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1. 21:05 2차 끄적
[하이큐/다이스가카게] 고백 上
"다이치 괜찮지 않니?"
"아, 배구부 주장? 글쎄. 너무 꽉 막힌 거 같지 않아?"
모르면 입이나 다물어, 젠장.
그러나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한 욕설을 애써 누르며 스가와라는 성큼 성큼 여자 아이들을 앞질렀다. 어릴 적부터 절친한 사이로 지내왔던 다이치였건만, 그를 볼 때마다 미묘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 것은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였다. 물론 곁에 있으면 항상 편안하고 숨길 것 없는 좋은 친구임은 다름 없지만 최근 들어 멍하니 다이치를 생각하게 된다거나, 갑자기 다이치를 보면 가슴이 뛴다거나 하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몇날 며칠을 고민했던 스가와라는 결국 이 감정이 다이치를 향한 애정임을 인정해야 했다.
"스가. 요새 왜 이리 빨리 가?"
"아, 넌 뒷정리하고 오니까 늦잖아."
"그런 것 치곤 날 피하는 느낌인데?"
"짜샤. 내가 왜 널 피하냐? 뭐 잘 못 먹었냐?"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으며 받아쳤지만 새삼 다이치의 빠른 눈치에 식은땀이 흐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스가와라를 빤히 바라보던 다이치는 씨익 웃더니 등을 툭 친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다마는 말할 생각 나면 언제든지 말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고는 준비실로 들어가버린다. 그 한 마디에 이토록 붉어진 얼굴을 보이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라며, 스가와라는 그 자리에 주르르 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고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다. 하얀 얼굴에 살짝 열기 오른 복숭앗빛 뺨이 스스로도 부끄러워 손으로 부채질을 하고 있으려니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 스가 선배?"
"앗."
최근 세터로 들어온 1학년 후배가 주저 앉은 스가와라가 신기하다는 듯 내려다 보고 있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의 시선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눈 꼬리가 올라가 빈 말로라도 첫인상이 좋다고는 볼 수는 없었지만 함께 있다보니 보기보다 예의 바르고 성실한 녀석인 것을 알게 되었다. 스가와라는 붉어진 뺨을 애써 숨기며 성실한 후배에게 씨익 웃어 주었다.
"괜찮으심까?"
"어, 아냐아냐. 잠깐 현기증이 나서. 하하하, 얼른 집에 가야지?"
"...예. 조심히 가십쇼."
그리고는 물끄러미 멀어지는 스가와라의 등을 쳐다본다. 의외로 여린 등이 검푸른 밤 너머로 서서히 녹아든다.
"코우시?"
"-하, 응?"
"약이라도 먹었냐, 요새 왜 이리 맥을 못 추냐?"
정신 없이 잠들어 있던 스가와라는 다이치가 부르자 번쩍 눈을 떴다. 그런 스가와라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다이치는 들고 있던 우유를 책상 위에 둔다. 본인 때문에 고민하느라 제대로 못 잔다는 사정을 말할 수 없는 스가와라는 힘없이 웃으면서 우유를 땄다. 시원하고 고소한 우유를 두어 모금 마시니 멍했던 정신이 그나마 명료해졌다.
"약 좋아하네. 봄이라 그래. 춘곤증인가 보다. 냅둬. 한 숨 더 자려니까."
길게 몸을 뻗어 기지개를 키면서 하품을 했다. 졸린 척 엎드려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다이치 덕에 빨개진 뺨을 애써 감춘다. 그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이치는 아예 앞자리에 앉아 스가와라의 앞에 턱을 괸다. 모르는 척 잠들려던 스가와라는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다이치를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났다.
"뭐야, 이 자식아!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거기 멍하니 앉아 있지 말고."
"으와, 깜짝이야. 왜 그리 화를 내고 그래?"
"너 때문에 거슬려서 잠을 못 자니까 그렇지."
궁시렁거리면서 뒷통수를 긁적거리는 스가와라를 빤히 보다가 다이치가 불쑥 말을 걸었다.
"스가와라. 부실 가기 전에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잉?"
무어라고 말할 틈도 없이 일어나 자리로 간다. 스가와라는 그런 다이치를 보다가 이마를 찡그리곤 다시 책상 위에 몸을 뻗었다. 걸어가는 그 등을 보자 둔한 녀석, 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지만 또한 좋아하는 사람을 보자 비어져 나오는 웃음도 어쩔 수 없었다. 피식거리면서 선생님이 올 때까지 조금 더, 잠을 자기로 했다.
"무슨 일이야?"
"너, 요새 많이 피곤해보이잖아. 기다리려고 했는데-."
"별 거 아니라니까. 춘곤증이라 그래."
툭 말을 끊어버리고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결코 본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고민임에도 저리도 걱정하는 다이치에 새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 심장을 누르면서 스가와라는 체육관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남겨진 다이치는 몇 번이나 스가와라를 향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결국 머리를 긁고 운동화로 땅을 끄적였다.
그리고는 스가와라의 뒷모습을 와락 끌어안았다.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스가와라를 알 리 없는 다이치는 스가와라의 귓가에 조심스레 숨을 불어넣는다.
"좋아해, 코우시."
"엉?"
"좋아해.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참을 수가 없을 만큼. 좋아해, 좋아해. 스가와라 코우시."
갑작스러운 고백에 입만 뻐끔거린다. 그러나 전해지는 다이치의 고백은 아플 만큼 진심이라서, 스가와라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색이 엷은 홍채에 뜨거운 이슬이 괴이다가 뺨을 타고 굴러 떨어진다. 스가와라의 목을 감은 다이치는 대답 없는 스가와라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본다.
"미안, 코우시. 당황스럽겠지만 참을 수 없었어. 뭐 지금 바로 대답해달라거나, 너한테 부담 주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 나는 그냥, 그냥 -이런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어."
"-고마워."
"뭐라고?"
"고마워, 다이치."
돌아보는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보석보다 아름답게 열린 눈물에 다이치는 숨을 들이키고는 스가와라를 꼭 끌어 안았다. 목덜미와 귓가로 무너지는 뜨거운 물기가 가늘고 끊임없이 이어졌다. 스가와라는 다이치의 품에 안긴 채 오래오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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