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침이 되었고, 뜬 눈과 기도로 밤을 지새운 범신은 벌건 두 눈으로 첫 닭이 울자마자 잠든 준호를 걸머지고 단매의 처소 문을 열어젖힌다. 하품을 참지 못하고 청소를 하던 머슴이, 놀란 토끼 눈으로 두 사람의 태를 번갈아 바라보자 저와 마찬가지로 아마 한숨도 자지 못했을 채련에게 전갈을 한다.

 

 

 “채련에게 전하거라. 단매는 괜찮을 것이다. 오늘 부로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새벽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이었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이 발자국마다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움직임에 업혀 있던 준호가 웅얼거리며 그 등에 깊이 고개를 파묻는다.

 

 

 “아저씨, -괜찮아요?”

 “그래, 너 괜찮다.”

 “아니요, 아저씨 말이에요. 밤새, 누가 손을 잡아줬어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범신의 귀를 수놓는다. 나른하고, 낮지만 동시에 무구한 목소리다. 범신의 등에 파묻혀 몽롱한 목소리로 이야기 타래를 풀어놓는다.

 

 

 “아저씨 맞죠? 지현이가, 그렇게 된 다음에는 혼자 잤거든요.”

 “다 컸구나.”

 “아니에요, 혼자 자는 거 무서웠어요. 근데요, 같이 자달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 치헌이한테라도 같이 자달라고 하지.”

 “안 돼요. 지현이는, 지현이는 혼자, 매일 혼자 자야 하잖아요.”

 “...”

 “지현이를 혼자 보내놓고, 오빠인 내가 어떻게, 그래요.”

 “그래, 우리 준호. 장하다.”

 “근데 사실 너무 무서웠어요. 매일 밤, 지현이를, 괴롭힌, 개가 나왔어요.”

 “준호야.”

 “도망치려고 해도, 꿈이니까, 항상 신발이 없어서 발이 너무 아팠어요. 도와달라는 목소리도 안 나왔어요.”

 “마음속으로라도 불러보지.”

 “매일 불렀어요. 누구든지 좋으니 와달라고.”

 “안 와줬어?”

 “. 근데요, 어젯밤에야 겨우 왔어요.”

 “...”

 “누가 우는 내 손을 잡고, 밤새도록 내내 괜찮다고 해줬어요. 10년 만에.”

 “최준호.”

 “그거, 아저씨 맞죠?”

 “...”

 “아저씨 맞는 거죠?”

 

 

 대답 없는 그 뒤로 고른 숨결이 새근새근 내려앉는다. 범신의 등에서 마치 생전 처음으로 단잠을 자게 된 사람처럼 단정하고도 편안한 숨을 내쉬는 준호에게 범신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허위허위 걸어가는 등 뒤로 천천히 태양이 떠오른다.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제 집에 도착한 범신은 다시 한 번 더 자명루에 사람을 보내야 했다. 제 동백문 접선을 깜박, 단매의 처소에 두고 온 탓이었다.

 

 

 

 “듣기에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너는 혼자가 아니다.”

 

 

 ‘또 무슨 헛소리랍니까.’하며 한심해하는 눈빛을 보낼 줄 알았지만, 제 눈으로 보았던 어제 광경이 잊히지 않았던 준호는 순순히 범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제 결국 준호가 들어오지 않았던지라 밤새 잠 한 숨 못 자고 준호를 기다리던 치헌에게는 자명루를 나서는 길에 이미 전갈을 주었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범신의 집도 아닌, 크지 않지만 안팎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초가집이었다.

 

 

 “어제, 구마를 하던 도중에 마귀가 가까이에 있던 네 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무래도 그 말만큼은 믿기지 않았던지 반문한 준호는 새삼스레 제 손등과 몸을 둘러본다. 굽혀지는 긴 손가락과 하얀 팔뚝.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감각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범신은 그 손목을 끌어 소매를 조금 걷어준다. 손목에는 문모에게서 받았던 붉은 장미 묵주가 겹겹이 감겨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검은 색 장미가 군데군데 섞여든 묵주였다.

 

 

 “이 묵주가 네 안에 있는 놈을 자제시키고 있는 듯 싶으나, 얼마만큼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 있다간 네가 그 놈에게 삼켜질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것이다.”

 “-그럼, 죽어요?”

 “악마에게 삼켜진 영혼은 천국에도 연옥에도 가지 못한다. -미안하다, 준호야.”

 “아저씨가 왜...?”

 “내가 네 이름을 부른 탓에, 들어가 버린 듯 하다.”

 

 

 준호가 지닌 눈빛을 차마 마주 하지 못하고 범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당황해 만류하는 준호를 무시하고 장을 끊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맹세한다.

 

 

 “내 너를 책임지고 반드시 그 마귀에게서 되찾아 내겠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찾아내마. 그러니,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겠느냐.”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은 무저갱. 빛을 품을 수 없는 어둠 속에 담긴 것은 의지와 단호함뿐이었다. 말 그대로, 제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이루어내겠다는 결연한 세계. 한 점 반문도 허락지 않는 그 기세에 준호는 결국 그 날 오후 범신과 함께 문모에게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베드로 형제님. 어쩌자고 그리 무모한 일을 행하셨단 말입니까. 자칫 베드로 형제님의 목숨까지도 위험했습니다. 아니, 이미 뒤엣분에게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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