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다. 사이비로써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자들이다. 어서 끌고 가라.”

 

 

 분명 낯설어야 하는 목소리였으나 애통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익숙하다 못해 그립기까지 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가물어져가는 정신을 억지로 다잡으며 눈을 깜박거리자 다정하게 미소 짓는 범신의 얼굴이 시계 안에 가득 찼다.

 

 

 “약조는 지키었다, 아가토. -준호야.”

 

 

 언제나 불퉁하게 내뱉거나 저를 내려다보듯 하는 그 얼굴이라, 한 번이라도 다정하게 웃는 낯을 보고 싶다 했건만 저를 따스하게 바라보아주는 눈이 이리도 슬프기 그지없으리라는 예상은 하지 못했다.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방금 전까지 마귀에게 붙들려 있던 몸, 기나긴 구마 의식에 지쳐 나가떨어진 몸은 제 마음대로 움직여지질 않았다. 열린 문, 무정한 달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그 문으로 병졸들이 몰려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도.

 

 

 그 달빛 너머, 비통한 눈빛으로 어금니를 꽉 깨문 숙부-, 치헌의 얼굴을 감기는 눈 너머로 선명히 그려내면서도.

 

 

 “호조 참-, 치헌아.”

 

 

 바스러질 듯 꽉 깨물린 어금니 새로 오열을 억누르던 치헌이 오라를 받는 범신을 말없이 주시한다. 끌려가는 제가 어찌될지 그 끝을 빤히 알면서도 김범신 베드로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온화한 그 눈에 다정한 웃음까지 띄워내며 범신은 치헌에게 고개를 끄덕인다.

 

 

 “치헌아. 걱정 마라. 준호는 괜찮다. 그 아이는, 우리와 연관된 이가 아니다. 그러니-, 숙부인 네가 잘 설득해 다오. 괜히 나 따라 오지 않게끔. -나는 괜찮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후회하는 것은 오직-, 그 아이를 따라 가지 못했다는 것뿐이었건만. 내가 준호를 살릴 수 있었다니, 나는 그것으로도 너무나 충분히 이 삶을 보상받았다.

 

 

 잇지 못했던 순간들을 숨소리 사이로 삼키면서 범신은 고개를 숙이고 기도문을 왼다. 그 차분한 모습에 치헌은 결국 눈을 감고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린다. 싸리나무 울타리 너머 겁에 질린 눈으로나마 검은 돼지를 안아 들어 달려가는, 검은자위가 또랑한 아이조차 제 시야 안에 감겨들지 못하게끔.

 

 

 

 

 며칠 전, 처음 범신의 말을 듣고서 치헌은 들고 있던 술을 그 얼굴에 쏟아 부을 뻔 했다. 아니, 믿기지 않아 되묻는 것이 먼저였겠지만 그 진지하고도 강건한 표정에 의심은 저만치 밀어두는 수밖에는 없었다. 이제는 하나밖에 안 남은 제 조카를 서학이라는 사지로 몰아넣은 범신에게 목젖까지 치밀어 오르는 욕설을 초인적인 인내로 억눌러본다.

 

 

 “그래서, 내 손으로 조카를 끝장이라도 내라는 거냐. 이 새끼야.”

 

 

 엄격하지만 항시 아랫사람들을 따스하게 굽어보는 인격자라는 평을 받는 치헌이었다. 그런 치헌의 새로운 모습에 범신은 저도 모르게 설핏 웃음을 흘릴 뻔 하였으나 금시로 표정을 다잡고 주먹을 쥔다. 왼손에 잡힌 동백선이 부르르 떤다. 두터운 붓으로 그린 짙은 수묵화를 닮은 얼굴에 기나긴 침묵이 여백을 채운다.

 

 

 “그럴 리가 있느냐. 그러나-, 오래 살다 보니 최치헌 네놈한테 욕도 들어보는 구나.”

 

 

 느릿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펼치지 않은 동백선에는 여전히 가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다.

 

 

 “그만치나 오래 살았다는 뜻이겠지. -그러니, 나를 잡아가다오, 치헌아.”

 

 

 동공의 흔들림이 멎었다. 의문과 당혹이 서린 눈빛에 범신도 떨리는 눈을 조용히 마주한다.

 

 

 “네 조카, -, 아가토를 살리려면 그 수밖에는 없다. 내가 마음대로 네 조카를 데려간 게야. 그리하자. 그리하면, 준호는 살 방도가 있을 게다.”

 “설명을 좀 해보아라. 대체 무슨 말이냐, 너는.”

 

 

 오랜 벗의 진솔한 어투에 조금씩 분노는 삭아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범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 납득한 것도 아니었다.

 

 

 “설명한다고 네가 이해나 하겠냐마는, 네 조카를 살리는 수는 이뿐이다. 그러지 아니하면 그 놈한테 잡혀 죽든, 밀고를 받은 병졸들한테 끌려가든, 준호가 살아남을 방도는 없다.”

 

 

 단숨에 술잔을 들이킨다.

 

 

 “-이 부근 서학도 명단이 밀고 되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나와 준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는 이야기도.”

 

 

 온화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둥글고 고운 눈썹 아래 속눈썹이 긴 민 눈이 하얀 피부와 잘 어울렸으나, 연지를 바른 입술만이 피처럼 붉어 마치 그림 속 여인이 걸어 나온 느낌이었다. 사람도 별로 다니지 않는 육조대로 어스름 녘, 여인은 겁도 없이 범신의 곁으로 바투 다가섰다.

 

 

 “동지사 어르신이 맞으신지요.”

 “그러하다만, 뉘시오?”

 “제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사옵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오천 냥이니, 보름 후 술시까지 주 선비님 댁 앞에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굳이 주 선비, 즉 주문모 야고보 신부의 집을 언급했다는 것은 적어도 제가 서학도라는 것은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도 모르게 백단향이 나는 그 밤 속 준호가 떠오르자 등골이 섬뜩하게 곤두서는 느낌이었으나 부러 느긋하게 한숨을 쉰다.

 

 

 “어허, 오천 냥밖에 부르지 않았다니 심히 섭섭하나 다행이라고 해도 좋겠구나. 더 필요하지는 않느냐.”

 “-여전하네요, 그 구역질나도록 뻔뻔한 모습은.”

 

 

 돌아보는 장옷 사이로, 저를 쳐다보는 눈에는 시커먼 악의만이 차있었다. 아득하면서도 동시에 명징한 눈. 어렴풋한 기억을 자극하는 그 홍채와 마주하다 말고 범신이 나직하게 목소리를 냈다.

 

 

 “-, 나를 알더냐.”

 “여전히, 저만 올곧으시고 저만 높으신 사람이군요, -, 범신.”

 

 

 그리도 청일했던 정신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라고 느끼게도 하는 악의에 찬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가 두개골 안으로 뭉뚱그려지며 단 한 번도 삭히지 못했던 목소리와 겹쳐진다. 범신은 동백선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떠올리면서도 제 안에서 20여 년간 한 순간도 지운 적 없던 하나의 이름을 끌어올렸다. 그 이름이 입술에 올라앉은 순간 범신은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어찌해야 준호를 살릴 수 있는지 그 길이 제 앞에 환히 열리는 느낌이었다. 비록, 제 길이 가시면류관을 쓰고서 십자가를 짊고 가야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 초희.”

 “잊으셨다 해도 가증스러웠겠지만, 그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이름이 썩 달갑지는 않습니다.”

 

 

 둥글고 선했던 인상은 이미 뇌리에서 지워져버렸다. 아까와 같은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눈빛 하나로도 완전히 달라진 그 표정 그대로, 여인은 눈을 가늘게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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