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모가 한숨을 내쉬며 마주친 선량한 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여실했다. 범신의 등 뒤에서 애꿎은 제 옷자락만 내려다보던 준호는 어젯밤 범신이 행한 일이 그리도 위험했던 행위였는지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대로 잠든 저에게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느낌이었지만 하기야, 생각해보니 젊은 여인의 몸이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움직인 것을 보면 저와 범신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었기는 한 듯 하다.

 

 

 “그리 되었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지금 이 분 몸에 계시다구요.”

 

 

 투명한 준호의 눈에 선의로 가득한 눈이 몰아친다. 문모는 맑은 눈으로 가는 준호의 손목을 끌어다 거기에 얽힌 장미 묵주를 느릿하게 바라본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구마 의식을 하는 수 외엔. 그리고 이 분도, 반드시 믿음을 가지셔야 할 터입니다.”

 “?!”

 

 

 갑작스러운 말에 한심하게 뒤집어진 목소리가 나왔지만 누구도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없었다. 범신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준호를 빤히 돌아본다.

 

 

 “들었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이어진 것은 형조의 망나니가 내지르는 긴 부정의 비명이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내 목숨이라도 바쳐 너를 구해주겠노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사이비 신자라고 밀고 당하는 것이 먼저겠습니다! 대관절 왜! 어제처럼 그, 단매라는 기생처럼 기마 의식인가 구마 의식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왜 믿어야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어제 실패한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더냐. 단매라는 기생에게 믿음이 없었고, 함께 그 의식에 있던 너 또한 믿음이 없으니 그리로 옮겨간 것 아니겠냔 말이다.”

 

 

 전략을 조금 바꾼다.

 

 

 “아가, 준호야. 너도 전략서를 읽어본 적 있지 않느냐. 네가 그 분을 믿지 않는 상태로 구마 의식을 한다는 것은 적진에 어떠한 무기나 갑옷도 없이 싸우러 간다는 말과 같다. , 혼자 적진 한가운데서 적장의 목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 그건, 그렇지만...”

 “또한 본디 이 것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학문의 일종이기도 하다. 신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셈 치고 시작해보는 건 어떠하냐.”

 “, 렇다고 한들, 저는 형조의 정랑이,”

 

 

 우물쭈물, 아까와 같은 기세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허리를 잡아챈다.

 

 

 “처음에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터.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내가 너를 저녁마다 찾아가마. 치헌이와 너의 집에도 내가 잘 말해둘 수 있다.”

 

 

 여기까지 몰아붙이자 차마 더는 거절할 수 없겠는지, 말을 안으로 삼켜가며 푹 수그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귓불이 엷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간 것은 승기를 잡았다는 기쁨에 도취된 범신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범신은 뻔질나게도 형조와 준호의 주변에 맴돌았다. 형조에서 만나지 못한 날에는 준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목덜미를 감싼 동정 깃을 들어 올려 주막이나 저 좋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기 일쑤라, 처음에는 기대하며 범신을 기다리던 준호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이거 의미가 있습니까?”

 

 

 또다시 이어진 납치 행각에 도저히 참지 못한 준호가 상을 내리쳤지만, 시끄러운 주변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흔한 듯 눈길만 한 번 흘끗 주고는 다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간다. 첫 만남, 두 사람이 동백 호수로 가는 길에 들렀던 바로 그 주막이었다.

 

 

 “너는, 의미가 없느냐?”

 “아니, , 저번에 들어보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야 한다는 것 같던데, 그냥 아저씨가 술 마시고 싶어서 나 꼬시는 거 같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보는 준호의 손목에 휘감긴 묵주는 저번과 비교하여 확연히 검은 장미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막걸리를 벌컥 벌컥 들이키며 그를 잠깐 훑어본 범신은 준호의 물음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저 목울대를 일렁인다. 잔에 남은 술을 모조리 마신 후에도 한 동안 입을 떼지 않던 범신은 참을성 있게 제 대답만 기다리는 준호를 향해 씩 미소를 짓는다.

 

 

 “, 이제 그럼 우리들의 하나뿐인 하느님을 믿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랍니까.”

 “네가 그러하니 이런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준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벌겋게 버무린 배추 겉절이를 크게 한 입에 털어 넣은 범신은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무작정 믿지도 않는 너를 앉히고 책이나 읽혀보았자 네 마음에 가닿기나 하겠느냐.”

 “그렇다고 이리도 무작정 술이나 퍼마시면 제가 그 학문을 퍽이나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리도 너에게 술을 사주며 잘 구슬리고 있지 않느냐. , 이 아저씨가 주는 잔이나 넘치게 받거라.”

 

 

 그때 보았던 기세나 다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능글맞게 말을 받아치며 준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툴툴거리면서도 술을 버리기는 아까운지, 홀짝 홀짝 마셔대며 불신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다.

 

 

 “너는 우리가 공부하려는 학문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 -갑자기 물어보시어도. , 그러니까 유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

 “그러하면 유교는 무엇이냐?”

 “춘추 전국 시절 공자님께서 주창하신 학문으로 인을 가장 근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이라는 것은-, 제 몸을 수양하고, 그를 통해 제 주변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범신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앉는다.

 

 

 “공자께서는 제자들이 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다고 했는데, 저는 그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인이 없으면 효도 없고, 애도 없고, 덕도 없지요. 결국, 인이라는 것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테두리-정도로. 그게 제가 납득한 이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것인지 이제는 범신이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허면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무엇이냐니요. 사람이, 사람이지요. 이 지상에 태어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사람이지요. 우스운 질문을 다 받습니다.”

 “너희 집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복길이도 사람이더냐.”

 “사람이지요.”

 “그럼 복길이가 따라가는 삶은 무엇이냐. 제 본디의 행복이냐, 주인인 너희의 행복이냐.”

 

 

 그제야 잔에서 눈을 떼어 범신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엄격한 눈길이 저를 사로잡는다.

 

 

 “집안에 갇히어 화초처럼 저를 찾아주는 이만 오매불망 기다리며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녀자들도 따르는 삶이 있더냐. 그에게도 인이라는 것을 베풀어주느냐. 애초에, 인이라는 것은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말문이 막힌 준호가 대답하지 못하자 범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설령 인이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왜 누구는 평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추구할 방법조차 주어지지 않았느냐. 다 제각각 행복이 다를진대, 누군가는 평생을 타인의 밑에서만 일해야 하느냐. 그뿐이랴, 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인 것인지.”

 

 

 범신 또한 술이 오른 것인지 준호에게랄 것도 없는 말을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동백선을 쥔 손가락에 힘이 올라 하얗게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준호가 말없이 술잔을 들이킨다.

 

 

 “-좋습니다. 가봅시다. ‘사람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그게 뭔지, 한 번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호기롭게 술잔을 내려놓은 준호가 말을 끝내자 범신이 얼핏 시선을 들어 맞춘다. 짙으면서도 광막한, 알 수 없는 어둠이 슬픔처럼 드리운 눈. 그 눈에 홀리듯 준호는 입술을 깨물고, 빽빽한 슬픔이 새벽처럼 밝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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