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름하게 뜬 눈이 저를 쳐다보자 준호는 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저도 제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드밀어진 말에 오히려 용기가 생긴다.

 

 

 “, 만날 자기가 좋아하는 데만 가고, 나 가고 싶은 데는 한 번도 안 데려갔잖아요.”

 “허 참, 네가 먼저 말한 적은 있더냐? , 생떼만 쓰던 녀석이 말은 많구나.”

 

 

 그러면서도 딱히 거부하는 기색은 없다. 저를 보지만 동공보다 안 쪽을 살피는 듯한 그 눈에 일순 한 마디가 툭 내뱉어지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겨우 막아낸다. 그를 무엇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범신은 동백선을 펼쳐 제 입매를 가린다.

 

 

 “그래, , 꽃을 보고프다는 말이지.”

 “, 여자 같은, , 기생집 이런 데 말구요. , ! 진짜 꽃! 우리가 그 때, 빨간 동백 봤던 거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화가 치밀어 그렇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범신이 오히려 황당한 웃음소리를 낸다.

 

 

 “허허, 아니, 누가 기생집엘 간다든? 저 혼자 화가 나 그 야단이구나. 오냐, 알았다. 내가 명색이 동지사인데, 너 가고픈 데 한 군데 못 데려가겠느냐.”

 

 

 동백선을 소리가 나게 접더니 준호의 곁에서 반 발자국 앞서 걷는다. 찰랑이는 갓끈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 스치는 옷감 소리가 제 심장 소리를 가리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캄캄하게 이울지는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동백이 보이기나 하겠느냐마는, 사실 준호에게 동백 구경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눈매가 처연하게 고왔다. 기름하게 한쪽만 쌍꺼풀이 진 눈에는 물기가 번져갔다. 평소에도 사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선이 두드러지는 얼굴에 나른한 색기가 퍼져나갔다. 풀린 채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이 희게 질린 얼굴과 어울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 없이 붉은 입술이 제 입술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던 이유가. 찢겨진 꽃잎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애달픈 입술이 찰나로 닿아오고, 암흑 속에서도 별을 품었노라 믿게 하는 네 동공을 마주하면서 사실 범신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목덜미를 부드럽게도 훑어 내리는 그 손끝이 주는 감각에 몸이 떨리기도 전에 순간, 너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 생각하였다.

 

 

 “, 신 차려, 최준호!”

 

 

 멈칫하던 순간에 노성이 터져 나왔다. 둘 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누가 보았다면 웃음을 금치 못할 광경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진지했다. 준호는 여전히 예의 요염하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지우지 못 한 채였다. 물에 젖은 것인지, 혹은 제 타액에 젖은 것인지 물 위에 비친 붉은 초승달을 입술에 떠올리면서 준호는 다시 범신을 끌어안았다.

 

 

 “추워요, 아저씨. , 너무, 추워요. -무서워요, 아저씨.”

 

 

 일순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뚜렷한 무구한 눈에, 그리고 이어지는 그 끝말에 범신은 판단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래, 아가. 준호야. 네 무섭다면 내가, 그런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피가 번졌다.

 

 

 황망하게 범신을 밀쳐낸 것은 준호 스스로였다. 제 입술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틀거리는 불안정한 걸음으로나마 범신에게서 멀어진다. 교태 어린 자태는 어디로 가고, 비명이라도 지르듯 거칠게 울음 섞인 포효를 내뱉는다.

 

 

 “제기랄, , 돼요! 그러지 마!”

 

 

 여린 입술을 무참하게도 짓씹은 고통이 준 대가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준호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억지로 기어가며 범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귀신 들린 몸이에요, 당신과는 관계, 없잖아! 도망가, 도망가요! 이러다 우리 둘, , 죽어!”

 

 

 안개라도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으로 광경이 스쳐갔다. 유달리도 믿음직해 보이는 강건한 네 얼굴을 감싸 입을 맞추고, 젖은 혀를 섞고, 그리고 너를 끌어안은 채 붉은 동백이 한 아름 꽃을 피워낸 차가운 호수로 곧장 뛰어들던 나.

 

 

 그 모든 순간 중에서 역겨운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너를 죽이려던 내가, 너를 죽이려는 내 안의 마귀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준호는 고장 난 것처럼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무작정 범신에게서 멀어져갔다. 벗겨진 신발을 손아귀에 우겨 쥔 채 얼굴을 진창에 처박으면서도 기어가는 무릎은 멈추지 않는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한 치라도 더. 너를 죽이려는 나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

 

 

 “-아가, 준호야.”

 

 

 다시금 혼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네 목소리가 구원처럼 울렸다. 아니, 그저 너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까무룩 기절해버린 준호의 입술에서 달게 비친 피를 지워 등에 업으며 범신은 그저 묵묵히, 달도 없는 그 밤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당신이 서렸다. 당신이 아닐 리 없었다. 자정이 웅크린 장지문 너머 익숙한 그 그림자는 당신이었다. 사향보다 짙으면서도 묵직한 그 향기는 당신이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낮게 읊조리면서 짙은 당신의 향기를 애써 폐부에서 몰아내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날뛰듯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빌어먹을 심장은 여전히 가슴 속에서 나직하지도, 작지도 않게 멋대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이 모두 희게 새어버릴 때까지.

 

 

 너와 나는 서로가 거기에 있음을 알면서도 차마 한 마디조차 내지 못하던, 그런 찰나들이 너무나도 깊었다.

Posted by habanera_

블로그 이미지
habanera_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