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놈, 이리 와 앉거라.”



 귓가에 찡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낮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준호는 하얀 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목덜미를 움찔거리면서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풀이 죽어 고개를 조아리는 준호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호조의 참의답게 엄준하게 문책하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꽃구경을 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사실이더냐.”

 “아버님, 그것이 아니오라.”

 “그렇다면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아니, ...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닌지라.”

 “어허.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할까! 네가 나라의 녹을 먹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 벌써 콧바람이 들어 살랑거리느냐.”



 준호의 아버지인 치헌은 나라의 호구 조사나 기타 경제에 관련한 일을 맡고 있는 호조에 있지만 최근 형조의 낭관으로 임명 받은 제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아는 바였다.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임관을 한 것으로 보아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워낙에 유들거리는 성격에다 사내치고 예민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이미 형조 내에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준호에게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어준 지 오래라 하였다.



 “어디 한 번 변명이나 들어보자꾸나. 성균관 동기들과 꽃구경을 갔다거나 하면 오늘 내 너를 집에서 당장 내쫓을 줄 알거라.”

 “...그것이 아니오라, 아버님을 아신다던 분과 잠깐 대화를.”

 “누구를 말하는 것이더냐.”

 “, 범자 신자를 쓰시는 분께서 아버지를 아신다며, 형조에 가려던 저를 다짜고짜 끌고 가시지 뭡니까.”



 원래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제 관서인 형조로 바꾸며 준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치헌의 눈치를 보았다. 치헌은 준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가만 되씹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범신? 김범신이라 했단 말이냐?”

 “. 아버지랑 잘 아시는 분이라 말씀하시기에, 저 또한 당연히 그러한 줄 알고.”

 “그래, 네가 범신과 만났다는 말이지.”

 “아시는 분이 맞으십니까?”

 “내 그 사람을 모를 리가 있나. 허허, 그래, 범신이 준호 너를 알아보더라는 말이냐?”

 “, 알아보았다기보다는 이름을 말씀하니 -네가 그, 최치헌의 첫째구나, 하시고.”



 그가 저를 일컫던 형조의 망나니라는 말은 쏙 빼두고 준호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치헌은 준호가 범신을 만난 것이 마음에 드는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기분이 풀린 것을 깨달은 준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치헌이 얘기한 바에 의하면, 범신은 호조참판을 지냈던 김인회의 둘째 아들로 약관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능력을 인정받아 제 아버지가 참의로 있는 호조에서도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워낙에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인해 왕에게 잘잘못을 고하는 사간원에서도 은근하게 청을 받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호조도 사간원도 아닌, 아예 엉뚱한 춘추관 쪽으로 관직에 오르겠다고 말해 김인회가 골치를 썩혔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서양의 문물에도 관심이 많아 걸핏하면 새로운 물건을 사서 집안을 어지럽히기 일쑤였고 당시에는 연행사에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여 몇 번이나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현재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는 저로써도 발치에 닿을 수도 없는 범신의 기행에 준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치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그런 분과 알게 되셨습니까?”



 그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당시 호조에 있던 치헌은 범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김인회의 넋두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인회가 치헌에게 지시를 내리는 도중,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그야말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묵묵히 제 일을 잘해내는, 그야말로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듯한 치헌을 보며 내 아들이 너의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농담이나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 호조의 관끼리 따로 저녁을 먹는 날에는 저건 내 아들이 아니라 원수라며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인회가 몇 번이나 치헌에게 호소에 호소를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호조에 들어서는 범신을 보자마자 치헌은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서간을 떨어뜨리면서 호조참판의 원수라고 중얼거렸고, 이를 들은 범신이 저놈의 샌님 자식이라며 달려드는 걸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의 웃긴 작전이었던지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서로에게 호감을 샀다고.



 물론 지금도 가끔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기는 하나, 호조참의에 오른 치헌과 춘추관에서도 동지사에 오른 범신 둘 다 일이 너무나 바빠 제대로 얼굴 보는 날도 희미해진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치헌은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제게 망나니라는 말씀을 하실 게 안 된다는 이야기네요.”



 어딘지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가던 치헌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린 준호에게 엄한 표정으로 맹자에서 우정에 관한 내용을 찾아 모조리 베껴 적으라는 벌을 내리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 치헌에게 검사받기 전까지는 꽃구경은커녕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에 준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물가물한 눈으로는 촛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이라.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깨어 있으려니 영 몸이 쑤시고 눈이 피로했다. 아버지도 설마, 그냥 하신 말이겠거니 제 멋대로 생각한 준호는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위에 잠깐 내려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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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ㅏ아ㅏ아니 쓸 때에만 해도 분명히 이렇게 길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엔딩은 정해져 있습니다

5편이나 6편 이내로 끝마쳤으면 좋겠네요 흑ㄱ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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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배경

*범신준호(?)


 숨결이 고왔다. 나직하게 제가 왔노라 고하는 봄날은 뱉어내는 숨마저 향그러워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담장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담장 너머 야트막하게 흐트러지는 개나리가 눈이 부시도록 고왔다. 어저께 제가 들렸던 기생 선월이의 저고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선명한 노랑에 저도 모르게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어. 봄이 와 네가 핀 것인지, 네가 피어 봄이 온 것인지 모르겠구나."



 가지를 조심스레 들어보이곤 시라도 읊듯 개나리를 칭찬하는 느릿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선이 두텁고 사내다운 기백이 뚜렷한 외모로 얼기설기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는 손짓이 자못 위엄이 있었다. 입고 있는 도포의 아련한 구름 무늬, 갓끈에 매어놓은 화려한 비취와 호박에다, 길가에 핀 개나리를 칭찬하는 말마저 싯구를 연상시키게 하는 그는 과연 풍류가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흘끗 흘끗 자신을 훔쳐보는 여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처녀 아이의 치맛저고리를 연상시키는 개나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나리 가지를 함부로 따지 않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린 것은 사내 본인도, 사내를 훔쳐보던 여자들도 아닌, 이제 갓 약관을 넘긴 것처럼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었다.



 "댁께서는 아주 풍취가 좋으십니다?"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에게 들으니 썩 기분이 좋은 칭찬은 아니구먼."



 자연스럽게 들었던 개나리를 내려놓으며 사내는 어렴풋하게 새겨놓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제게 말을 건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매 폭이 넓은 짙은 남색의 도포 위에는 비취와 옥을 달아놓은 붉은 세조대가 우아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와 맞추기라도 한 듯 남색 바탕에 하얀 당초 무늬가 들어간 갓신까지, 누가 보아도 멋스럽게 차려입은 청년은 기실 차림새보다 생김새가 훨씬 인상이 깊었다. 날카롭게 허공을 눅히는 콧날과 어울리게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 한쪽 눈의 깊은 쌍꺼풀, 단정한 외모와 자태가 한층 더 돋보이는 청년은 사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사내를 따라 개나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 집 안쪽이 저와 관련이 있는 집이라, 그 개나리를 칭찬하는 말에 무심코 말을 걸었습니다."

 "-개나리가 워낙 이 색깔이 명랑하고 현저하여 나도 모르게."



 그러나 이미 시선은 개나리에 가있지 않다. 개나리를 바라보는 청년의 옆모습을 깊이감 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버릇처럼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웃음 서린 눈으로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우이. 내, 김범신이라 하네."

 "...저는, 최준호라고 합니다."

 "최준호? 혹시 자네가 최치헌네 첫째 아들, 형조의-"

 "저를 아십니까?"

 "...망나니 아닌가."



 내키지 않은 듯 손을 내민 범신과 악수를 한 준호는 아버지의 성함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깜짝 놀란 듯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곧 뒤이어지는 말에 소태를 씹은 듯 비틀리기는 했으나. 범신은 준호가 반응하는 모양새가 흥미로운지 짙은 눈으로 껄껄 웃으며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자네 춘부장 이야기라도 좀 들려주게."

 "아니, 제 부친과 아시는 사이시면..."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앞장서는 범신의 걸음에 맞추어 준호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저 집이 어떤 집인 줄 알고 그 담장 위에 핀 개나리가 무어라고, 칭찬하는 것이 얄미워 잠깐 농지거리를 건 것이 이리 큰 일이 될 줄이야. 제 앞에서 펄럭거리는 옥색의 도포 자락을 보며 준호는 새삼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신시(申時:오후 3시-5시)까지 이조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이리 된다면 아버지 몰래 도망나온 보람이 없어진다. 어찌 해야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배탈이라도 났다며 뒹굴까, 별 생각을 다 하며 앞서 가는 이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급작스럽게도 우뚝, 윤기 나는 말총으로 만든 갓이 멈춰선다.



 "좋은 곳이 예입니까?"

 "아, 아직 도착은 안 했네만 여기서 술 좀 사려 하네. 여기 탁주가 맛이 그만이거든."

 "저 술은 못 합니다."

 "예끼. 내가 자네 춘부장한테 다 얘길 들었는데."



 깨끗하게 동백 기름으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저와는 달리 봉두난발을 한 농민들이 땀냄새 들큰하게 풍기는 주막에서 탁주 두 병을 산 범신은 숫제 준호에게 술병을 다 맡기고 저는 한들한들, 유랑이라도 하는 듯 느긋한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갓끈과 세조대 끝에 매달린 비취와 홍옥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다 도착했네."



 자연스러운 손길로 준호가 옮긴 탁주 한 병을 다시 가져가며 먼저 시원스레 입을 축였다. 아무리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고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불만 어린 눈으로 범신을 빤히 바라보던 준호도 남은 한 병에 입을 대면서 낮은 감탄을 흘렸다.



 연못 가장자리가 몹시도 붉어 제가 잘못 보았나 눈을 두 어 번 깜박였지만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직 서늘한 산 그늘 아래 넓게 퍼진 호수 위에 붉은 꽃송이가 단정하게도 가라앉고 있었다. 엷게 퍼지는 찻향 같기도 한 동백 향기에 가느름하게 눈을 뜨고 있으려니 문득 범신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 붉은 동백은 처음 봅니다. 절경이로군요."

 "어떤가. 그 집 개나리보다는 낫나?"

 "...이제 개나리 이야기는 그만하십시오."



 한 번 더 병에 입술을 대며 퉁명스레 말을 뱉았다. 하지만 범신은 오히려 그런 준호의 모습이 더 흥미를 돋우는지 피식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개나리 핀 집 아래 뭐라도 묻혀 있나? 자네 첫사랑이 쓴 연서라도 들어있을지도 모르겠구먼."



 농담처럼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와 그 내용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노여움에 손이 떨려 술병 안의 술이 찰랑거리는 물 소리를 냈다. 온통 붉은 동백이 마치 그날의 핏줄기 같아 아무래도 평소처럼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개자식. 내가 형조의 망나니라고? 그러는 당신은 어디서 도망쳐 온 지옥의 옥졸이길래 나를 이리도 몰아붙여.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그 집에서요."

 "-자네 부친이 술을 많이 마시던 때가 있었지. 10년 전쯤 얘기인 것 같네만."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시지요. 이따위 얘기나 하려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옳아. 자네 이야기를 들으니 아귀가 맞춰지는 구만. 며칠을 집에 안 들어가고 주막에서 술이나 퍼지르는 것 같더라니."



 경멸 어린 시선이 몸을 훑는다. 그러나 범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쿨렁이는 물 소리를 내며 술을 마신다. 어쩌면 조금쯤은 웃는 표정으로, 뚝뚝 제 살점을 떨어뜨리는 동백과 그 위에 일렁이는 붉은 물 그림자를 안주 삼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개나리 밑에 묻혔나?"



 주먹이 떨렸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파고든 손톱이 손바닥 안에 동백 꽃빛으로 자국을 남기며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핏줄기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범신은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는 손을 휘휘 흔들어보인다. 마치 이제는 네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 다는 듯.



 "손바닥은 잘 소독하시고, 춘부장께 말씀 전해주시게. 조만간 뵙겠노라고."



 대답조차 하지 않고 크게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는 준호의 뒷모습 뒤로 소리도 없이 깊은 물속으로 잠기는 짙은 동백꽃 모가지가 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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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쓰다보니 장편이 될 거 같은데...

최근 조선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라 동양풍으로 쓰는 것이 즐겁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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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은 고요하게 아미를 들었다. 저주보다 낮은 밤이 머리카락 속으로 숨어들었다. 살짝 구부러진 콧날을 스치듯 만진 청년은 곤란하다는 듯 잠깐 입술을 벌리다가 숨 막히는 어둠이 폐로 짓이겨쳐오는 감각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최 아가토 부제님. -너 뭐하냐."



 '등신같이'라고 따라붙은 말은 이제 쉽게도 넘어갈 수 있었다. 그제야 겨우 길게 숨을 내쉰 청년은 뒤돌아본 장년의 남성을 향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아니, 뭐. 살짝 긴장해서 그렇슴다."

 "누가 핏덩이 아니랄까봐. 우리 그냥 밥 먹으러 온 거야, 임마."



 여전히 무시하는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 모를 기묘한 말투다. 최 아가토라고 불린 청년은 다시 앞장서 걸어가는 김범신 베드로 신부를 향해 슬쩍 주먹을 휘둘러보이고는 금새 아닌 척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낯선 발자국이 골목 속 악취 속에 휘감기는 것 또한 금방이었다.



 -"밥이나 한 끼하자."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애써 잊어보려 해도 해일처럼 밀려오는 악몽과 타들어가는 표피의 감각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기어이 최준호를 끌고 들어왔다. 각오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막상 잠들지 못하는 낮과 밤 사이에서 청년은 얼마나 짙은 혐오를 끌어 안았던지. 수단 너머 수척해진 몸을 직시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지속되던 중에 걸려온 전화였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밥이나 먹자는 인물은 어렵지 않게 추려낼 수 있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 타인이 감추고 있을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려는 그 말투는 그 사람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낮게 한숨을 쉰 준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술 안 마심다."

 -"널더러 마시라 하든? 핏덩이랑 마실 생각도 안 한다. 나오기나 해라."



 핏덩이. 처음 들었을 때 생경하고 분하던 감정은 지금 와서는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가만가만 씁쓸한 숨을 내뱉은 준호는 혜화역 주변 곱창집 이름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왔냐."



 바로 어제도 만난 듯 친숙하게 인사를 건넨 범신은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서는 축축한 골목길을 제 집 안방인 양 익숙하게 걸어 들어갔다.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며 준호는 마치 그 날로 되돌아온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 곱창이 괜찮아. 싸고, 양도 많거든. 참, 너는 술 안 마신다 그랬지?"

 "-이제 배워보려고요.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제 잔에 술을 따르다가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범신이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반쯤 어이없다는 눈길로 준호를 마주하던 범신은 피식 웃음을 베어물고는 넘실대도록 술을 따랐다. 붉은 띠를 두른 술병조차 두 사람 사이에서 웃음기를 띠고서 찰랑거렸다. 말없이 두 사람의 잔이 맞부딪치나 싶더니 순식간에 목을 화하게 태우는 액체가 위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참으며 짧게 소리를 냈다.



 "어린 새끼가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치고 말이야."

 "sacrátus lingua(거룩한 혀)."



 한 두 번 마셔본 솜씨가 아닌 듯 하자 범신은 준호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끔 튕기고 눈썹을 꿈틀거린다. 범신의 타박에 짧게 웃어보인 준호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넉살좋게 범신과 제 잔에 술을 붓는다. 소주 두 병을 비우도록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범신이었다.



 "아가, 니 밥 안 먹고 다니냐."



 다정스런 목소리였다. 전에 없이 온기 서린 목소리에 대답하려던 준호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말보다 먼저, 눈물이 새어나온 까닭이었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곱창을 바라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눈물이 고인 듯한 투명한 술잔을 바라보기도 했다. 곱창집이라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매캐한 연기에 눈이 매워,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는 거짓이 통할 듯도 했으니.



 밥. 안 먹고 다니냐고. 식사야 아주 기초적인 생존의 문제였겠지만, 그 생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귀를 막으면 네 개의 언어로 온갖 저주를 퍼붓던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떠올랐고, 눈을 감으면 피투성이가 된 채 울긋불긋한 눈으로 저를 노려다보던 소녀가 맺혔다. 그 존재 앞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보다, 어린 날을 후벼파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날 것으로 들이 밀어진 제 잘못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나 무서웠다. 너를 죽이고 내가 살아간다. 무구한 어린 양이었던 네 모든 생명을 사그러뜨린 채 내가 살아간다. -생존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너 대신 내가 죽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우리는 함께 죽어야 했다. 어찌 됐건, 내가 살아서는 안 되었는데.



 무의식 중에 밥은 거절당했다.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물로 입술이나 겨우 축여댔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몰래 사온 간식을 방으로 밀어넣어주기까지 했지만 두 어개나 들어가면 많이 먹는 것이었다. 억지로 먹어보아도 그대로 구토로 되돌아나오기 일쑤라 하루하루 말라가는 몸을 두터운 수단으로 감출 뿐이었다. 그러나 범신은 한눈에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옷 너머 드러난 팔을 몇 번이고 바라보다가 구워진 곱창을 준호 쪽으로 몰아놓았다.



 "먹어라."



 그리고는 술잔을 비운다.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을 단숨에 비운 범신은 준호가 곱창을 먹나 안 먹나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준호의 젓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에 떠밀린 준호는 천천히 곱창 하나를 집어 오래오래 씹었다.



 "-그리고, 살아야지."



 천천히 곱창을 씹는 준호를 바라보다 툭 이어지는 네 말에 기어코 오열이 터져나왔다. 다 큰 청년의 난데없는 울음에도 범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빈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다만, 마주앉은 자리에서 네 곁으로 자리를 옮기고서. 눈물 범벅이 되어 벌어지는 준호의 입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언어들이 붉게 상처 입고서 터져나갔다.



 살아도 됩니까, 제까짓 것이. 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어린 소녀가, 열 해나 채 살았을까. 그 어린 것을 죽이고 제가 살았습니다. 반대로, 어린 놈이 어찌 그리 영악했는지. 제 살겠다고 뛰어가는 그 발에 운동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죽어야 됩니다, 예, 죽어야지요. 살인자는 또 살인을 하지 않고서야 못 견딜 핏줄일 겝니다. 더러운 짐승 새끼가 더 살아 무엇합니까. 밥은 먹어, 무엇합니까.



 벌어진 입에서 씹다 만 곱창 찌꺼기가 오열과 함께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서 팔에 이마를 댄 채 몸서리치며 오읍하는 준호를 범신은 오래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런 위로도, 토닥거림도 없이 그저 곁을 지키고, 잔을 채우면서. 한참동안 이어지는 호읍은 천천히 잦아들고, 새어나온 눈물이 팔뚝 사이에 작은 길을 만들 때 쯔음 곱창은 이미 반절 넘어 타 있었다. 준호가 우는 동안 소주 1병 반을 넘게 비운 범신은 준호의 눈물이 잦아들자 손을 들어 주인 아주머니를 불렀다. 홀로 안절부절 못하던 주인 아주머니는 범신의 부름에 얼른 다가와 준호와 범신을 살폈다.



 "아주머니, 여기 탄 것 치워주시고. 소주 한 병이랑 곱창 2인분요."



 아주머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한다. 그제야 눈물을 그친 준호의 눈치를 보던 아주머니는 범신의 단호한 주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최 아가토, 최준호 아가토야."

 "-네. 여기, 있습니다."



 아직도 메이는 목을, 쑤셔오는 후두를 겨우 참으며 그 날처럼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슬쩍 미소를 띤 범신은 손을 뻗어 준호의 어깨를 감쌌다. 어깨 너머 전해지는 고요한 위로에 다시금 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어라. 살어야지.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



 무언가 말하려던 준호에게 술잔을 억지로 쥐여주고는 훌쩍, 뜨거운 달을 삼킨다.



 "그래야 죽은 네 여동생이 너를 덜 미워하지. 대신 살어라, 그러라고 보냈더니 하나도 재미없게 살면 얼마나 더 억울하겠냐. 예쁜 운동화도 사신고, 좋은 노래도 많이 듣고, 그리고, 밥도 챙겨 먹어야지."



 삶이란 먹는 것이다. 네 입술에 닿는 것 하나 하나가 너를 만든다. 네 몸 속 세포가 되어 살아가게 만든다. 뜨거운 밥알 하나를 오래오래 씹다보면 나오는 그 단 맛이 너는 믿어지느냐. 하루에 세 끼, 살아온 날을 넘어보면 까마득한 끼니를 무수히 때워오며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생명들을 삼키고, 감사해했는지. 떠오르지조차 않는 날들과 그 날들에 붙어오는 밥상을 떠올리면 우리는 언제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먹고, 감사해라. 잘 먹고, 잘 자고, 그리고 잘 살아야지.



 살아야 합니까. 그 무수한 끼니가 저는 무섭습니다. 언젠가, 내가 먹었던 그 밥들이, 생명들이 나를 원망하지나 않을까 불현듯, 문득, 나를 덮칩니다. 이까짓 한 사람, 작디 작기만 한 최준호. 이 존재가 살아 또다시 짓밟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고개를 작게 도리질 친 범신은 다시 구워진 곱창 하나를 집어 이번에는 숫제 준호의 입으로 집어 넣어버렸다. 그제야 눈물을 닦아낸 준호는 범신이 입 속으로 투척한 곱창을 어물거리다 씹기 시작한다. 범신은 준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속삭이듯 말한다.



 "그래. 그 두려움 모두 네 것이다. 언젠가 우리를 덮칠 그 두려움과 외로움 모두, 온전히 네 것이다. 그러니 먹어야지. 그 생각 모두, 먹지 않고서야 할 수도 없는 생각들이다. 안 그러냐."



 너털웃음을 터뜨린 범신은 보란 듯 크게 입을 벌려 곱창 몇 점을 단숨에 씹어 넘겼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호도 천천히 한 점 더 집어 입 속에 넣는다. 그러다 점점 속도가 붙어 결국에는 기어이 곱창 한 판을 모두 비워낸다.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포만감에 준호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진다.



 "밥, 잘 먹고 다녀라."



 범신이 계산을 마치고 뒤늦게 가게 밖으로 나왔다. 식후엔 이게 최고지라며 담배를 삐뚜름하게 피워 문 범신이 짧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한 마디 툭 뱉고 먼저 휘적 걸어가버린다. 순식간에 아득해지는 그 뒷모습에 준호는 깊은 허기를 느끼며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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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제들 4차 찍은 유일한 영화입니다....... 넘나........ 사랑스러운 참치 어빠..........

2기 소취........ㅠㅠㅠㅠ

개인적으로는 처음 12형상들에서 최준호 아가토가 가졌던 트라우마도 차용해보고 싶어요 (.. *)

Posted by habanera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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