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시는 겁니까. 그거 다, 제가 정리해놔야 하는 건,”

 “이 사건은 노비가 앙심을 품고 제 주인을 내건 사건이구만. 노비에게, 허위로 사건을 만들었을 경우 경국대전에서는 어떻게 처리하는지 일러주거라. 금세 자백할 것이다.”

 “...?”

 “또한 이러한 사건은, 경신년에 일러 말씀하시기를 당사자가 원치 않는다면 사건의 피의자와 직접 대질시켜서는 아니 된다 하셨으니, 필히 도와줄 다모가 필요할 걸세. 이날엔 아마 연지가 당번인 날일 테니, 일러놓도록 하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지도 않았지만 척척, 사건을 정리하여 곁에 있던 무심에게 자연스럽게 넘긴다. 준호가 끙끙 싸매던 삼분지 일의 시간으로 반 이상 서간을 정리한 범신은 허리를 쭉 한 번 펴나 싶더니 그대로 접선을 준호의 턱으로 갖다 대어 눈을 맞춘다.

 

 

 “, 이제는 이 일 안 하는 동지사와 함께 갈 수 있겠느냐, 아가.”

 

 

 시간 맞춰 동시에 형조의 문턱을 넘은 두 사람은 행여 시간에 맞추지 못할까 걸음을 재촉하였다. 이름을 날리는 기생일수록 부르기가 어렵다 하더니, 최근 단매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이조차 겨우 잡았다는 말을 하는 범신의 뺨에는 드물게 홍조가 올라있었다.

 

 

 “, . 민망하더구만.”

 “-아니, 가보아도 몇 십 번을 혼자 가보았을 것 같은 양반이 무슨 소리십니까.”

 “나를 그리 보았더냐.”

 

 

 걷다 말고 살짝 미소를 띤 채 준호를 돌아다본다. 당연스레 말을 이어나가던 준호는 저를 바라보는 범신에게 눈이 동그래져 걷는 것조차 잊고 빤히 쳐다본다. 모르긴 몰라도 주워듣는 도중에 선월이라는 기생과는 정을 통한 사이라고 이미 육조 내에서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기생집에 가는 것을 꺼려하다니.

 

 

 “허허, 그랬던 모양이구만.”

 “, 아니... , 선월, 이라는 기생을...”

 “네가 그를 알더냐?”

 

 

 그저 지나가듯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잇자 의외로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잠깐 껄껄거리며 호탕한 웃음을 낸 범신은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내 명나라 다녀오는 길에 주워온 아이다. 어린 아이가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영영 조선으로 못 돌아올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에 데리고는 왔다만, 그 아이가 형조 내에서도 이름이 날 정도로 컸다는 말이지.”

 

 

 이쯤 되면 정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키워준 보호자로서의 마음이 더욱 강하게 느껴진다. 저에게 이런 헛소문을 흘린 형조 사람들에게 남몰래 이를 갈며 준호는 어설프게 맞장구를 칠 수밖에는 없었다. 다행히 선월에 대한 이야기로 긴장이 풀린 것인지, 자명루에 도달해서 범신은 연륜이 느껴지는 몸짓과 목소리로 자리를 안내 받았다.

 

 

 “이야, 이거. 적응 안 되는구만. 나 같은 사람한테는 그저 접때 갔던 주막이 최곤데 말이야.”

 

 

 낮은 목소리로 옆에 얼어붙어 앉은 준호에게 귓속말 같은 농담을 건네며 킬킬댄다.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이렇게 화려한 곳이 낯설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매번 저를 데리고 갔던 곳이 본인이 말한 주막임을 다시금 깨달으며 준호는 범신을 따라 젓가락을 들었다. 호화찬란한 만찬도 만찬이었지만, 이제 나올 단매라는 기생이 진실로 법을 어긴 자인지 확인하려면 먼저 배를 채워야 한다는 결심이었다.

 

 

 “아가, 마음은 알겠다만 오늘은 무엇도 하지 말아야 헌다. 확인이 우선이다, 우선이야. 괜한 생사람 잡을라 걱정이 되는구나.”

 “누굴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로 아십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입으로 들어간 맛나고 기름진 찬들의 맛이 도무지 느껴지질 않는다. 높으신 분들이 오신다 하여 꾸미느라 좀 늦는다 하는 급사의 말도 들어오지 않고, 준호는 전날 밤 책에서 보았던 다양한 약의 증상들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다시금 곱씹었다. 확인만 된다면야 내일 아침에라도 곧장 형조에 아뢰어 단매의 방을 확인해보아야 할 터였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 날카롭게 구는 준호에게 범신은 조금 눈살을 찌푸리나 싶더니 술잔을 홀로 따랐고, 그와 동시에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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