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3. 26. 13:53 2차 끄적/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검은 사제들/범신준호]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2
“네 이놈, 이리 와 앉거라.”
귓가에 찡하게 울리는 그 목소리는 낮음에도 불구하고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어 준호는 하얀 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목덜미를 움찔거리면서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미 풀이 죽어 고개를 조아리는 준호에게 애달픈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잠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는 호조의 참의답게 엄준하게 문책하기 시작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꽃구경을 했다는 말이 들려왔다. 사실이더냐.”
“아버님, 그것이 아니오라.”
“그렇다면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아니, 그... 꽃구경을 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닌지라.”
“어허. 말을 똑바로 하지 못할까! 네가 나라의 녹을 먹게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지금 벌써 콧바람이 들어 살랑거리느냐.”
준호의 아버지인 치헌은 나라의 호구 조사나 기타 경제에 관련한 일을 맡고 있는 호조에 있지만 최근 형조의 낭관으로 임명 받은 제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아는 바였다. 약관을 넘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벌써 임관을 한 것으로 보아 머리가 나쁘거나,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워낙에 유들거리는 성격에다 사내치고 예민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어 이미 형조 내에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준호에게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어준 지 오래라 하였다.
“어디 한 번 변명이나 들어보자꾸나. 성균관 동기들과 꽃구경을 갔다거나 하면 오늘 내 너를 집에서 당장 내쫓을 줄 알거라.”
“...그것이 아니오라, 아버님을 아신다던 분과 잠깐 대화를.”
“누구를 말하는 것이더냐.”
“김, 범자 신자를 쓰시는 분께서 아버지를 아신다며, 형조에 가려던 저를 다짜고짜 끌고 가시지 뭡니까.”
원래는 친구들과 만나기로 했다는 말을 제 관서인 형조로 바꾸며 준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치헌의 눈치를 보았다. 치헌은 준호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가만 되씹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범신? 김범신이라 했단 말이냐?”
“예. 아버지랑 잘 아시는 분이라 말씀하시기에, 저 또한 당연히 그러한 줄 알고.”
“그래, 네가 범신과 만났다는 말이지.”
“아시는 분이 맞으십니까?”
“내 그 사람을 모를 리가 있나. 허허, 그래, 범신이 준호 너를 알아보더라는 말이냐?”
“그, 알아보았다기보다는 이름을 말씀하니 -네가 그, 최치헌의 첫째구나, 하시고.”
그가 저를 일컫던 ‘형조의 망나니’라는 말은 쏙 빼두고 준호는 얌전히 고개를 조아렸다. 다행히 치헌은 준호가 범신을 만난 것이 마음에 드는지 허허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아버지의 기분이 풀린 것을 깨달은 준호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한결 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치헌이 얘기한 바에 의하면, 범신은 호조참판을 지냈던 김인회의 둘째 아들로 약관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능력을 인정받아 제 아버지가 참의로 있는 호조에서도 권유를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워낙에 솔직하고 시원시원한 언행으로 인해 왕에게 잘잘못을 고하는 사간원에서도 은근하게 청을 받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호조도 사간원도 아닌, 아예 엉뚱한 춘추관 쪽으로 관직에 오르겠다고 말해 김인회가 골치를 썩혔다고 했다. 그에 덧붙여 청나라에서 들여오는 서양의 문물에도 관심이 많아 걸핏하면 새로운 물건을 사서 집안을 어지럽히기 일쑤였고 당시에는 연행사에도 따라가겠노라고 선언하여 몇 번이나 집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라 불렸다는 것이다.
현재 형조의 망나니로 불리는 저로써도 발치에 닿을 수도 없는 범신의 기행에 준호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치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런데, 아버님은 어떻게 그런 분과 알게 되셨습니까?”
그 대답이 또 걸작이었다. 당시 호조에 있던 치헌은 범신과 나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김인회의 넋두리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다. 인회가 치헌에게 지시를 내리는 도중,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면 그야말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머리를 감싸 쥐는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묵묵히 제 일을 잘해내는, 그야말로 성실함으로 만들어진 듯한 치헌을 보며 내 아들이 너의 반만 닮았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말을 어찌나 많이 들었던지. 농담이나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던 것이, 호조의 관끼리 따로 저녁을 먹는 날에는 ‘저건 내 아들이 아니라 원수’라며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한 인회가 몇 번이나 치헌에게 호소에 호소를 거듭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호조에 들어서는 범신을 보자마자 치헌은 자기도 모르게 들고 있던 서간을 떨어뜨리면서 ‘호조참판의 원수’라고 중얼거렸고, 이를 들은 범신이 ‘저놈의 샌님 자식’이라며 달려드는 걸 주변 사람들이 겨우 말렸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인연이라는 것의 웃긴 작전이었던지 감정싸움으로 번지지 않고 서로에게 호감을 샀다고.
물론 지금도 가끔 만나면 술잔을 기울이기는 하나, 호조참의에 오른 치헌과 춘추관에서도 동지사에 오른 범신 둘 다 일이 너무나 바빠 제대로 얼굴 보는 날도 희미해진 것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고 치헌은 말을 맺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제게 망나니라는 말씀을 하실 게 안 된다는 이야기네요.”
어딘지 그리운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나가던 치헌은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려버린 준호에게 엄한 표정으로 맹자에서 우정에 관한 내용을 찾아 모조리 베껴 적으라는 벌을 내리고 나서야 방을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 치헌에게 검사받기 전까지는 꽃구경은커녕 나갈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에 준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가물가물한 눈으로는 촛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먹이라. 졸린 눈을 억지로 비비며 깨어 있으려니 영 몸이 쑤시고 눈이 피로했다. 아버지도 설마, 그냥 하신 말이겠거니 제 멋대로 생각한 준호는 들고 있던 붓을 벼루 위에 잠깐 내려놓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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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ㅏ아ㅏ아니 쓸 때에만 해도 분명히 이렇게 길어질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엔딩은 정해져 있습니다
5편이나 6편 이내로 끝마쳤으면 좋겠네요 흑ㄱ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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