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그런 느낌은 깡그리 무시하는 준호는 최근 한성에서 일어나 간단한 치정 싸움으로 판결난 서간을 다시 검토하느라 그 고운 눈매가 찌푸려져 있었다.




 “오셨는가.”

 “뭔 일로 불렀다요?”




 간단한 치정 싸움이었다고는 하나 그 당시에는 나름 한양에서 잦은 소문을 만들어 냈다던 사건이었다. 지금에야 피해자였던 여성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 서로 간 합의로 무마했다고는 하나 어쩐지 찝찝함이 느껴졌던 터라 부른 다모였다. 자주 만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래 말버릇이 그런 것인지 아니면 형조의 망나니라고 익히 들은 탓인지, 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다모 남순이 소맷자락을 끌어내리며 눈매를 치떴다.




 “아니, 이 사건 말이야. 둘이서 잘 해결했다고는 하는데, 이럴 수가 있나?”

 “, 그 사건요?”




 심드렁하게 준호의 말을 받아 넘기나 싶더니 서간을 확인하고 알겠다는 양 갑자기 생기를 띤다.




 “그게 긍께 신기하다 요 말이요. 아니 우째 여자 힘이 그만치 세단 말잉가? 한 손으로 팔이 뿌러졌다고 하니, 내 참말로 내 눈으로 보고도 신기허다, 이랬제!”




 사실 별 다른 일이 아닌 것도 맞았다. 애초에 가해자와 피해자 여성 둘 다 천민 신분이었고, 흔히 있을 수 있는 치정 싸움이었다. 다만 조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가해자 여성이 피해자 여성의 팔뚝을 한 손으로 부러뜨려버렸다는, 여성의 힘으로는 믿기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는 것 뿐. 피해자의 팔을 직접 확인했던 남순도 준호가 그 사건에 흥미를 가진 것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제 기억 속 피해자와 가해자 여성의 대화까지 설명하는 것이다.




 “하여튼간에 사내놈들 거시기가 문제여. 둘이 죽고 못 사는 줄 알았재비, 따른 기생년이 또 있는 줄 알았것어? 사랑한다, 기적에서 빼내준다 어쩐다 하던 마당에 딴 기생년헌티두 똑~같이 한다는 말에 확 눈이 허옇게 돌아뿐 기집이 쪼르르 쫓아간게제.”




 둘 사이에 언쟁이 오간다 싶더니 먼저 그 남자를 만났다던 여자, 단매라는 기생이 소리를 팩 지르더니 다른 기생의 팔뚝을 꾹 부여잡았다는 것이다. 그에 붙잡힌 여자가 죽는 소리를 내 확인해보았더니 이상한 각도로 꺾인 팔뚝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한다. 한 손으로 팔뚝을 부러뜨렸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두 기생 간의 체격 차이도 꽤나 컸다고 한다. 둥근 얼굴과 부드러워 보이는 몸태 덕에 항아라 기명을 정한 피해자 여성의 몸집이 단매의 두 배라고 했으니, 보던 사람들 입이 떡 벌어질 만도 했다.




 “, 다행시럽게 기방 행수들끼리 말도 잘 오갔고, 그 남자도 더 이상 안 보인다고 하니 문제야 어찌저찌 해결 됐기는 한데 신기헌 일은 맞지비.”




 사건을 맡아 여성들의 증언까지 확보한 다모에게서 직접 이야기까지 들었으니 이번 사건은 그 정도에서 해결된 것이 맞다고 보아야 했다. 준호는 여성의 힘으로 그럴 수가 있나, 몇 번 곱씹어보다가 천천히 서간을 정리하고 가는 숨을 뱉었다.




 “근디 이상헌 것은 맞긴 맞는 게, 고 단매라는 기집이 요새 부쩍 그런 일에 연관된단 말여.”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원체 얌전시런 기집이었다던디, 요사이 고 기집이랑 얽힌 놈들이 몇 놈 돼. 아 뭐 노류장화 한 놈이 꺾든 열 놈이 꺾든 벨 일 아니라 허지만, 갑자기 지명도가 높아졌다 그러대? 그래서 기생들 사이에서 좀 말이 도는 가베.”

 “...”

 “아아니, . 뭐 낯쩍 반반허면 그렇게 되는 게 맞기는 헌디, 고 기집이 또 앙칼져 싸나워부러. 수군대는 걸 못 견딘다대? 몇 기집이 고 기집 손톱 맛을 봤다허던디, 또 그 상처가 고렇코롬 깊다 드라고. 얄쌍허니 생겨가지구 힘이 보통이 아니대.”




 서간을 정리하던 준호의 손이 멈칫했다.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순은 제 허리춤에 찬 칼을 톡톡 치더니 몸을 쭉 뻗어 일으켜 장난스런 미소를 입가에 씨익 떠올렸다.




 “형조 망, 아니 형조정랑, 께서는 부~디 고런 얄쌍헌 기집헌티 샅 물리는 일 없이 조심허쇼잉. 그러라 내 말 더한 것이니께.”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발로 문간을 뻥 차고 시원스런 몸짓으로 형조를 빠져나간다. 그런 뒷모습에 정신이 팔릴 겨를도 없이 준호는 서간을 쥔 채 생각에 잠긴다.




 가는 여성의 손으로 제 몸집의 두 배가 되는 여성의 팔을 부러뜨린다? 그것으로도 꽤 신경이 쓰이는 부분이지만 갑자기 지명도가 높아진 점, 갑자기 바뀐 성격까지 한 번 눈길이 가자 신경 쓰이는 부분이 턱 없이 많아진 느낌이었다. 습관처럼 제 관자놀이를 긁적거리던 준호는 조용히 읊조리듯 한 글자를 말했다.




 “-약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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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물 쓰는 건 재미있지만 경국대전을 모조리 섭렵하지 못한 바, 오류가 많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D

조선에서 모티브를 따온 건 맞지만 얼기설기 꿰어맞춘 졸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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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시간은 깊어가는 삼경. 풀벌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까만 어둠을 한 줄기 촛불로 찢어발기기에는 역부족이구나, 준호는 가만가만 단정한 입술을 다물며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온기를 품은 봄바람이 새겨진 어둠은 벌써 준호의 긴 속눈썹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자네 첫사랑이 쓴 연서라도 들어있을지 모르겠구먼.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조차 모호하게 만드는 어둠 속에서 준호는 무의식중으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쥐었다. 잊은 줄 알았던 상처가 따끔거리며 아가리를 벌려 어둠을 삼켰다. 감지 못한 눈꺼풀 너머 어둠은 긴 머리채를 빗겨 내리다가 물그림자 위에 엉겨오는 동백처럼 준호의 목덜미를 조르듯 내려앉았다.




 -오빠! 살려줘, 오빠, 오빠!




 열 살. 겨우 그 나이였다. 제가 서당에 다녀오면 산들바람처럼 제게로 와 오늘은 무엇을 배웠냐며 재잘거리던 아이였다. 오빠에게 주려고 만들었다며, 서툰 솜씨로 수를 놓아 손수건을 수줍게 건네주던 아이였다. 나는 매일처럼 네 빨간 댕기를 당겨 뺏으며 놀렸지만,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풀꽃 냄새가 나는 듯도 한 그 빨간 댕기가, 내 어여쁜 누이를 예뻐하는 내 마음처럼 고운 것 같아 좋아했다.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온 네 뒤에 숨어 너를 놀래키다가, 오늘은 서당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 훈장님께 혼났다는 말을 하면 너는 한참을 주먹으로 입을 막으며 방울 같은 웃음소리를 흘려보냈지.




 말을 할 것을.




 새파랗게 눈이 시려 뜨거운 것이 관자놀이를 적셨다. 지연아. 10년 전 이래로 한 번도 입 밖에 내보지 못했던 이름이 제 목덜미를 틀어쥐는 어둠 속으로 지독하게 스며들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나를 죽여주련? 부모님께는 단 한 번도 말해보지 못했던 소망이 허무하게 제 후두 안으로 삭아드는 것을 느끼며 준호는 제 발꿈치 께가 뜨끈하게 아려오는 것을 생각했다. 그 때 벗겨진 갓신이 무슨 색이었더라. 아마도 제 눈을 가린 어둠처럼 핏기 어린 암홍색이었겠거니, 조용히 오열하듯 입을 틀어막는 것이었다.




 “아니 우리 호조의 망나니가 오늘은 무슨 일로 낯 색이 어두우십니까?”

 “-아닙니다. 어젯밤 잠을 설쳐서.”




 장난스럽게 농을 건네는 좌랑의 말에 느릿하게 대답하고 제 자리로 향하였다. 그러다 문득 미간을 찡그리며 거칠게 서간을 내려놓았다.




 “아니, 그런데 그런 사람이 나한테 망나니라고?”

 “어이쿠, 깜짝이야! ...아니, 정랑께서 형조의 망나니라는 건 육조 사람들 다 아는 말 아닙니까. 뭘 새삼스레.”




 청소나 잔심부름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는 무심이 형조 내에서 오늘 보아야 할 서간을 들고 오다 말고 큰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대답했다. 나이도 저와 비슷하고 마음 씀씀이도 무던하여 평소 편하게 농을 주고받는 무심이 그렇게 말하자 준호는 그린 듯 우아한 눈을 들어 무심을 빤히 쳐다보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뭘 그렇게 망나니짓을 하고 다녔다는 거지?”

 “, 아침에 늦게 오시는 것이야 예사에다 점심만 되면 졸지 않으심까. 잠깐 들리셨던 호조 참의 어른 앞에서 잠꼬대를 할 때에는 쇤네가 더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슴다.”

 “, 밤에 잠을 못 자게 만드는 것이 누군데 그래. 아버지가 매일 밤 내리는 벌이 뭔지 무심 네가 알면 까무라칠 테다.”




 어제의 일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치헌이 주는 벌은 대개가 사서삼경 중 하나를 정해 구절을 베껴 쓰는 것이었다. 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쩔 때에는 그 내용을 토대로 시조와 글을 써내라 하니, 이거야말로 머리에 쥐가 저릿저릿하게 나도록 만드는 주범이었다. 형조에서 시원찮은 자신의 모습을 제 나름 변명하는 준호가 불퉁하게 볼을 내밀며 불평을 늘어놓자 무심은 두터운 손으로 그 곁에 물 잔을 내려놓으며 헛헛한 웃음을 지었다.




 “거기다 예리하다 못해 예민하기까지 하시니, 망나니보다야 형조의 애기씨가 더 어울리시겠습니다.”

 “아서라. 지금 누구 앞길 막으려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것보다, 어제 보던 사건은 어떻게 됐어?”

 “-그러네요. 이 성격에는 확실히 애기씨보다야 망나니가 더 어울리지요. 아무튼 자료는 여기.”

 “고맙네.”




 감히 노비가 전랑인 참의의 아들을 놀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워낙에 형조의 일이 바빴고, 또 막상 농을 받는 본인이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어영부영 지나가는 말들이었다. 거기다-.




 “이 부분이 이상해.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아이고, 형조 망나니가 또 시작이시네.”

 “시끄럽고, 사건을 고한 사람과 만나 볼 테니 준비 좀 해다오.”




 태생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감각이 그렇게 이끄는 것인지 준호는 일을 이렇다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바쁘다며, 혹은 이상 없다고 그저 넘어가는 송사나 사건 하나조차 꼬박 제가 보고서와 피의자를 확인하는 것이다. 제게 넘어온 사건 중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는 기어이 사건 현장까지 가고, 현장을 검증한 다모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야 비로소 다음 사건으로 넘어가곤 했다.




 시간 감각이라던가 신분의 상하는 안중에도 없어하는 둔감함과, 일에 관해서만큼은 결벽이라도 일컬어질 만큼 민감하게 파악해내는 그 성향이 동시에 존재하는 덕분인지 준호는 단숨에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단어에는 분명 준호를 친근하게 여기는 느낌도 풍겼으나 그와는 별개로 법을 토대로 죄를 처벌하는 형조 특유의 고지식한 분위기를 깡그리 무시한다는 경멸의 뉘앙스도 은근히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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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이놈, 이리 와 앉거라.”



 귓가에 찡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낮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준호는 하얀 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목덜미를 움찔거리면서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풀이 죽어 고개를 조아리는 준호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호조의 참의답게 엄준하게 문책하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꽃구경을 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사실이더냐.”

 “아버님, 그것이 아니오라.”

 “그렇다면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아니, ...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닌지라.”

 “어허.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할까! 네가 나라의 녹을 먹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 벌써 콧바람이 들어 살랑거리느냐.”



 준호의 아버지인 치헌은 나라의 호구 조사나 기타 경제에 관련한 일을 맡고 있는 호조에 있지만 최근 형조의 낭관으로 임명 받은 제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아는 바였다.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임관을 한 것으로 보아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워낙에 유들거리는 성격에다 사내치고 예민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이미 형조 내에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준호에게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어준 지 오래라 하였다.



 “어디 한 번 변명이나 들어보자꾸나. 성균관 동기들과 꽃구경을 갔다거나 하면 오늘 내 너를 집에서 당장 내쫓을 줄 알거라.”

 “...그것이 아니오라, 아버님을 아신다던 분과 잠깐 대화를.”

 “누구를 말하는 것이더냐.”

 “, 범자 신자를 쓰시는 분께서 아버지를 아신다며, 형조에 가려던 저를 다짜고짜 끌고 가시지 뭡니까.”



 원래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제 관서인 형조로 바꾸며 준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치헌의 눈치를 보았다. 치헌은 준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가만 되씹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범신? 김범신이라 했단 말이냐?”

 “. 아버지랑 잘 아시는 분이라 말씀하시기에, 저 또한 당연히 그러한 줄 알고.”

 “그래, 네가 범신과 만났다는 말이지.”

 “아시는 분이 맞으십니까?”

 “내 그 사람을 모를 리가 있나. 허허, 그래, 범신이 준호 너를 알아보더라는 말이냐?”

 “, 알아보았다기보다는 이름을 말씀하니 -네가 그, 최치헌의 첫째구나, 하시고.”



 그가 저를 일컫던 형조의 망나니라는 말은 쏙 빼두고 준호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치헌은 준호가 범신을 만난 것이 마음에 드는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기분이 풀린 것을 깨달은 준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치헌이 얘기한 바에 의하면, 범신은 호조참판을 지냈던 김인회의 둘째 아들로 약관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능력을 인정받아 제 아버지가 참의로 있는 호조에서도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워낙에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인해 왕에게 잘잘못을 고하는 사간원에서도 은근하게 청을 받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호조도 사간원도 아닌, 아예 엉뚱한 춘추관 쪽으로 관직에 오르겠다고 말해 김인회가 골치를 썩혔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서양의 문물에도 관심이 많아 걸핏하면 새로운 물건을 사서 집안을 어지럽히기 일쑤였고 당시에는 연행사에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여 몇 번이나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현재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는 저로써도 발치에 닿을 수도 없는 범신의 기행에 준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치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그런 분과 알게 되셨습니까?”



 그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당시 호조에 있던 치헌은 범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김인회의 넋두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인회가 치헌에게 지시를 내리는 도중,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그야말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묵묵히 제 일을 잘해내는, 그야말로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듯한 치헌을 보며 내 아들이 너의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농담이나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 호조의 관끼리 따로 저녁을 먹는 날에는 저건 내 아들이 아니라 원수라며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인회가 몇 번이나 치헌에게 호소에 호소를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호조에 들어서는 범신을 보자마자 치헌은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서간을 떨어뜨리면서 호조참판의 원수라고 중얼거렸고, 이를 들은 범신이 저놈의 샌님 자식이라며 달려드는 걸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의 웃긴 작전이었던지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서로에게 호감을 샀다고.



 물론 지금도 가끔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기는 하나, 호조참의에 오른 치헌과 춘추관에서도 동지사에 오른 범신 둘 다 일이 너무나 바빠 제대로 얼굴 보는 날도 희미해진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치헌은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제게 망나니라는 말씀을 하실 게 안 된다는 이야기네요.”



 어딘지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가던 치헌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린 준호에게 엄한 표정으로 맹자에서 우정에 관한 내용을 찾아 모조리 베껴 적으라는 벌을 내리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 치헌에게 검사받기 전까지는 꽃구경은커녕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에 준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물가물한 눈으로는 촛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이라.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깨어 있으려니 영 몸이 쑤시고 눈이 피로했다. 아버지도 설마, 그냥 하신 말이겠거니 제 멋대로 생각한 준호는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위에 잠깐 내려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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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ㅏ아ㅏ아니 쓸 때에만 해도 분명히 이렇게 길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엔딩은 정해져 있습니다

5편이나 6편 이내로 끝마쳤으면 좋겠네요 흑ㄱ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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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배경

*범신준호(?)


 숨결이 고왔다. 나직하게 제가 왔노라 고하는 봄날은 뱉어내는 숨마저 향그러워 사내는 걸음을 멈추고 담장께를 빤히 바라보았다. 담장 너머 야트막하게 흐트러지는 개나리가 눈이 부시도록 고왔다. 어저께 제가 들렸던 기생 선월이의 저고리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선명한 노랑에 저도 모르게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어. 봄이 와 네가 핀 것인지, 네가 피어 봄이 온 것인지 모르겠구나."



 가지를 조심스레 들어보이곤 시라도 읊듯 개나리를 칭찬하는 느릿하고도 묵직한 목소리를 냈다. 선이 두텁고 사내다운 기백이 뚜렷한 외모로 얼기설기 자란 턱수염을 쓰다듬는 손짓이 자못 위엄이 있었다. 입고 있는 도포의 아련한 구름 무늬, 갓끈에 매어놓은 화려한 비취와 호박에다, 길가에 핀 개나리를 칭찬하는 말마저 싯구를 연상시키게 하는 그는 과연 풍류가 있는 사내였다. 사내는 흘끗 흘끗 자신을 훔쳐보는 여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처녀 아이의 치맛저고리를 연상시키는 개나리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나리 가지를 함부로 따지 않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린 것은 사내 본인도, 사내를 훔쳐보던 여자들도 아닌, 이제 갓 약관을 넘긴 것처럼 새파랗게 어린 청년이었다.



 "댁께서는 아주 풍취가 좋으십니다?"

 "새파랗게 어린 핏덩이에게 들으니 썩 기분이 좋은 칭찬은 아니구먼."



 자연스럽게 들었던 개나리를 내려놓으며 사내는 어렴풋하게 새겨놓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제게 말을 건 청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소매 폭이 넓은 짙은 남색의 도포 위에는 비취와 옥을 달아놓은 붉은 세조대가 우아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와 맞추기라도 한 듯 남색 바탕에 하얀 당초 무늬가 들어간 갓신까지, 누가 보아도 멋스럽게 차려입은 청년은 기실 차림새보다 생김새가 훨씬 인상이 깊었다. 날카롭게 허공을 눅히는 콧날과 어울리게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 한쪽 눈의 깊은 쌍꺼풀, 단정한 외모와 자태가 한층 더 돋보이는 청년은 사내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사내를 따라 개나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 집 안쪽이 저와 관련이 있는 집이라, 그 개나리를 칭찬하는 말에 무심코 말을 걸었습니다."

 "-개나리가 워낙 이 색깔이 명랑하고 현저하여 나도 모르게."



 그러나 이미 시선은 개나리에 가있지 않다. 개나리를 바라보는 청년의 옆모습을 깊이감 있는 눈으로 바라보던 사내는 버릇처럼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웃음 서린 눈으로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우이. 내, 김범신이라 하네."

 "...저는, 최준호라고 합니다."

 "최준호? 혹시 자네가 최치헌네 첫째 아들, 형조의-"

 "저를 아십니까?"

 "...망나니 아닌가."



 내키지 않은 듯 손을 내민 범신과 악수를 한 준호는 아버지의 성함이 낯선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깜짝 놀란 듯 모양 좋은 입술이 벌어졌다. 곧 뒤이어지는 말에 소태를 씹은 듯 비틀리기는 했으나. 범신은 준호가 반응하는 모양새가 흥미로운지 짙은 눈으로 껄껄 웃으며 그를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리 만난 것도 인연인데 어디 좋은 곳에 가서 자네 춘부장 이야기라도 좀 들려주게."

 "아니, 제 부친과 아시는 사이시면..."



 무어라 변명할 틈도 없이 앞장서는 범신의 걸음에 맞추어 준호는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야만 했다. 저 집이 어떤 집인 줄 알고 그 담장 위에 핀 개나리가 무어라고, 칭찬하는 것이 얄미워 잠깐 농지거리를 건 것이 이리 큰 일이 될 줄이야. 제 앞에서 펄럭거리는 옥색의 도포 자락을 보며 준호는 새삼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은 것을 겨우 참아냈다. 신시(申時:오후 3시-5시)까지 이조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는데 이리 된다면 아버지 몰래 도망나온 보람이 없어진다. 어찌 해야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배탈이라도 났다며 뒹굴까, 별 생각을 다 하며 앞서 가는 이의 뒤통수를 보고 있자니 급작스럽게도 우뚝, 윤기 나는 말총으로 만든 갓이 멈춰선다.



 "좋은 곳이 예입니까?"

 "아, 아직 도착은 안 했네만 여기서 술 좀 사려 하네. 여기 탁주가 맛이 그만이거든."

 "저 술은 못 합니다."

 "예끼. 내가 자네 춘부장한테 다 얘길 들었는데."



 깨끗하게 동백 기름으로 상투를 틀고 갓을 쓴 저와는 달리 봉두난발을 한 농민들이 땀냄새 들큰하게 풍기는 주막에서 탁주 두 병을 산 범신은 숫제 준호에게 술병을 다 맡기고 저는 한들한들, 유랑이라도 하는 듯 느긋한 걸음이었다. 걸을 때마다 갓끈과 세조대 끝에 매달린 비취와 홍옥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맑은 소리를 냈다.



 "다 도착했네."



 자연스러운 손길로 준호가 옮긴 탁주 한 병을 다시 가져가며 먼저 시원스레 입을 축였다. 아무리 아버지와 아는 사이라고 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불만 어린 눈으로 범신을 빤히 바라보던 준호도 남은 한 병에 입을 대면서 낮은 감탄을 흘렸다.



 연못 가장자리가 몹시도 붉어 제가 잘못 보았나 눈을 두 어 번 깜박였지만 모습은 그대로였다. 아직 서늘한 산 그늘 아래 넓게 퍼진 호수 위에 붉은 꽃송이가 단정하게도 가라앉고 있었다. 엷게 퍼지는 찻향 같기도 한 동백 향기에 가느름하게 눈을 뜨고 있으려니 문득 범신과 눈이 마주쳤다.



 "이리 붉은 동백은 처음 봅니다. 절경이로군요."

 "어떤가. 그 집 개나리보다는 낫나?"

 "...이제 개나리 이야기는 그만하십시오."



 한 번 더 병에 입술을 대며 퉁명스레 말을 뱉았다. 하지만 범신은 오히려 그런 준호의 모습이 더 흥미를 돋우는지 피식 한 쪽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 개나리 핀 집 아래 뭐라도 묻혀 있나? 자네 첫사랑이 쓴 연서라도 들어있을지도 모르겠구먼."



 농담처럼 들려오는 나직한 목소리와 그 내용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노여움에 손이 떨려 술병 안의 술이 찰랑거리는 물 소리를 냈다. 온통 붉은 동백이 마치 그날의 핏줄기 같아 아무래도 평소처럼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개자식. 내가 형조의 망나니라고? 그러는 당신은 어디서 도망쳐 온 지옥의 옥졸이길래 나를 이리도 몰아붙여.



 "제 동생이 죽었습니다. 그 집에서요."

 "-자네 부친이 술을 많이 마시던 때가 있었지. 10년 전쯤 얘기인 것 같네만."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 하시지요. 이따위 얘기나 하려고 부르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옳아. 자네 이야기를 들으니 아귀가 맞춰지는 구만. 며칠을 집에 안 들어가고 주막에서 술이나 퍼지르는 것 같더라니."



 경멸 어린 시선이 몸을 훑는다. 그러나 범신은 꿈쩍도 하지 않고 쿨렁이는 물 소리를 내며 술을 마신다. 어쩌면 조금쯤은 웃는 표정으로, 뚝뚝 제 살점을 떨어뜨리는 동백과 그 위에 일렁이는 붉은 물 그림자를 안주 삼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개나리 밑에 묻혔나?"



 주먹이 떨렸다. 제 화를 이기지 못해 파고든 손톱이 손바닥 안에 동백 꽃빛으로 자국을 남기며 아래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핏줄기에 짐짓 놀란 표정을 지은 범신은 남은 술을 마저 마시고는 손을 휘휘 흔들어보인다. 마치 이제는 네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 다는 듯.



 "손바닥은 잘 소독하시고, 춘부장께 말씀 전해주시게. 조만간 뵙겠노라고."



 대답조차 하지 않고 크게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돌아서는 준호의 뒷모습 뒤로 소리도 없이 깊은 물속으로 잠기는 짙은 동백꽃 모가지가 처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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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쓰다보니 장편이 될 거 같은데...

최근 조선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라 동양풍으로 쓰는 것이 즐겁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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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오버스 차용



 "씨팔..."



 나지막한 한숨과 섞여 욕설이 흘러나오나 싶더니 이내 차체가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앞좌석의 헤드를 주먹으로 후드린다. 그 서실에 앞에 앉아 있던 최상무의 고개가 깊이 수그러들며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익숙한 그 욕설과 폭력에 기사는 잠깐 브레이크를 밟나 싶더니 다시 엑셀로 속도를 높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태오, 뱀과 같은 눈빛을 가진 사내는 잇새로 짓이기는 욕설을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짜증스레 미간을 구긴 채, 제 뒤통수를 조짐스레 매만지는 최상무에게 말을 던졌다.



 "내가 꼭 가야 되는 겁니까?"

 "...예, 그, 실장님. -그, 형제 분들도 다들 자선 행사에 얼굴을 비치셨다고."



 나직하게 말을 읊조리자 이번에는 넓은 카시트에 털썩 몸을 눕히며 딱딱한 구두 밑창으로 소리가 나게 바닥을 두드려댔다. 이 천년 전에 벌써 뒈진,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놈의 생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 지랄들인지 당최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놈의 빌어먹을 크리스마스가 뭐라고, 이 추운 날씨에 굳이, 성당까지 가서 등신 같이 빙긋거리고 있어야 한단 말이냐고. 태오는 카시트에 깊이 몸을 묻은 채 어차피 지겹도록 웃어야하는 얼굴, 지금이라도 마음껏 구기자는 심산인지 눈치를 보는 최상무에게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술에 손톱을 대고서 창백하게 일그러지는 차창밖 풍경을 멍하니 주시했다.



 "-...합니다, 감사합니다, 조태오 실장님."



 깔끔하게 쓸어넘긴 머리에 단정한 수트, 거기에 미끈한 코트까지 차려입고서 수많은 카메라 세례에도 흐트러지지 않는 미소를 지으면서, 태오는 카메라를 그대로 주먹으로 박살을 내버리면 저걸 들고 있는 새끼의 안구에 박히게 되려나, 실제로 결과가 궁금해지려는 생각을 애써 억눌러야 했다. 쓰레기 같은 베타 새끼들. 소리라도 치고 싶을 정도로 조절하기 힘든 알파의 탐욕스러운 욕구가 언뜻 고개를 들려던 찰나, 다가오는 주교의 온화한 미소에 태오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곤, 냉혹한 기미를 모두 몰아냈다.



 "감사합니다, 조태오 실장님. 이번 기부는 올 겨울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별 말씀도 다 하십니다. 당연히 나누어야 하는 것을요."



 심장에는 커녕 뇌리에도 닿지 않아 목구멍으로 흩어져 버리는 말들을 지껄이다 문득 태오의 시선 끝에 무언가가 잡혔다.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저 뒤에서 제가 건넨 기부 박스들을 툭툭 치다가, 이내 다가오는 직원들에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빼는, 검은 옷의 사내. 멀찌감치 제 뒤로 떨어지는 눈길을 알아챘는지 따라 고개를 돌린 주교는 입술을 한 번 깨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저, 저 눔의 ..."



 뒤에 새끼가, 라는 말이 따라붙을 듯 일그러졌던 신부의 얼굴이 금새 평온해지더니, 태오에게 웃는 낯으로 인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가 귀를 잡아챘다. 꽤나 큰 키를 가진 남자는 신부가 제 귀를 아프게 잡아당기는 것이 억울한지 이리저리 몸을 비틀며 그 손길에서 벗어나려했지만 우악스러운 손에 결국은 포기했는지 얌전히 신부의 뒤를 따라갔다.



 "저, 실장님. 이제 가실 때가-."

 "아, 먼저 가요, 나는 여기서 더 볼 일이 있어서."



 행사가 끝나자마자 저를 데리러온 최상무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한 조태오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니까 분명히, 이 쪽...



 "-성모님, 지랄도 지랄이지요...? 돈만 내면 그 시꺼먼 짓거리들이 하얗게 변하기라도 한답니까?"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익살스러운 듯 높지 않은 목소리는 아까 보았던 찡그린 표정과 단정한 얼굴에 아주 잘 어울렸다. 붉은 벽돌로 지은 성당 벽을 끼고 돌자, 하얗게 눈이 내려 어둠이 휘황해보이는 그 공간에서,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상 앞에서 투덜거리는 남자의 긴 수단 자락이 먼저, 눈에 감겨들어왔다. 뒤에 태오가 온 줄도 모르고 한참 조태오의 악행을 줏어삼키던 남자가 후련하게 뒤를 돌아섰을 때, 마주친 그 뱀과 같은 시선에 소름이 오싹 돋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이런, 신부님. 신부님께서 그리 험한 말을 쓰실 줄은 몰랐는데요."

 "sacrátus lingua. ...최 아가토입니다."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준호는 입술에 성호를 그었다. 하얀 손가락과 대조를 이루는 그 빨간 입술 위로 그어지는 성호는 이를 데 없이 고혹적이어서, 태오는 잠깐 숨조차 멈추고 사내를 빤히 바라보았다. 저를 잡아먹을 듯 하는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눈썹을 찌푸린 준호는 짧게 목례하고 그를 스쳐지나가려 했다.



 "저기요, 신부님."



 손목을 잡자 눈 속에서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내리는 눈꽃이 설탕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은 착각이 드는 향기에 태오는 천천히 눈을 깜박거리다 헛웃음을 터뜨렸다. 준호는 낯설게 울리는 태오의 웃음이 마뜩찮은지 잡힌 제 손목과 웃음 짓는 태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부님, 혹시 맷돌 손잡이 알아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고 해요, 어이."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는데, 우선 잡은 이 손 좀 놔주시죠...?"



 당혹스러워하는 준호를 모르는 척 태오는 단 내가 풍기는 준호의 손목을 끌고 손등 위에 눈송이가 떨어지듯 말을 쏟아냈다.



 "맷돌에 뭘 갈려고 뭐 집어 넣고 맷돌을 돌리려고 하는데 손잡이가 빠졌네?! 이런 상황을 어이가 없다 그래요 . 황당하잖아."



 슬쩍, 눈이 가늘어졌다.



 "...존나, 신부님이 이렇게 야해도 돼요...?"



 순간적으로 준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알 수 있을만큼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헛웃음 치며 내쳤을 이 상황이지만 준호에게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오메가. 남자뿐인 신학교에서도 저를 지독스레 감고 돌던 그 구속 같은 단어. 잊으려 했던 단어를 상기시키는 문장이 튀어나오자 본능적으로 입술을 깨물며 저를 노려보는 그 붉은 눈가에 태오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을 닮은 그 하얀 로만칼라를 틀어쥐어 그 입술을 헤집었다. 동그랗게 뜨인 눈을 큰 손을 들어 가리곤 설탕을 녹인 듯 달큰하고 부드러운 그 입안이 부드러웠다. 마주한 입술과 뺨에 하얗게 내리는 눈송이의 시린 감각은 차마 마주닿은 혀와 입술의 뜨거움에 순간적으로 녹아 사라졌다. 능숙한 솜씨로 여린 치열과 새빨갛게 젖은 입천장을 차례로 얽은 태오는 흐트러진 홍채로 눈을 피하는 준호에게 쿡, 목 안으로 소리내어 웃었다. 침묵을 감아 떨어져내리는 낙설落雪은 성탄절을 맞이하여 장식된 화려한 빛을 삼켰다. 겨울에 흐트러지는 꽃잎을 닮은 눈송이 새로 두 사람의 호흡만이 거칠게 공간을 채웠다.



 "하...흐, 조, 조태오 씨... 이, 러시면 안 됩니다..."



 거친 숨결 새로 밀려나오는 준호의 목소리에 태오는 살풋 눈썹을 찡그리며 그와 시선을 마주쳤다. 이미 태오의 커다란 손가락은 준호가 입은 수단 단추 몇 개를 풀어헤치고 겨울 밤과 함께 슬금 그 가슴께로 디밀어지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저를 위험스레 감아도는 알파의 페로몬 향을 겨우 참아 헤뜨린 준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태오의 손을 쳐내고 제 수단 옷깃을 매만졌다. 저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주제에 맹랑하게 구는 준호에게 다시금 고르지 못한 웃음을 터뜨리며 제 머리를 쓸어넘긴 태오는 의외로 순순히 두어 걸음 물러나 고개만 까닥하곤 제 갈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 뒷모습에 긴 한숨을 쉬며 제 입술을 세게 문지른 준호는 몇 걸음 가지도 못해 제 덜미를 잡아채는 손길에 컥, 길지 않은 숨결을 토해내야만 했다. 온기는 온기이되,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하는, 귓바퀴를 느리게 핥아내는 짐승의 호흡.



 "아가토, 신부님. -나한테 이러고도,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



 이번에야말로 흥미가 식은 듯, 귓바퀴를 힘주어 깨문 태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아직도 몸에 남은 듯한 질척한 느낌에 잠깐 자리를 뜨지 못하고 멍하니 성모상을 바라보고 있던 준호도 뒤숭숭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갈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의 양치로도 씻어내지 못하는 그 감각에, 결국 소맥을 다섯잔, 연거푸 들이켜야하긴 했지만, 그저 그걸로, 저와 그 남자의 인연은 끝이라고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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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 눈 안으로 뜨거운 것이 괴어왔다. 용암을 연상시키는 그 뜨거움에 견디지 못하고 눈을 떴다. 처음 바라보게 된 것은 낯설게 하얀 천장.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하자 위로 당겨진 손목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직후 차례로 제 가슴팍의 십자가, 묶인 발목,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감각을 침범해 들어왔다. 떨리는 목소리로 유일한 구원을 불러보았다.



 "박범신, 베드로 신부님...?"



 대답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다만 굳은 표정으로 제 눈 위에 영대 자락을 올리기 위해 다가오는 모습만이 담길 뿐. 준호는 흘러내리는 눈물도 닦지 못하고 길 잃은 아이처럼 범신을 올려다 보았다.



 "신부님, 제가, -제가, 굴복하였나요?"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동시에 제 입에서 나는 말로도로의 썩은 내에 구역질이 밀려왔다. 폐까지 썩어버린 듯한 냄새에 어딘가 이마라도 짓찧고 싶은 심정을 겨우 참으며 준호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구마 사제가 악령에 들리다니, 이리도 유약할 수가 있나.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라면, 악을 쓰며 오열하고 싶기도 했다. 이마와 한쪽 눈을 덮는 자락이 느껴지자 준호는 이를 악물고 밀려드는 울음을 참았다.



 "아가토."



 그러나 저 물음에는 답해야했다. 울음을 참느라 꽉 눌린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으며 준호는 억지로 대답했다.



 "여기, 있습니다."



 바흐의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와중에 네가 침을 삼키는 소리는 유난히도 크게 들린다 하였다. 소리없이 눈물을 참던 준호는 그 소리에 흐느껴 울며 왼 팔에 이마를 기댔다. 덩치 큰 어른이 꼴불견이다 싶기도 했지만 마음만은 동생을 잃던 그 때와 다를 바가 없어 더욱 심장이 아팠다. 결국 누구도 구해낼 수 없는 것이 최준호 아가토의 본질이라면, 살아 무엇할까. 내게 깃든 악령과 함께 죽어버릴까. 준호는 몸부림치며 길고 긴 눈물을 토해냈다.



 "-그래서, 그 부마자는 어떻게 되었나요?"



 팔이 묶인 채 물어보았다. 겨우겨우 오열을 억누른 준호의 물음에 착잡하게 허공을 보고 있던 범신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듯 하자 준호는 눈썹을 찡그리고 다시 자세히 물어보았다.



 "왜 그, 양평 쪽에서 악령에 들렸다던-."



 묵직한 십자가의 무게가 가슴에서 느껴졌다. 저를 꾹 누르는 듯한 그 감각에 설마하며 범신을 올려다 보니 범신은 말 없이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아가토. 너는 2달 전부터 혼수상태였다. 영신이에게 구마 의식을 치룬 이후, 정확히 24일이 지난 직후부터."



 안타까운 듯, 가슴이 저미는 듯 낮은 목소리로 범신은 씹어내듯이 그리 말하였다. 범신의 대답에 한동안 말이 없던 준호는 별안간 지옥보다 헐거운 웃음소리를 토해냈다.



 "아하하, 씨발. 씨발같네요 진짜."



 그럼 이제껏 배워왔던 의식도, 너와 내가 차곡차곡 쌓아왔다 '믿던' 유대도 간데 없다는 말이구나. 가끔 몰래 학교를 빠져나와 네가 사준 맥주를 기울이며 낄낄대던 그 모든 순간도 사실은 환영일 뿐이라는 말이네. 눈가에는 투명한 물방울을 매단 채 나지막한 웃음을 토하는 준호를 한동안 바라보던 범신이 제 목에 봉을 들이밀자 준호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성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세상의 빛입니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아니 하고-."



 영신이 불렀던 그 노래가 귓가에 맺히자 끝내 범신은 차오르는 오읍을 억누르지 못하고 무릎을 내리 꺾었다. 준호는 흐느끼는 범신의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스스로 성가를 부르며 구마 의식을 도우려했다. 지금에야말로 개가 짖든, 제 발목을 물어뜯든 신경쓰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내 곁에 신이 있었다. 그도 아니라면, 박범신 베드로, 당신이 있었다. 우주 건너편보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개 짖는 소리가 슬그머니 귀를 쓰다듬다가 뇌리로 숨어들어왔다. 준호의 목소리가 천천히 잦아들듯 가늘어졌다.



 "정신차려, 아가토!"



 눈을 뜨자 이번에는 낯선 천장이 아닌, 개들이 노려보고 있는 양평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이다. 창문밖에서 불어오는 달빛이 식은 땀이 줄줄 흐른 준호의 이마를 싸늘하게 식혔다. 범신이 다급하게 준호를 일깨우자 그제야 겨우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린 준호는 자신도 모르게 제가 들고 있던 봉과, 그 봉 밑에 목을 붙잡힌 부마자를 바라보았다. 색색 가쁜 숨을 내쉬던 부마자는 준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찢어져라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최 아가토, 그대. 부마자가 된 기분은 어땠어?"



 온통 깔깔대는 웃음은 떨어진 별 조각을 닮아 소름 돋게 고막에 엉겨붙었다. 준호는 하얀 치아로 몇 번이고 깨물어 붉게 선혈색 꽃을 피운 제 입술을 닦지도 않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쓰레기 같더군. 그래서 쓰레기보다 못한 너, 이름이 무엇이냐."



 너를 구마 사제로 내세운 걸 후회하는 듯 깊은 눈으로 두 존재를 바라보는 범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더더욱 꺾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검은 개에 묶인 어린 준호로 남아 있다고 네게 동정받고 싶지 않았다. 눈물보다 깊게 턱으로 제 존재를 새기는 핏방울을 떠올리면서 준호는 다시 한 번 더 짓쳐 악마의 이름을 다그쳤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굽이쳐 제 이름을 물을 줄 몰랐던지 부마자의 눈이 당혹스레 벌어지더니 이내 모란빛으로 붉은 피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허우적거리면서 가파르게 숨을 뱉어내던 부마자는 짐짓 헐떡거리면서도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우스워라, 아직 그 날에서 벗어나지 못한 꼬마. 내 손짓 한 번이면 저 앞뜰의 개들이 너와, 저 소금 선 뒤 늙다리의 목덜미를 씹어 부술 테다. 그뿐인 줄 아느냐. 이 늙어빠진 할망구의 몸을 벗어나 아가토 그대, 그대가 보았던 환영을 다시 보여주마. 이번에는 실제로 말이지."



 깔깔대던 목소리가 피눈물과 섞여 혼곤한 암흑을 드리웠다. 채 삼키지 못한 밤은 별빛으로 얼룩진 머리카락을 시커멓게 쏟아내다가 마귀 들린 자의 웃음소리에 놀라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캄캄한 눈동자위를 드러냈다. 천지 간에 무너지는 어둠 속으로 준호는 조용히 돼지의 피를 이마에 십자가로 새기면서 입술을 열었다.



 "내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는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힘주어 목덜미를 눌렀다. 봉이 목을 틀어쥐자 유황과 몰약이 섞인 연기가 어둠으로 옹송그려 부마자의 몸을 감쌌다. 숨을 헐떡거리던 부마자는 결국 혀를 짓씹듯 준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제 이름을 토해냈다.



 "-소네일론."

 "소네일론. 이제 네 자리로 돌아가라."



 뺨을 타고 흐르는 탁한 침을 닦지도 않고 준호는 고요하게 읊조렸다. 경멸 어린 눈으로 빤히 준호를 바라보던 부마자는 마지막 저주를 뇌까리며 시린 미소를 지었다. 준호의 귓가에 와 닿은 그 저주는 누구의 허공에도 닿지 않고 스러져 갔다. 텅 빈 눈으로 소금 선 밖 범신과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싱긋 웃고는 휘청이는 걸음으로나마 새까맣게 변한 돼지를 영대로 안아들었다.



 "...않습니다."

 "뭐?"

 "이제는 도망치지 않아요, 베드로, 신부님."



 두물머리로 정신없이 트럭을 몰던 와중에 준호가 내민 짧은 말에 베드로는 헛웃음을 쳤다. 뭐라든, 그 악마새끼가 네 귀에 도망치라고 주절대기라도 하든? 입 속에서 독사로 우글거리는 말을 모두 가라앉히고 마지막 남아 허우적거리는 단어를 꺼내었다.



 "잘했다, 아가토."

 "-네."



 돌아오는 길에 준호는 잠긴 울음을 내뱉았다. 날붙이의 감각으로 후두를 쑤셔오는 그 고통이 살아있음이라 생각하니 차라리 눈물겹도록 반가웠다.



 털털거리며 흔들리는 트럭 안에서 오래 오래 잠긴 그 울음 속에는 네가 있어 겨우, 다행이었다.



--

음. 아가토의 첫 부마군요.

빙의된 줄 알았다가 아니었다가; 혼돈스럽곸ㅋㅋㅋㅋㅋ

뭐 저는 우는 준호 피흘리는 준호 연성햇으니 됐습니다.

이제는 12형상에서 차용한 트라우마를 적용시켜봐야지 룰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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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시는 숨결 하나 하나가 끈적하게 폐를 어루만지는 느낌이었다. 어둠이 굳은 공간은 청년의 몸을 감싼 성스러운 묵색 수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거칠게 호흡하는 사람의 후두를 죄었다 풀곤 했다. 어둠 너머 알 수 없는 존재가 웅크려 있는 환영을 애써 깨뜨리며 준호는 가볍게 성호를 그었다. 그 동작 하나에 응어리진 침묵이 슬쩍 곁을 내어주었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3개월 정도 넘어간 후였다. 구마 사제가 되기로 결심한 다음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범신을 찾아가 의식의 순서를 익히고 연습하는 준호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오늘 일은, 그로부터 두 달 후 범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한 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아 참, 핏덩아. 양평에 마귀 들렸다고 하는데, 확인해볼래?"



 마치 오늘 아침은 김치찌개야, 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평온하고 뒤틀림 없는 울림이었다. 의식에 사용했던 성수를 정리하느라 정신없던 준호가 예에,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정도로. 물론 3초 뒤에는 괴성에 가까운 되물음을 날리기는 했지만.



 "아니, 진짜 박범신 베드로 미친 거 아니냐고?"



 양평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서 날아가는 풍경을 보며 준호는 짓이기듯이 말했다. 뒤에서 눈감고 있는 범신을 의식해서인지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소리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말들은 어찌됐건 준호가 가진 본심이었다. 범신은 제 평안한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준호를 확인하자마자 "그럼 이번에는 내가 보조사제를 맡도록 하지."라고 말한 뒤 일방적으로 짐을 챙겨 나가버렸다. 그런 고로, 울며 겨자먹기로 준호는 꼬박 한 달을 준비하여 처음 구마사제로서 의식을 집행해보기로 했다. 너무 이른 것 같아 거절해보려했지만, 이미 너는 어엿한 구마사제라고 말하는 범신의 눈을 보자 더는 못 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아가토. 나 안 미쳤다. 너나 안 미치게 조심해라."



 으르렁대듯 낮은 범신의 목소리에 찔끔한 준호는 어색한 웃음을 한 번 날리고 눈을 감았다. 자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구마의식을 행할 순서를 떠올려보려던 차였다. 눈을 감자 귓가에 악의 서린 환청들이 익숙하게 휘감겨왔다. 쿡쿡대며 저주를 읊조리는 목소리들을 짜증스럽게 억누르며 준호는 이어폰을 꽂았다. 바흐의 '마태 수난곡'이 시작되자 시커멓게 귀를 태우는 악의가 점차로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누가 핏덩이 아니랄까봐 침까지 흘리고 자네. 일어나라. 다 왔다."



 분명히 계획으로는 구마의식 순서를 되짚어보려고 했는데 어느 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범신의 타박에 멋적게 입가를 손으로 훔치고는 짐을 들고 내렸다. 부마자는 양평 터미널에서도 30분에 한 대씩 지나다니는 마을 버스를 타고 꼬박 1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산골에 산다고 했다. 바싹 마른 햇살에 따가워지려는 초여름 열기가 준호의 반팔을 타고 올라왔다.



 "이번 부마자도 여성이라 하더라. 그 시골에서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미사에 나올 정도로 성실한 신자라 가족들도 다들 걱정이 커. 꼭 좀 잘 부탁드린다고 신신당부를 하더라."



 마을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벤치에 걸터앉아 장초를 문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느른한 유선을 그리자 멍하니 그 연기를 쫓던 시선이 문득 허공에 멈춘다. 범신은 다시금 길게 숨을 뱉고는 조용히 허공을 노려보는 준호의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때린다.



 "벌써부터 혼 빼지 말고 정신 차려라, 새끼야."

 "아뇨, 혼 빼고 있던 게 아니라."



 무언가 말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멀리서, 낡은 마을 버스가 만드는 먼지가 일어나던 탓이다. 말을 잇지 못한 준호를 흘끗 돌아본 범신은 얼마 피우지도 못한 장초를 비벼 끄고는 몸을 일으켰다.



 "도착하면 밤이겠다. 도구 잘 챙겨라."



 과연 말 그대로 밤이 눌어붙어 있었다. 시골의 어둠은 옛 밤과도 닮아 있어, 도시에서 보기 힘든 별이 총총히도 박혀 있었다. 평소라면 감탄하며 바라볼 그 아름다운 하늘과 땅 위에 깃든 어둠은 천양지차라, 준호는 저도 모르게 가빠지려는 호흡을 자주 가다듬어야 했다. 뱃속을 온통 분탕질 칠 어둠은 준호의 깊은 한숨을 끊임없이 핥아 올려댔다.



 "말씀하신대로 집에는 어머니만 남아 있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셀 수 없을 정도로 허리를 굽혀가며 범신의 두 손을 꼭 부여잡았다. 유일한 구원이자 동앗줄인양 손을 부여잡은 장년의 남성은 농사일에 익어간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옆에서 뺨을 긁적거리는 준호에게도 갈급한 시선을 보내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들고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대문 밖을 빠져나갔다.



 대문 옆에는 이번 구마 의식에 쓰일 돼지가 꿀꿀대며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구마 의식이 끝난 다음 돼지를 옮길 트럭까지 확인한 준호는 깊은 한숨을 쉰 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서 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말로도로가 확 끼쳐왔다. 언제 맡아도 역겨워 속을 뒤집어엎는 그 냄새에 이마를 찡그리고서 부마자의 상태를 확인하였다. 나이가 많은 70대 여인은 눈을 까뒤집은 채 침대에 손발이 묶여 있었다. 깨어있으면 온종일 몸을 긁어대는 통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더라고, 버스에서 들었던 상태 그대로였다. 뒤따라 들어온 범신은 아무 말 하지 않고서 성수와 십자가, 그리고 바흐의 노래가 담긴 씨디 플레이어를 준비했다. 열린 창에서는 달빛의 머리카락이 묘막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부마자의 상태는 둘째치고 그 나이가 마음에 걸렸다. 혹여나 심장에 무리가 가거나 건강 상태가 악화되는 건 아닐지, 이런 저런 걱정들이 떠올랐지만 이대로 두어도 안될 터였다. 범신이 준비한 노래를 틀자 준호는 천천히 이제껏 연습했던 구마의식을 치르기 시작했다.



 눈을 까뒤집은 늙은 여인은 산발이 된 머리를 베개에 흐트러뜨린 채 결계선 안으로 발을 딛은 준호에게 말을 걸었다.



 "-준호야, 문 밖에 개가 서 있더라."



 묵주를 여인의 가슴팍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멈칫했다. 미카엘의 기도를 외고 있던 범신은 그러한 준호의 변화를 알아챘는지 작게 혀를 찼다. 여인은 준호가 멈춘 것을 민감하게 감지하고서 그 늙은 몸에 어울리지 않게 높은 소리로 웃어젖혔다.



 "응, 그래. 그 왜, 시커먼 개. 커다랗고 꼬리가 쫑긋 선 그 개 말이야. 웡, 웡웡! 어라?"



 여인은 입을 다물었다. 기분나쁠 정도로 가라앉은 침묵이 다리로부터 차례로 준호의 수단자락을 타고 감싸올라왔다.



 "-지금 바로 이 문 뒤에 있네?"



 그 말과 동시에 닫혔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리고, 목줄이 걸리지 않은 채 자고 있던 동네 개들이 마당에 몰려 서 시계를 채웠다. 얼어붙은 준호 앞에서 여인은 희게 눈을 까뒤집고서 몸을 일으킨다. 한동안 굳은 채 서 있는 준호를 비웃던 여인은 그가 다시 움직여 제 가슴 위에 묵주를 두고 눈을 가리자 낮은 소리로 욕설을 퍼붓고는 썩은 숨결을 내뱉는다. 당장이라도 방 안으로 뛰어들어 제 다리를 물 것 같은 개들을 뒤에 두고, 준호는 침착하게 의식을 진행했다.



 성 프란치스코의 종이 울리자 동네 개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길게 울음을 뽑아내었다.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개들의 합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준호는 마지막 단계인 악마의 이름을 추출해내는 단계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여인의 머리맡에 걸어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달빛을 받아 처연한 눈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섞인 마리아의 눈빛 아래 준호는 허리를 굽혀 여인의 이마에 십자가를 그렸다. 괴로워하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던 여인이 문득 몸부림을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전환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준호는 그대로 호통을 쳤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찰나였다. 그 입술이 호선을 그린 것은.



 "-최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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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은 고요하게 아미를 들었다. 저주보다 낮은 밤이 머리카락 속으로 숨어들었다. 살짝 구부러진 콧날을 스치듯 만진 청년은 곤란하다는 듯 잠깐 입술을 벌리다가 숨 막히는 어둠이 폐로 짓이겨쳐오는 감각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최 아가토 부제님. -너 뭐하냐."



 '등신같이'라고 따라붙은 말은 이제 쉽게도 넘어갈 수 있었다. 그제야 겨우 길게 숨을 내쉰 청년은 뒤돌아본 장년의 남성을 향해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아니, 뭐. 살짝 긴장해서 그렇슴다."

 "누가 핏덩이 아니랄까봐. 우리 그냥 밥 먹으러 온 거야, 임마."



 여전히 무시하는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 모를 기묘한 말투다. 최 아가토라고 불린 청년은 다시 앞장서 걸어가는 김범신 베드로 신부를 향해 슬쩍 주먹을 휘둘러보이고는 금새 아닌 척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의 낯선 발자국이 골목 속 악취 속에 휘감기는 것 또한 금방이었다.



 -"밥이나 한 끼하자."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한 달이 훌쩍 넘어갔다. 애써 잊어보려 해도 해일처럼 밀려오는 악몽과 타들어가는 표피의 감각은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기어이 최준호를 끌고 들어왔다. 각오한 일이었다고는 하나 막상 잠들지 못하는 낮과 밤 사이에서 청년은 얼마나 짙은 혐오를 끌어 안았던지. 수단 너머 수척해진 몸을 직시하지 못하는 나날들이 지속되던 중에 걸려온 전화였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밥이나 먹자는 인물은 어렵지 않게 추려낼 수 있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 타인이 감추고 있을 속내를 빤히 들여다보려는 그 말투는 그 사람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낮게 한숨을 쉰 준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술 안 마심다."

 -"널더러 마시라 하든? 핏덩이랑 마실 생각도 안 한다. 나오기나 해라."



 핏덩이. 처음 들었을 때 생경하고 분하던 감정은 지금 와서는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가만가만 씁쓸한 숨을 내뱉은 준호는 혜화역 주변 곱창집 이름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왔냐."



 바로 어제도 만난 듯 친숙하게 인사를 건넨 범신은 피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서는 축축한 골목길을 제 집 안방인 양 익숙하게 걸어 들어갔다.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그 뒷모습을 따라가며 준호는 마치 그 날로 되돌아온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여기 곱창이 괜찮아. 싸고, 양도 많거든. 참, 너는 술 안 마신다 그랬지?"

 "-이제 배워보려고요. 저도 한 잔, 주십시오."



 제 잔에 술을 따르다가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범신이 준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고는 술잔을 내밀었다. 반쯤 어이없다는 눈길로 준호를 마주하던 범신은 피식 웃음을 베어물고는 넘실대도록 술을 따랐다. 붉은 띠를 두른 술병조차 두 사람 사이에서 웃음기를 띠고서 찰랑거렸다. 말없이 두 사람의 잔이 맞부딪치나 싶더니 순식간에 목을 화하게 태우는 액체가 위장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저절로 찌푸려지는 미간을 참으며 짧게 소리를 냈다.



 "어린 새끼가 벌써부터 거짓말이나 치고 말이야."

 "sacrátus lingua(거룩한 혀)."



 한 두 번 마셔본 솜씨가 아닌 듯 하자 범신은 준호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끔 튕기고 눈썹을 꿈틀거린다. 범신의 타박에 짧게 웃어보인 준호는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넉살좋게 범신과 제 잔에 술을 붓는다. 소주 두 병을 비우도록 침묵하던 두 사람 중 먼저 입을 연 것은 범신이었다.



 "아가, 니 밥 안 먹고 다니냐."



 다정스런 목소리였다. 전에 없이 온기 서린 목소리에 대답하려던 준호는 문득 말을 멈추었다. 말보다 먼저, 눈물이 새어나온 까닭이었다.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물방울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곱창을 바라보았다. 헤아릴 수 없는 눈물이 고인 듯한 투명한 술잔을 바라보기도 했다. 곱창집이라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매캐한 연기에 눈이 매워, 그래서 눈물이 흐른다는 거짓이 통할 듯도 했으니.



 밥. 안 먹고 다니냐고. 식사야 아주 기초적인 생존의 문제였겠지만, 그 생존이 생각나지 않았다. 귀를 막으면 네 개의 언어로 온갖 저주를 퍼붓던 그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떠올랐고, 눈을 감으면 피투성이가 된 채 울긋불긋한 눈으로 저를 노려다보던 소녀가 맺혔다. 그 존재 앞에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보다, 어린 날을 후벼파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날 것으로 들이 밀어진 제 잘못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나 무서웠다. 너를 죽이고 내가 살아간다. 무구한 어린 양이었던 네 모든 생명을 사그러뜨린 채 내가 살아간다. -생존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거울 줄이야. 너 대신 내가 죽어야 했다. 그도 아니라면 우리는 함께 죽어야 했다. 어찌 됐건, 내가 살아서는 안 되었는데.



 무의식 중에 밥은 거절당했다. 허기가 느껴지지 않아 물로 입술이나 겨우 축여댔다. 보다 못한 친구들이 몰래 사온 간식을 방으로 밀어넣어주기까지 했지만 두 어개나 들어가면 많이 먹는 것이었다. 억지로 먹어보아도 그대로 구토로 되돌아나오기 일쑤라 하루하루 말라가는 몸을 두터운 수단으로 감출 뿐이었다. 그러나 범신은 한눈에 그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안쓰러운 눈으로 옷 너머 드러난 팔을 몇 번이고 바라보다가 구워진 곱창을 준호 쪽으로 몰아놓았다.



 "먹어라."



 그리고는 술잔을 비운다. 눈썹 하나 깜짝하지 않고 술을 단숨에 비운 범신은 준호가 곱창을 먹나 안 먹나 확인이라도 하는 듯이 준호의 젓가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시선에 떠밀린 준호는 천천히 곱창 하나를 집어 오래오래 씹었다.



 "-그리고, 살아야지."



 천천히 곱창을 씹는 준호를 바라보다 툭 이어지는 네 말에 기어코 오열이 터져나왔다. 다 큰 청년의 난데없는 울음에도 범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빈 술잔을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했다. 다만, 마주앉은 자리에서 네 곁으로 자리를 옮기고서. 눈물 범벅이 되어 벌어지는 준호의 입에서는 말도 되지 않는 언어들이 붉게 상처 입고서 터져나갔다.



 살아도 됩니까, 제까짓 것이. 제 동생을 죽였습니다. 그 어린 소녀가, 열 해나 채 살았을까. 그 어린 것을 죽이고 제가 살았습니다. 반대로, 어린 놈이 어찌 그리 영악했는지. 제 살겠다고 뛰어가는 그 발에 운동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죽어야 됩니다, 예, 죽어야지요. 살인자는 또 살인을 하지 않고서야 못 견딜 핏줄일 겝니다. 더러운 짐승 새끼가 더 살아 무엇합니까. 밥은 먹어, 무엇합니까.



 벌어진 입에서 씹다 만 곱창 찌꺼기가 오열과 함께 떨어졌다. 그것도 모르고서 팔에 이마를 댄 채 몸서리치며 오읍하는 준호를 범신은 오래동안 바라보았다. 아무런 위로도, 토닥거림도 없이 그저 곁을 지키고, 잔을 채우면서. 한참동안 이어지는 호읍은 천천히 잦아들고, 새어나온 눈물이 팔뚝 사이에 작은 길을 만들 때 쯔음 곱창은 이미 반절 넘어 타 있었다. 준호가 우는 동안 소주 1병 반을 넘게 비운 범신은 준호의 눈물이 잦아들자 손을 들어 주인 아주머니를 불렀다. 홀로 안절부절 못하던 주인 아주머니는 범신의 부름에 얼른 다가와 준호와 범신을 살폈다.



 "아주머니, 여기 탄 것 치워주시고. 소주 한 병이랑 곱창 2인분요."



 아주머니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한다. 그제야 눈물을 그친 준호의 눈치를 보던 아주머니는 범신의 단호한 주문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최 아가토, 최준호 아가토야."

 "-네. 여기, 있습니다."



 아직도 메이는 목을, 쑤셔오는 후두를 겨우 참으며 그 날처럼 대답했다. 그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슬쩍 미소를 띤 범신은 손을 뻗어 준호의 어깨를 감쌌다. 어깨 너머 전해지는 고요한 위로에 다시금 준호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어라. 살어야지. 밥도 많이 먹고, 잠도 푹 자면서 그렇게, 살아야지."

 "-."



 무언가 말하려던 준호에게 술잔을 억지로 쥐여주고는 훌쩍, 뜨거운 달을 삼킨다.



 "그래야 죽은 네 여동생이 너를 덜 미워하지. 대신 살어라, 그러라고 보냈더니 하나도 재미없게 살면 얼마나 더 억울하겠냐. 예쁜 운동화도 사신고, 좋은 노래도 많이 듣고, 그리고, 밥도 챙겨 먹어야지."



 삶이란 먹는 것이다. 네 입술에 닿는 것 하나 하나가 너를 만든다. 네 몸 속 세포가 되어 살아가게 만든다. 뜨거운 밥알 하나를 오래오래 씹다보면 나오는 그 단 맛이 너는 믿어지느냐. 하루에 세 끼, 살아온 날을 넘어보면 까마득한 끼니를 무수히 때워오며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생명들을 삼키고, 감사해했는지. 떠오르지조차 않는 날들과 그 날들에 붙어오는 밥상을 떠올리면 우리는 언제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먹고, 감사해라. 잘 먹고, 잘 자고, 그리고 잘 살아야지.



 살아야 합니까. 그 무수한 끼니가 저는 무섭습니다. 언젠가, 내가 먹었던 그 밥들이, 생명들이 나를 원망하지나 않을까 불현듯, 문득, 나를 덮칩니다. 이까짓 한 사람, 작디 작기만 한 최준호. 이 존재가 살아 또다시 짓밟은 생명들을 생각하면 두렵기 그지없습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고개를 작게 도리질 친 범신은 다시 구워진 곱창 하나를 집어 이번에는 숫제 준호의 입으로 집어 넣어버렸다. 그제야 눈물을 닦아낸 준호는 범신이 입 속으로 투척한 곱창을 어물거리다 씹기 시작한다. 범신은 준호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속삭이듯 말한다.



 "그래. 그 두려움 모두 네 것이다. 언젠가 우리를 덮칠 그 두려움과 외로움 모두, 온전히 네 것이다. 그러니 먹어야지. 그 생각 모두, 먹지 않고서야 할 수도 없는 생각들이다. 안 그러냐."



 너털웃음을 터뜨린 범신은 보란 듯 크게 입을 벌려 곱창 몇 점을 단숨에 씹어 넘겼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호도 천천히 한 점 더 집어 입 속에 넣는다. 그러다 점점 속도가 붙어 결국에는 기어이 곱창 한 판을 모두 비워낸다. 오래간만에 느껴지는 포만감에 준호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진다.



 "밥, 잘 먹고 다녀라."



 범신이 계산을 마치고 뒤늦게 가게 밖으로 나왔다. 식후엔 이게 최고지라며 담배를 삐뚜름하게 피워 문 범신이 짧게 손을 흔들어보이고는 한 마디 툭 뱉고 먼저 휘적 걸어가버린다. 순식간에 아득해지는 그 뒷모습에 준호는 깊은 허기를 느끼며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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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제들 4차 찍은 유일한 영화입니다....... 넘나........ 사랑스러운 참치 어빠..........

2기 소취........ㅠㅠㅠㅠ

개인적으로는 처음 12형상들에서 최준호 아가토가 가졌던 트라우마도 차용해보고 싶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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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이치의 박력에 밀린 스가와라는 움찔거리다가 겨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서슬에 눈가에 맺힌 이슬이 눈물점을 타고 뺨으로 밀려 내려온다. 스가와라의 뒷머리를 감싸고 흘러 내리는 눈물을 핥아 올린 다이치는 평소대로 싱긋 웃고는 스가와라를 꼭 끌어안는다.



 "-좋아해, 코우시."



 떠나가는 다이치를 배웅하고서 집으로 돌아온 스가와라는 기껏 어머니께서 준비해둔 마파두부도 먹지 않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사귄 지 5개월 만에 하게 된 첫 키스는 달콤하고 황홀했지만-, 또한 무섭기도 했다. 오랫동안 다이치를 보아왔지만 처음 보는 모습에 당혹스러운 심정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요하게 숨을 내쉬자 투명한 입김이 어두운 방 안으로 펼쳐졌다. 진주빛으로 떨어지는 달빛은 문간에 기대어 어둠이 틀어올린 머리타래를 천천히 세고 있었다. 감색 잉크를 떠올리게 하는 어둠은 온화하고 다정하게 스가와라의 어깨에 기대어 왔다. 온기가 겹친 어둠은 이내 까마귀를 닮은 머리카락을 생각나게 했다.



 "-??!!"



 스가와라는 벌떡 일어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떤 의식의 흐름으로 인해 카게야마가 생각난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새파랗게 어둠을 감아 삼키는 그 날카로운 홍채가, 이 따스한 어둠과 서늘한 고민 사이에 어떻게 끼어들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다.



 그저, 대단한 후배라고 생각했다.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세터라는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천재 후배 녀석을, 상냥하고 온화한 선배의 마음으로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그렇게까지 성인은 못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아낀 것도 사실이었다. 히나타와 카게야마의 괴짜 속공은 분명 자신이 속한 카라스노 고교의 이름을 드높이고, 몇 번이고 코트를 밟을 수 있게 해주었다. 다이치와 아사히, 스가와라 세 명의 힘으로는 부족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순간 어째서 다이치의 얼굴 대신 카게야마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인지. 어째서 그 든든하고 상냥한 미소 대신 낮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지는지 이유도 모르는 채, 오랫동안 이불 속에서 뒤척거리던 스가와라는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스가 선배."

 "-으, 어, 어?"



 제대로 잠들지 못해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하품을 하자니 불면증을 만든 장본인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윤기 나는 검은색 머리카락과 새파랗게까지 느껴지는 짙은 홍채는 온연히 스가와라를 담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스가와라의 심정을 알 리 없는 카게야마는 평소 보던 표정보다는 조금 더 반가운 기색으로 다가와서 스가와라에게 무언가를 쥐어 주었다.



 "이게 뭐야?"

 "피곤해보이시길래, 잠 깨는 사탕임다."



 수업 시간에 항상 잔다는 네가 먹어야 할 것 같은데, 라는 생각도 잠시. 뿌듯해하는 그 얼굴을 보자 스가와라는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참 명랑하게 웃어 젖히던 스가와라는 보란 듯 사탕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싸한 민트향이 입 안으로 가득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문득 스가와라는 목 안에 걸려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았다.



 "좋아, 카게야마."



 뜻밖에 튀어나온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오히려 스가와라 본인이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카게야마 앞에서 두 손으로 입을 막고는 재빨리 사탕을 깨문다. 오도독, 하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든 스가와라는 억지로 웃으면서 손을 휘휘 내젓는다.



 "네, 저도 좋아함다."

 "응, 사탕이 좋네, 좋아. 잠이 확 깬다. 아주. 히나타한테도 나눠주지 그래? 수업 시간에 자주 잔다며, 너희."

 "아뇨. 히나타는 이런 느낌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서요."

 "어?"

 "선배를, 좋아한다고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멍하니 카게야마를 올려본다. 다를 것 없는 평온한 얼굴보다 먼저, 토마토처럼 붉어진 귀가 시야에 뛰어 들어왔다. 대답을 못하고 어버버하는 스가와라를 보면서 카게야마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좋아합니다. 스가와라 선배. 선배의 명랑한 웃음도, 상냥한 모습도, 가끔 보이는 장난도 모두 좋아함다. 공을 올리는 하얀 팔도, 모두를 바라보는 똑바른 눈도요."

 "어-, 카게야마?"

 "스가와라 선배. 좋아함다. -대답 해주시면 감사하겠슴다."



 무언가가 굴러 떨어졌다. 깃털만큼이나 가볍고, 용광보다 뜨거운 감각이 눈가를 스쳐 뺨으로 길을 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방울 방울 구르는 스가와라의 눈물을 바라보던 카게야마는 조심스럽게 색이 옅은 머리카락을 감싸안았다. 차마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눈물만 떨어뜨리는 스가와라의 등을 오래오래 감싸주던 카게야마는 이윽고 무섭도록 진지한 눈으로 그와 눈을 마주했다.



 "다이치 선배 때문임까?"

 "너-."

 "괜찮슴다. 그럼-, 기다리겠슴다."

 "-."

 "오래 걸려도 됨다. 다이치 선배랑 알콩달콩하게 사귀셔도 됩니다. 즐거울 만큼 즐겁고, 행복할 만큼 행복한 다음, 그 다음이라도 저는 좋슴다. 그러다가 혹여나 슬퍼지면, 외로워지면 그때 다시 생각해주셔도-, 됩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다. 울음을 참아 붉어지는 자신의 눈가를 모르는 카게야마는 애써 스가와라를 위로한다. 그 모습에 또 다시 눈물이 터지려는 그를 아이를 대하듯 부드럽게 다시 품에 안고 카게야마는 조용히, 그러나 명료하게 속삭였다.



 "좋아합니다, 스가와라 코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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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ㅏ 후일담은 뭘까용

제 기준 다이치가 스가 마음 떠난 걸 알고 놓아주는 걸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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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을 가늘게 내쉬자 입술 앞에 얕게 소용돌이가 쳤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이치가 쿡쿡 웃음 짓더니 목덜미를 끌어 어깨를 살짝 감싸안았다. 스가와라가 깜짝 놀라 다이치를 올려다보았지만 모르는 척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실었다. 흘끗 내려다보자 눈을 연상시키는 하얀 얼굴에 꽃잎 같은 뺨이 붉어져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 맞추고픈 욕망을 겨우겨우 억누르며 다이치는 낮게 신음성을 흘렸다.

 

 

 "? 다이치?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너를 덮치고 싶어서 그래, 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다이치는 애써 시선을 돌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낮에도 고양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인적이 드문 지역인데다가, 연습을 마치고 늦은 시간인 탓에 하교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짙은 남색 머리카락을 드리운 밤은 우아하게 굽어보듯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으, 역시 토스를 제대로 올리는 건 너무 어려워. 아사히나 다이치에게라면 모를까, 히나타에게는 카게야마만큼 해줄 수가 없어. 분하네."

 "어울리지 않게 청승이다, 코우시. 우리는 너를 신뢰하고 있다구?"

 "신뢰와 실력은 별개의 문제잖아. 하아. 역시 천재라는 건가."

 

 

 언제나 쾌활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스가와라로서 보기 드물게 힘이 빠진 상태였다. 중학교 시절부터 코트를 누비는 '제왕'의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눈 앞에서 보게 된 실력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이 속한 팀이 강해진 것은 물론 기뻤지만 그와 반비례하여 자신의 실력에 의문을 가지게 된 스가와라는 최근 슬럼프에 빠진 상태였다.

 

 

 다이치도 그런 상황을 모르는 바는 아니라서 일부러 평소보다 명랑하게 그를 대하고, 그가 올려주는 토스는 최대한 강하게 스파이크를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된 스가와라가 오히려 더 화를 내는 바람에 다이치가 할 수 있는 일은 결국 스가와라의 푸념을 들어주는 것 뿐이었다. 한참이나 중얼거리던 스가와라는 자신의 집 앞에 도착한 것을 깨닫고 문득 고개를 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으아. 또 이상한 소리만 잔뜩 했구나. 미안. 그치만 괜찮아, 다이치. 이건 어차피 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니까, 카게야마에게 화내거나 하지는 않아. 음, 타나카를 좀 괴롭힐지는 몰라도."

 

 

 씨익 웃는다. 밤조차 얼리는 환한 미소에 다이치도 안심한 듯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 붉은 뺨에, 붉은 뺨보다 더 붉은 입술 가까이 볼에 입술을 댄다. 상쾌한 밤바람을 잠재우는 입맞춤에 스가와라는 화들짝 놀라 서너 걸음이나 멀리 떨어진다.

 

 

 "으아, 으아아, 으아아아아 무슨 짓이야, 너!"

 "야, 그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면 나 상처 받는다구..."

 "아니, 아니 그, 싫다는 게 아니라 너무 갑자기, 헉, 거기다 여기 우리집 앞이라고?"

 "뭐 어때, 보려면 보라고 해. 어차피 넌 내 '연인'이잖아."

 "그, 그런 낯 뜨거운 소릴!"

 

 

 뺨만 붉어지다 못해 얼굴 전체가 토마토처럼 붉어진 스가와라는 참지 못하고 다이치의 옆구리에 펀치를 날린다. 꽤 아플 법도 하지만 다이치는 눈썹을 찡그리면서도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스가와라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욥, 카게야마."

 "넷, 스가 선배!"

 

 

 스가와라보다 2살이나 어린 이 천재 후배 녀석은 융통성도 없고 또래와는 사회성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선배에게는 깍듯한 면이 있다. 이런 걸 갭 모에라고 하던가, 라고 중얼거리던 스가와라는 가벼운 말투로 입술을 여닫았다.

 

 

 "음, 아무래도 히나타에게 토스 넣는 게 좀 어려워서 말이야. 어떤 요령으로 넣어주어야 할 지 좀 알려줄래?"

 "아, 넷!"

 

 

 연습을 시작한다. 선배가 후배를 가르쳐주는 것도 아니라, 후배가 선배를 가르쳐주는 묘한 광경이지만 아무도 그것을 제지하거나 코멘트를 달지 않는다. 그런 면이 바로 스가와라가 다른 부원들에게 신뢰를 얻게 된 바탕일지도 몰랐다. 연습 시합을 제외하고 몇 시간이나 카게야마에게 배우던 스가와라는 녹초가 된 모습으로 숨을 몰아 쉬었다.

 

 

 "우와, 체력 괴물. 너랑 히나타는 매일 이 상태란 말이지?"

 "열심히 단련하고 있슴다."

 

 

 무뚝뚝한 대답 뒤에 수건이 내밀어진다. 언제 챙겨왔는지 스가와라에게 수건과 비타민 워터를 건넨다. 감사히 받고 숨을 가다듬으려니 조용한 카게야마의 목소리가 고막에 닿아왔다.

 

 

 "선배들의 노력을 헛되이 하고 싶지는 않슴다."

 

 

 땀을 닦다 말고 멍하니 쳐다 보자 그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지만 유독 귀만 빨개져 있었다. 스가와라가 그것을 지적하려는 찰나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카게야마는 재빨리 체육관 여기저기 흩어진 공을 모으러 달려간다.

 

 

 "-그랬단 말이지. 꽤 귀여운 면도 있지 않아?"

 "나쁜 녀석으로는 안 보였으니까. 우리 사랑받는 선배들이구나?"

 "엇, 그렇게 들으니까 기쁜데. 사랑받다니, 앞으로 듬뿍 귀여워해줘야지."

 "우와, 코우시. 완전 성희롱하는 아저씨 같았어."

 "뭐 어때, 사랑스러운 후배 아니냐? 아, 그리고 또 말이야-."

 

 

 시답잖은 농을 지껄이면서 귀가한다.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와 연습을 시작하면서 슬럼프를 극복했는지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어쩐지 불편해지는 감정을 지각하지 못한 다이치가 억지 웃음을 짓는다. 말수가 줄어든 다이치가 이상했는지 스가와라는 말하다 말고 멈춰 다이치의 표정을 살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그 하얀 코와 왼 눈 가의 검은 점, 엷은 색소가 시계로 들어차자 세상이 멈춰 버린다.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입술을 탐했다. 어쩐지 메마른 붉은 입술 위에 입술을 덮고, 다물린 입술을 몇 번이나 두드렸다. 벌어진 입술을 가르고, 부끄러워하는 혀를 얽는다. 가지런한 이를 훑고, 입천장을 간지럽히고도 모자라 몇 번이고 혀를 감아 올렸다. 물기 젖은 소리가 괴로운지 스가와라의 미간이 좁아졌지만 놓아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강하게 끌어 안으면서 눈가의 점 위로 눈물이 고여 흐를 때까지 수없이 달콤한 입술을 먹어치웠다.

 

 

 "으, 읏. 그만-. 다이치."

 "이제, 카게야마 얘기는 그만해."

 

 

 으르렁대듯 낮게 속삭이는 다이치의 말에 색소가 옅은 스가와라의 눈이 커진다. 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다시, 다짐하듯이 다이치가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카게야마 이야기는 더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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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아아아ㅏㅏㅏㅏㅏ 다이치 왜케 박력 넘치게 썼징...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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