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셨습니까.”

 

 

 이제는 왜 그리 조용히, 그리고도 잰 걸음으로 대문 뒤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저 온화한 인상의 선비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 만큼 제 표정을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준호는 미간에 새긴 세로줄을 펴지 않았다. 설득 당해 오기는 왔다만 생리적으로 드는 불편함과 이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인지 문모는 자연스러운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통 저에게 말씀을 많이 하셔서, 대체 어떤 학문이기에 이리 열심히 말씀을 하시나, 들어나 보는 심경으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무례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에 범신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나 싶었지만 문모도 여전히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 마음 이해합니다. 그럼 편히 계시다 가십시오. 저는 미사가 있어서 이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여 궁금하시다면 지금으로부터 한 식경 뒤에 예배당, 아니 뒤뜰에 있는 안채로 오시지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다. 제가 혹여 나쁜 마음을 먹고 여기를 뒤지거나 하면 어쩌려고, 꺼리는 기색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준호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범신을 쳐다본다.

 

 

 “원래 이렇습니까?”

 “네가 무엇을 물어보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은 좀 특이하긴 하구나.”

 “역시 그렇,”

 “평소에는 굳이 사람을 내보내지도 않으신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이지. 다만 그래도 들키면 곤란한 곳이라, 사람을 가리기는 하신다만.”

 

 

 당혹스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 준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범신은 느긋한 표정으로 제 옷자락을 다듬기도 하고, 손목에 걸어두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청에서 들어온 신기한 문물이 집에 잔뜩이라 하던 세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닌지 제 소맷자락에서 세세한 눈금이 잔뜩 새겨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본 범신이 몸을 일으킨다. 가늠할 수 없던 어둠은 어느 새 꼬리를 끌며 감추고, 그 눈 안에는 무구한 순진이 들어차 있었다.

 

 

 “가자, 핏덩아. 이제 미사 시간이로구나.”

 

 

 그 순간과 그 시간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준호 자신도 몰랐다. 다만 그는 남녀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고, 신분 구별 없이 앉은 그 자리에 제가 알던 우주가 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가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것인지 뒤집힌 하늘을 걷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몽롱하게 걸음을 옮기는 준호를 알아챈 범신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다음 날부터는 굳이 제가 찾으러 가지 않아도 저가 찾으러 오겠거니, 하는 웃음이었다.

 

 

 

 “세례, 안 받을래요.”

 

 

 높지는 않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쩡하고, 공기를 연소시켰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문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준호와 범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범신은 문모에게 눈짓을 하고 곰방대로 준호의 어깨를 톡 치더니 먼저 문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준호의 앞에서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든다. 성격대로라면 곰방대로 어깨라도 힘껏 내리치려나, 어깨를 움츠렸던 준호는 아무리 기다려도 범신이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올린다.

 

 

 “힘이 드느냐.”

 

 

 나직한 한 마디였다. 동시에 제 발언을 이해하는 말이기도 했다. 울컥, 홍채가 아려와 준호는 고요하게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 날 이후 문모에게서 교리 공부를 받을 때마다 준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더랬다. 태어난 것이 죄라 한들, 그 어여쁘고 어린 제 동생은 어떠한 연유로 개에게 물려야 했는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이유로, 왜 그 착하디착한 아이가 연옥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지. -차라리 저를 죽일 것이지. 검고도 큰 개가 무서워 제 어린 동생이 짓이겨지는 것을 빤히 보고도 혼자 살겠노라 도망친 큰 죄인이 바로 여기, 제 코 앞에 당도했음에도.

 

 

 세상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셨다던 예수님. 그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흠숭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도 불쑥 불쑥 치받는 물음은 결국 준호를 세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한참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준호를 기다려주던 범신은 느릿하게 손을 들더니 그 커다란 손으로 준호의 목덜미를 다정히도 두드려주었다.

 

 

 “네 잘못도 아니고, 네 동생-, 지현이 잘못도 아니다.”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몰려오는 감정들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네가 미워 준호는 네 손을 걷어내지도 못하고 숨죽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딘 햇살을 담아 아롱지는 눈물이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뺨에 투명한 선으로 이울진다. 그리고 준호는 제 귓가를 침범하는 차가운 기운에 잠깐 움찔, 귓가를 매만지며 얌전히 범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민해도 괜찮다. 네게 세례를 강요하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야고보 신부님을 믿고 교리 공부는 더 해보는 것은 어떠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준호는 턱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내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차마 놓지 못한 소맷자락을 그저 손가락 새 얽은 채로, 그 눈에 맺힌 눈물과 모든 슬픔은 여직 지우지 못한 채로, 준호는 오래, 그 소맷자락과 그 소맷자락에 엉긴 동백선을 놓지 못했다.

 

 

 결국 준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낯이 창백해졌던 준호였다.

 

 

 “아저씨, , 꽃 좀 보여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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