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의심은 가지만 두 사람 다 이렇게 말하는 데다가, 동지사와 형조의 사람이라는 직위에 채련도 어쩔 수 없이 한 발자국 물러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치떴던 눈매에 다시 가느름한 웃음기를 피우며 곤란하게 눈썹을 늘어뜨린다.

 

 

 “두 분 다 이리 말씀하시니 저 또한 고개 숙여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럼 이 아이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며칠간 말미를 주시겠습니까.”

 “아닐세.”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칼에 잘라낸다. 부드러워졌던 채련의 눈초리가 순식간에 다시 날을 세웠다. 이번에는 범신이 더욱 진지하다.

 

 

 “이 사람으로 말할 것 같으면 형조의 정랑으로,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와 함께 단매라는 이 기생을 조사하러 온 것이네. 실은 오늘 확인만 하러 온 차였으나 상태를 보아하니 하루라도 더 빨리 조사를 진행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여겨지네만.”

 

 

 자신과 함께 가겠다는 뜻에 준호의 눈이 잠시 휘둥그레지다 말고 금세 가라앉는다. 설명하겠다는 말이 이 뜻이었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황에 설명 요구는 뒤로 미뤄두고 아닌 척 저 또한 채련에게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이 아이를 어쩌시겠단 겁니까. 오라라도 묶어 형조로 데려가시겠다는 말입니까?”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떠돌던 미소가 간 데 없다. 범신의 묵직한 언사를 정면에서 맞받아치는 채련에게서 또한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드러났다. 채련의 말에 범신이 조금 웃음을 짓나 싶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러나, 이 아가씨를 그냥 보내주었다가는 단서 은닉의 위험이 있다는 말이지. 날이 밝는 대로 즉시 함께 조사할 다모를 불러올 테니 오늘 밤만 같이 있어도 되겠는가?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함께 있어도 좋네. 내가 따르라는 지침만 모두 따른다면 말일세.”

 “보셔요, 어르신. 지금 이 아이는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가 어찌 단서를 숨긴단 말입니까. 내일 날이 새자마자 제가 이 아이를 데리고 형조로 직접 출두할 터이니, 오늘은 돌아가시지요.”

 “그럴 수는 없네. 아까도 말했고, 그대가 확인했다시피 우리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 이 모든 행각이 이 아가씨의 연기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앞서도 말했듯 원한다면 우리와 함께 있어도 좋네. 다만, 우리 눈 밖에 이 아가씨를 벗어나게 허락할 수는 없네.”

 

 

 조용히 눈을 마주치나 싶더니 단매의 목에 걸린 묵주를 슬쩍 눈짓한다. 그 눈빛에 채련의 낯빛이 일순 하얗게 질린다. 금세 돌아오기는 했으나 채련은 아까까지의 반대가 거짓말인 것처럼 온순하게 고개를 숙인다.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 어르신을 따르도록 하지요. 제가 곁에 있을 필요도 없겠지요? -오직 영감만을 믿고 나가보겠습니다.”

 

 

 창보다 날카롭고 직설적인 눈빛으로 범신을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맺는다. 과연 그저 공으로 이 자명루의 기생 어멈이 된 것은 아닌 듯 웬만한 장수만한 기백이 느껴지는 눈빛과 태도였지만 범신도 만만치 않았다.

 

 

 “그럼 부탁 몇 개만 하겠네. -이 종이대로 준비 좀 부탁하네.”

 

 

 여유만만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종이까지 쥐어주며 손짓으로 그녀의 퇴실을 허락한다. 단숨에 바뀐 행동에 문이 닫히자마자 준호는 범신을 빤히 바라본다.

 

 

 “아가, 왜 그러냐. 나한테 반하기라도 했느냐.”

 “농치지 마시고, 저 사람도 서학 쪽입니까.”

 “시간이 없구나.”

 “모르는 척 마십시오. 맞지요? 아니, 아무리 기생이라고 한들 아녀자까지 사이비 학문을 배운단 말입니까?”

 

 

 행동이 멎는다. 느릿하게 준호를 돌아다보는 눈빛은 기묘하게 형형하다. 동백문 접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 마디마디가 새하얗다.

 

 

 “아녀자라 하여, 학문을 배우지 못하며, 여인이라는 이유로 기껏해야 수예나 놓을 뿐, 더러는 짐승 같은 사내를 만나 평생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오직, 여인으로 태어났다는 그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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