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죽이는 건 나, 나여야지,

 -나의 어여쁜 독.

 

 귓가에 닿아오는 투명한 햇살 같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한없이 잔혹하고도 지독한 저주를 담은 언어들이었다. 뒤이은 사물들에게 슬픔을 빚진 목소리는 말이 끝나고도 한동안, 어렴풋한 자취를 남기며 공기 속으로 위태하게 흐려져 갔다. 느릿하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호우린은 엷다 못해 은빛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밭은기침을 토해냈다.

 

 

 “미로(明露).”

 

 

 체온보다 조금 높게 느껴지는 온기가 제 어깨를 가다듬어 호우린은 움찔, 커다란 눈을 들었다. 마주친 눈동자는 얼어붙은 북해보다 채도가 낮은 은회색. 제 머리카락과 견주었을 때에도 색이 옅은 긴 눈에 호우린은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춘다. 이를 어떻게 이해한 것인지 잠깐 시선을 멈춘 여인은 씁쓸한 미소를 야윈 뺨에 밀어내었다 거두며 호우린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는다.

 

 

 “미안, 일 보느라 바빴어.”

 “아닙니다. 당연한 일이신 것을요.”

 

 

 삼켜낸 기침 뒤로 나지막한 울림이 목 안에서 되튄다. 걱정스럽게 눈썹을 늘어뜨린 여인은 옆에 선 여사의 손에서 따뜻한 차를 빼앗듯 들어 호우린의 작은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춥지는 않아? 머리가 아프거나 하지는 않고?”

 “아닙니다,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너무 괘념치 마세요, 세리(世理).”

 

 

 그러나 멈춰지지 않는 기침이 거세지며 어깨가 들썩거리고, 깎은 듯 단정하던 호우린의 이마가 괴로운 듯 좁혀지자 세리라 불린 여인은 가냘프고 여린 손 위에 있던 찻잔을 쳐내듯 내던지며 그 등을 끌어안는다. 종이 치듯 맑은 소리로 깨어진 찻잔 안에서 말간 붉은 색이 바닥으로 천천히 퍼져나갔다.

 

 

 “미로, 괜찮아.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나는 길을 잃은 게 아니야.”

 

 

 제 눈과는 달리 밤보다도 새카맣게 여울지는 머리카락이 호우린의 창백한 뺨으로 걸쳐진다. 처음 저를 만났을 때, 달빛보다 맑게 비추는 금발과 청안이라고 감탄하며 세리가 지어준 자()였다. 왕을 만난 기쁨에 어쩔 줄 모르고 그저 하염없이 울던 그 순간이, 지금은 떠올리기조차 힘든 과거처럼 느끼는 스스로에게 느릿한 혐오를 가지면서 호우린은 잠깐 눈을 감았다.

 

 

 “길을 잃은 게 아니야. 미로를 아프게 하지 않을게. 나를 믿고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나의 이슬아.”

 

 

 끝말은 울음에 가까웠다. 시선만으로 사람을 베어 죽일 듯 날카로운 눈매에, 약소한 지방 호족 출신으로 당당하게 봉산했던 그 호기로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빠진 어깨였다.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마른 손을 뻗어 안아본 그 등은 의복 너머 척추가 느껴질 정도로 여위어, 호우린은 고개를 들어 세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세리, 밥을, 먹지 않아요?”

 “미로.”

 “먹어야 돼요. 그래야, 그래야 힘을 내서 일을 하죠.”

 

 

 울지는 않았지만 젖은 눈매였다. 쌍꺼풀이 없어 일견 온순해 보이지만 양 끝으로 길게 뻗은 눈매와 그 눈매를 촘촘히도 둘러싼 속눈썹은 회청색이 도는 눈동자 사이에 깊은 경계를 이루며 보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힘이 있었다. 칼날을 닮아 위태로우면서도 예리한 눈매로 한동안 호우린을 바라보던 세리는 졌다는 듯 물기 없는 미소를 띤 채 몸을 일으켰다.

 

 

 “나의 미로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용기가 안 나네. 대신, 나와 같이 식사는 해주겠지?”

 

 

 궁을 나서자 싸늘하다 못해 베어낸다고 느껴질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밀려들었다. 내쉬는 숨결조차 보석으로 만들어버리는 냉기에 저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세리가 단단히 지탱해준다. 제가 지닌 색만큼이나 부서지기 쉬운 여린 기린을 보는 눈썹이 자애롭기 그지없다. 마른 입술 위를 거칠게 흩어 놓는 동풍을 억지로 밀어내며 호우린은 세리를 올려다본다.

 

 

 1365일 차디찬 기운이 가시질 않는 방극국에 어울린다는 말도 우습지만, 하얗고 신경질적인 턱 선은 백색으로 어리는 겨울의 풍경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짙은 묵색으로 허공을 수놓는 긴 머리카락과, 북극해를 닮아 차가운 청색을 담은 잿빛 눈까지, 말 그대로 세리는 동장군(冬將軍)을 사람으로 옮겨놓은 듯한 형상이었다. 한없이 강인하면서도 차가운 미로의 주상. 그녀를 볼 때면 언제부터인가 등에서부터 목덜미까지, 한 줄기 전율이 가없이 내달리는 기분이었다.

 

 

 “춥지, 미로? 미안해. 폭설이 내린 후주 지방에 지원을 보내느라 궁들을 많이 닫아 놓았거든. 조금만 참아줘, 금세 도착할 테니까.”

 

 

 그런 만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목 안을 길쭉하게 벼혀내듯 밀어닥치는 기침을 애써 참았지만 호우린의 병은 분명 실도(失道)로 인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불로불사에 가까운 호우린이 이리 괴로워하며 심신의 고통을 호소할 리 없었다. 그러나 호우린의 눈에 비친 세리, 즉 방극국의 왕은 여전히 백성을 위하고 있었으며, 호우린을 자애로 보살피며, 하늘의 뜻을 잊어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고민해 봐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에 호우린은 결국 생각하기를 그만 두고 제 어깨를 품어주는 세리에게 기대어 궁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주상.”

 “-.”

 

 

 말없이 올려다보는 서늘한 시선에 일순 언어를 잊었다. 익숙해져 있다고 생각했건만 불쑥 불쑥 밀어닥치는 저 겨울 색 안정에는 침착함을 유지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여사 메이시는 할 말이 있으면 이어 말하라는 듯한 세리의 눈에서 도망치듯 눈을 내리깔며 들고 온 두루마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이번엔 어디에서 올라온 상소지?”

 “복주입니다.”

 “, 어라? 정추산 옥천이 벌써 마를 시기던가?”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 사항이었다. 실정하고 있던 조정에서조차 유명세를 날리지 못하던 한낱 약소 지방 출신의 여장군이라고만 했다. 봉기조차 일어날 일 없는 작은 지방에서 소일거리 삼아 장군 놀이하는 것 아니냐는 조롱을 들을 정도의. 그러나 봉산하였을 때 자신만만한 모습도 놀라웠건만, 세리는 왕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현저한 능력을 보였다. 장군 출신인 만큼 문무관들의 면면과 이름, 특출난 능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지방의 주요 산물과 지역적 이점을 무서우리만큼 적확하게 이해하였고, 이는 곧 조정 대신들 뿐 아니라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런 만큼 호우린의 실도는 방극국이라는 나라 전체에 보이지 않는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한 번 확인부터 해보소서.”

 

 

 말로 거들 것도 없이 벌써 세리의 눈은 상소 내용을 확인하고 있었다. 최근 상소가 올라온 후주처럼 복주 또한 오랜 폭설로 중앙 조정에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일 터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내용을 모두 확인한 세리는 직접 몸을 일으키더니 각 지역의 지원을 담당하는 하관 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도무지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체 저렇게 성실하며 또한 유능한 주상이, 어째서 호우린의 실도를 일으켰는지. 조정대신들 각각의 능력과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어울리는 관으로 배치하였으며, 대계를 바라보는 눈을 지녀 지방마다 유능한 관리를 키우기 위한 여러 시설들도 이미 마련하여 기반을 잡아가고 있던 터였다. 냉혹한 추위에 농사일을 할 수 없는 방극국의 실정을 알고 기술과 정보를 기반으로 한 산업을 생각해낸 것도 세리의 능력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백성들과 관리들은 믿었을지 모르겠다. , 조만간, 세리의 능력을 하늘이 이해하여 호우린의 실도를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고.

 

 

 얇고 마른 세리의 붉은 입술에 노랫가락처럼 말이 피어나며 가는 호선을 그려냈다.

 

 

 “너를 죽이는 건, 나여야지.

 사랑스러운 당신아.”

 

 

 

 쓰고 있던 종이를 집어던지자 그 서슬에 청명산 벼루가 슬픈 소리를 맑게 내며 두 동강이 나버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잘 어울리는 비취색 화려한 옷 위로 먹물이 튀어 오르자 신경질적으로 잡아 뜯다가는 종내 아주 찢어버린다. 마른 몸에서 억지로 찢어발긴 비단 옷을 바라보며 얇고 가느다란 입술에 독살스러운 웃음이 피어오른다.

 

 

 그렇지, 너를 죽이는 건 나뿐이어야지. 나의 아름다운 이슬.

 

 

 후주를 지원하느라 궁을 닫았다는 것 또한 거짓말, 복주는 애초부터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조차 없었다. 지금 이 방극국에서 세리가 신경 쓰는 것은 오직 하나, 호우린 미로뿐이었으므로.

 

 

 유능하지 않느냐? 그건 아니었다. 성실하지 않은 것도 결코 아니었다. 다만 세리가 그 유능과 성실을 사용하는 곳이 오직 호우린의 실도 뿐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한없이 다정하고 다감하며, 한시도 백성을 잊은 적 없는 세리는 모두 호우린에게 만들어준 환상에 불과했다. 기나긴 실정에 지쳐있었던 호우린을 돌아보게 하려면 세리는 유능한 주상이어야 했고, 세리는 그러한 능력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호우린을 돌아보게 하는 능력을 발휘하며 세리는 조정과 방극국 백성들의 마음을 돌려놓았고, 그곳에서부터가 실정(失政)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 조정에 들어서 눈이 아닌 심장에 각인시켰던 호우린의 아름다운 모습을. 얇게 자아낸 금실 위에 눈이 얹힌 것이 아니라면, 금빛으로 빛나는 유리달이 운해 위로 내려앉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부드러운 은백색 금발과, 청정한 운해 아래의 호수를 닮아 자애롭게 미소 짓는 영롱한 비취색 눈. 부드러운 뺨과 청아한 목소리까지, 세리는 호우린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그리고 그 연심은 차츰 커지다 못해 세리가 왕이 되자 절정에 달해버렸다. 원래라면 약소 지방의 여장군으로 평생 호우린을 그리다 가끔 알현할 때에만 숨기는 것이 가능한, 그런 연심으로 스러져버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언제든 저를 향해 웃어주며, 원한다면 제 곁에 붙잡아두는 것이 가능한 데다 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충정 또한 지닌 제 반려가 되어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운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름답다 못해 차라리 부서져버렸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저의 기린을 볼 때면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이었다. 아무리 삼키고 숨기려 해도 너를 바라보는 눈길에, 가끔 쓰다듬는 네 볼의 부드러움에, 걱정스레 건네는 말 두어 마디에도 붉은 마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너는 알까. 제 아무리 방극국의 겨울이 모질고 무섭다 하더라도, 나뿐만이 아닌 모두에게 자애로운 네 모습 그 한 자락이 내 모든 신경을 끊어버리고 찢어버리는 것처럼 고통스럽지는 않다고.

 

 

 미로야, 네가 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으로 운해 아래를 바라볼 때, 아니면 네 침실을 정리하는 시녀에게 나에게 보내는 미소와 다를 바 없는 웃음을 향기롭게 띄어 보낼 때마다 내 심장은 터져버렸다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윤회를 반복하다 못해 탈진한 내 심장은 아마 너를 향한 내 단심을 견디기 어려워할 지도, 모르겠다고.

 

 

 그러니 미로야. 우리 함께 죽자. 태어나기를 함께 태어나지는 못했으니, 죽음만큼은 너와 내가 함께 해야지. 나의 반려야.

온 생애를 통틀어, 그 모든 바다와 우주를 찢어 보아도, 천 번의 윤회를 반복하고 만 번의 피안을 건넌다 해도,

 

 

 나에게는 오직 너뿐이다. 그저 너여야 한다, 사랑스러운 나의 독().

 나의 사랑스러운 독아.

--사담

십이국기는 중학생 시절부터 진짜진짜 좋아하는 소설인데

최근에 대국 이후의 이야기가 나온다는 사실에 기쁨의 오열을...ㅠㅠㅠㅠㅠ하며

지금은 없는 방극국의 왕과/기린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독이라는 테마가 좋아서 여기에 맞춘 여성끼리의 이야기를 쭉 써보고 싶어요 이건 그 스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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