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기, 단매. 귀하신 두 분께 인사를 올립니다.”

 

 

 화려하게 퍼져 자수가 들어간 자색 치마 위에 얇게 은사를 먹인 듯한 반투명한 치마를 한 겹 더 덧두르고, 홍색과 감색이 섞인 좁은 반회장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단매는 들은 대로 그리 외모가 뛰어난 기생은 아니었다. 다만 주막에서 들었던 말에는 거짓이 섞여 있었는지, 곱게 눈웃음으로 휜 눈은 크지도 않을뿐더러 여느 사람들과 똑같은 홍채를 지니고 있었다. 얄쌍하여 보호 본능을 자극하게 하는 하얗고 몸집이 가는 기생. 조금 안심하여 낮게 숨을 쉰 준호는 슬쩍 범신의 눈치를 보았고, 범신 또한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나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단매라 하였던가. 네 기명이 육조대로 건너 운종가에까지 자자하더구나. 어디 네 솜씨 한 번 들어나 보자꾸나.”

 

 

 들고 있던 가야금을 보며 말하자 단매는 다시 한 번 더 눈을 초승달로 만들더니 자색 치마를 정리해 자리를 잡는다 .

 

 

 “그리 칭찬해주시니 송구합니다. 곡은 제게 맡겨주시는 것인지요.”

 “그리해 보거라. 네 노래가 술맛을 돋우는지, 아니면 버리는지 확인이나 해보마.”

 

 

 그리고는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잔에 넘치도록 술을 붓는다. 부러 거친 말과 행동으로 망나니 행세를 잘하는 범신에게 저도 모르게 풋, 웃어버린 준호는 근본을 모를 악취에 콧잔등을 찡그리면서도 또한 술잔을 쥐었다. 범신의 무례한 태도에 잠깐 손을 거두려던 단매는 이내 생글 생글 미소를 지으며 연주를 시작한다.

 

 

 “, -, 동지사 어른,”

 “편하게 아저씨라 불러도 된다, 아가.”

 “-그럼 아저씨. 저 이가 특별히 이상한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만, 어디서 계속 냄새가 나질 않습니까.”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사람이지. 너도 느꼈느냐.”

 “. 저 아가씨가 들어온 이후인 것 같습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냄새가. -혹여나 저 기생이 쓰는 독초 같은 것은 아닐지.”

 

 

 분명 단매가 들어올 때 향낭이라도 매었는지 아주 진하면서도 독한 향이 났고, 그에 섞여 무어라 형언하기 힘든 악취도 겹쳐 흘러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준호도 저와 비슷하게 악취를 느꼈다는 것을 확인한 범신은 별안간 벽을 향해 마시던 술을 흩뿌린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가야금을 타던 단매가 손을 멈춘다.

 

 

 “그만두거라. 그리 비싼 술도 아니건만 네 금 타는 소리에 술 맛이 뚝뚝, 떨어지는구나, 고얀. 일어 나거라, 아가.”

 

 

 뒤엣 말은 준호를 향한 것으로 이미 저는 항시 들고 다니던 동백선을 손에 쥔 채 몸을 일으키고 있다. 여전히 가야금 줄을 놓지 않고서 안족을 향해 시선을 내꽂던 단매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을 뱉는다.

 

 

 “아무리 이년의 배움이 짧다 한들, 술맛을 버릴 정도는 아니라 사료되었습니다만.”

 “계집이 말이 많구나. 우리가 아니라 하면 아닌 것이지 무에 그리 말이 많느냐.”

 “허나 두어 가락도 듣지 않으셨습니다.”

 “얼마 듣지 않은 걸로도 네 실력이 미천함을 알겠다. 어흠, 나가서 귀도 한 번 다시 청소해야겠구나.”

 

 

 그제야 고개를 든 단매에게 준호가 숨을 삼킨다. 쌍꺼풀이 없어 얇은 눈 안에 마치 사각형처럼 홍채가 가로로 벌어진다. 짐승을 연상시키는 눈에 준호가 움찔, 뒤로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범신이 씩 웃는다.

 

 

 “오라, 드디어 네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요망한 것아.”

 “말씀을 먼저 심하게 한 것이 뉘신데 그러시는지요.”

 

 

 손가락으로 가볍게 농현한 줄만으로 알았는데 팍, 하고, 겹겹이 꼬였던 선이 터져버린다. 저 가는 몸에서 어찌 그런 힘이 나올까 싶은 통에 범신은 오히려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다가선다.

 

 

 “네 실력이 그밖에 안 되는 것을 내 어찌 거짓을 말하랴. 오늘부터는 침소에서 나오지 말고 금이나 연습하거라.”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난다. 무심코 눈을 돌린 단매는 범신의 소맷자락을 보고, 정확히는 그 손에 감긴 묵주를 보고 몸을 떤다. 그 떨림에 담긴 것은 명백한 공포와 분노.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구슬더미를 왜 저리 두려워하는지 알 턱이 없는 준호는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기류 속에서 잠깐 제 손목 속 묵주를 쥔다.

 

 

 “, 순순히 이리 오너라. 너 정도 충분히 묶을 실력이 되느니.”

 

 

 원래도 몸집이 작다 할 수는 없는 이였다. 그런 그가, 작정을 하고 다가서니 호롱불빛에 비친 그림자까지 겹쳐 위압감에 숨조차 막혀왔다. 박력에 밀려 꼼짝도 하지 못하던 단매가 이를 악물고 범신 앞에 버티고 선다. 긴박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항시 몸에 지니고는 있으나 정확히 어떠한 용도인 줄 몰랐던 그 묵주를 손에 꿴 채 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 외람되지만 묶기에는 좀 짧지 않겠습니까.”

 

 

 방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을 듣자 저도 모르게 범신의 기운이 사그라진 찰나, 단매가 그 소맷자락 옆으로 몸을 틀어본다. 그러나 엉겁결에 묵주를 꿰어 든 준호의 손이 단매의 손목을 부여잡고, 단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아가, 핏덩이인 줄 알았더니 용케 도움이 될 때도 있구나.”

 

 

 자연스레 준호의 손에서 묵주를 빼어내, 무릎을 꿇은 단매의 목에 걸어주며 빙긋 웃어 보인다. 그와는 정 반대로, 단매는 목에 묵주가 걸리자마자 마치 칼이라도 진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 움직이지 못한다. 괴로워 보이는 숨소리에 준호가 눈썹을 찡그리고 범신을 쳐다보았지만 그 시선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단매를 번쩍 안아 제 한쪽 어깨에 걸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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