 겨우 참으며 준호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구마 사제가 악령에 들리다니, 이리도 유약할 수가 있나.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악을 쓰며 오열하고 싶기도 했다. 이마와 한쪽 눈을 덮는 자락이 느껴지자 준호는 이를 악물고 밀려드는 울음을 참았다.



 "아가토."



 그러나 저 물음에는 답해야했다. 울음을 참느라 꽉 눌린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준호는 억지로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바흐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와중에 네가 침을 삼키는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하였다. 소리없이 눈물을 참던 준호는 그 소리에 흐느껴 울며 왼 팔에 이마를 기댔다. 덩치 큰 어른이 꼴불견이다 싶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동생을 잃던 그 때와 다를 바가 없어 더욱 심장이 아팠다. 결국 누구도 구해낼 수 없는 것이 최준호 아가토의 본질이라면, 살아 무엇할까. 내게 깃든 악령과 함께 죽어버릴까. 준호는 몸부림치며 길고 긴 눈물을 토해냈다.



 "-그래서, 그 부마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팔이 묶인 채 물어보았다. 겨우겨우 오열을 억누른 준호의 물음에 착잡하게 허공을 보고 있던 범신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하자 준호는 눈썹을 찡그리고 다시 자세히 물어보았다.



 "왜 그, 양평 쪽에서 악령에 들렸다던-."



 묵직한 십자가의 무게가 가슴에서 느껴졌다. 저를 꾹 누르는 듯한 그 감각에 설마하며 범신을 올려다 보니 범신은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가토. 너는 2달 전부터 혼수상태였다. 영신이에게 구마 의식을 치룬 이후, 정확히 24일이 지난 직후부터."



 안타까운 듯, 가슴이 저미는 듯 낮은 목소리로 범신은 씹어내듯이 그리 말하였다. 범신의 대답에 한동안 말이 없던 준호는 별안간 지옥보다 헐거운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아하하, 씨발. 씨발같네요 진짜."



 그럼 이제껏 배워왔던 의식도, 너와 내가 차곡차곡 쌓아왔다 '믿던' 유대도 간데 없다는 말이구나. 가끔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네가 사준 맥주를 기울이며 낄낄대던 그 모든 순간도 사실은 환영일 뿐이라는 말이네. 눈가에는 투명한 물방울을 매단 채 나지막한 웃음을 토하는 준호를 한동안 바라보던 범신이 제 목에 봉을 들이밀자 준호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아니 하고-."



 영신이 불렀던 그 노래가 귓가에 맺히자 끝내 범신은 차오르는 오읍을 억누르지 못하고 무릎을 내리 꺾었다. 준호는 흐느끼는 범신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스스로 성가를 부르며 구마 의식을 도우려했다. 지금에야말로 개가 짖든, 제 발목을 물어뜯든 신경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 곁에 신이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박범신 베드로, 당신이 있었다. 우주 건너편보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개 짖는 소리가 슬그머니 귀를 쓰다듬다가 뇌리로 숨어들어왔다. 준호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듯 가늘어졌다.



 "정신차려, 아가토!"



 눈을 뜨자 이번에는 낯선 천장이 아닌, 개들이 노려보고 있는 양평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창문밖에서 불어오는 달빛이 식은 땀이 줄줄 흐른 준호의 이마를 싸늘하게 식혔다. 범신이 다급하게 준호를 일깨우자 그제야 겨우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린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제가 들고 있던 봉과, 그 봉 밑에 목을 붙잡힌 부마자를 바라보았다. 색색 가쁜 숨을 내쉬던 부마자는 준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찢어져라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최 아가토, 그대. 부마자가 된 기분은 어땠어?"



 온통 깔깔대는 웃음은 떨어진 별 조각을 닮아 소름 돋게 고막에 엉겨붙었다. 준호는 하얀 치아로 몇 번이고 깨물어 붉게 선혈색 꽃을 피운 제 입술을 닦지도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 같더군. 그래서 쓰레기보다 못한 너, 이름이 무엇이냐."



 너를 구마 사제로 내세운 걸 후회하는 듯 깊은 눈으로 두 존재를 바라보는 범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더욱 꺾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검은 개에 묶인 어린 준호로 남아 있다고 네게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눈물보다 깊게 턱으로 제 존재를 새기는 핏방울을 떠올리면서 준호는 다시 한 번 더 짓쳐 악마의 이름을 다그쳤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굽이쳐 제 이름을 물을 줄 몰랐던지 부마자의 눈이 당혹스레 벌어지더니 이내 모란빛으로 붉은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면서 가파르게 숨을 뱉어내던 부마자는 짐짓 헐떡거리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우스워라, 아직 그 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꼬마. 내 손짓 한 번이면 저 앞뜰의 개들이 너와, 저 소금 선 뒤 늙다리의 목덜미를 씹어 부술 테다. 그뿐인 줄 아느냐. 이 늙어빠진 할망구의 몸을 벗어나 아가토 그대, 그대가 보았던 환영을 다시 보여주마. 이번에는 실제로 말이지."



 깔깔대던 목소리가 피눈물과 섞여 혼곤한 암흑을 드리웠다. 채 삼키지 못한 밤은 별빛으로 얼룩진 머리카락을 시커멓게 쏟아내다가 마귀 들린 자의 웃음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캄캄한 눈동자위를 드러냈다. 천지 간에 무너지는 어둠 속으로 준호는 조용히 돼지의 피를 이마에 십자가로 새기면서 입술을 열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는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힘주어 목덜미를 눌렀다. 봉이 목을 틀어쥐자 유황과 몰약이 섞인 연기가 어둠으로 옹송그려 부마자의 몸을 감쌌다. 숨을 헐떡거리던 부마자는 결국 혀를 짓씹듯 준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제 이름을 토해냈다.



 "-소네일론."

 "소네일론.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라."



 뺨을 타고 흐르는 탁한 침을 닦지도 않고 준호는 고요하게 읊조렸다. 경멸 어린 눈으로 빤히 준호를 바라보던 부마자는 마지막 저주를 뇌까리며 시린 미소를 지었다. 준호의 귓가에 와 닿은 그 저주는 누구의 허공에도 닿지 않고 스러져 갔다. 텅 빈 눈으로 소금 선 밖 범신과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싱긋 웃고는 휘청이는 걸음으로나마 새까맣게 변한 돼지를 영대로 안아들었다.



 "...않습니다."

 "뭐?"

 "이제는 도망치지 않아요, 베드로, 신부님."



 두물머리로 정신없이 트럭을 몰던 와중에 준호가 내민 짧은 말에 베드로는 헛웃음을 쳤다. 뭐라든, 그 악마새끼가 네 귀에 도망치라고 주절대기라도 하든? 입 속에서 독사로 우글거리는 말을 모두 가라앉히고 마지막 남아 허우적거리는 단어를 꺼내었다.



 "잘했다, 아가토."

 "-네."



 돌아오는 길에 준호는 잠긴 울음을 내뱉았다. 날붙이의 감각으로 후두를 쑤셔오는 그 고통이 살아있음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털털거리며 흔들리는 트럭 안에서 오래 오래 잠긴 그 울음 속에는 네가 있어 겨우, 다행이었다.



--

음. 아가토의 첫 부마군요.

빙의된 줄 알았다가 아니었다가; 혼돈스럽곸ㅋㅋㅋㅋㅋ

뭐 저는 우는 준호 피흘리는 준호 연성햇으니 됐습니다.

이제는 12형상에서 차용한 트라우마를 적용시켜봐야지 룰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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