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네. 아주 돈이 넘치다 못해 썩어 나는구만? 자명루에까지 행차하시고 말일세. 그럼 이 술상은 자네가 사는 건가?”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리. 금쪽같은 마누라를 두고 어디를 가? 자네도 알다시피 내 마누라가 얼마나 바느질 솜씨가 좋아. 그래서 자명루에서 가끔 옷을 지어달라고 옷감을 보낸단 말이지.”

 “그래, 허긴, 제수씨 솜씨가 워낙에 좋아야 말이지. -, 그래서 자네가 제수씨가 만든 옷을 갖다 주었단 말이구먼?”

 “이제야 이야기가 좀 되네. 그렇지!”

 “? 너무 예뻐서 혼이 쏙, 빠지겠던가?”

 “예쁜 건 둘째 치고, 혼이 쏙, 빠지겠는 건 모를 일일세.”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술이나 한 잔 더 가져오란 말인가?”

 

 

 농담처럼 받아넘기고는 탁주 반 되를 더 시킨다. 그것이 정답이었던지 앞에 앉은 사내의 입가에 벌쭉한 미소가 걸린다.

 

 

 “눈이, 아무래도 이상했단 말임세.”

 

 

 술 마시는 손이 멎은 준호는 물론이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발을 입가에 댄 범신의 눈매 또한 가늘어진다. 몸의 이상 상태를 알기 쉬운 설명이었다.

 

 

 “아니, 잠깐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도 흠칫, 여간내기 눈짓이 아니야.”

 “그건 또 무슨 뜻인가?”

 “, 그그, 눈이 말일세, , 쩌기, 얌생이 새끼 같기도 하고, 배암 새끼 같기도 한 것이,”

 “에이, 사람이 허언은. 어째 사람 눈이 그래 생긴단 말이야?”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 마주쳤는데 소름이 쏴아, 하니 돋는 것이, 요새 왜 그리 고 여편네가 인기인 줄 모르겠단 말일세. 거기다가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그런 처자가 마음에 드나?”

 “, . 높으신 어르신네들 마음을 누가 알겠어. 우리 같은 무지렁이들한테야 무섭다, 사납다, 허지만 또 모를 일 아닌가.”

 “허긴, 그렇긴 해. 아이쿠, 술 식겄네. 한 잔 합세.”

 

 

 소리 나게끔 사발을 부딪치더니 이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간다. 자기들끼리야 별 생각 없이 주고받은 대화라지만 사건 서간을 읽었던 두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깨달음을 준 모양이었다. 빈 사발을 쥔 채 한동안 말이 없던 준호가 이마를 든다. 어느 한 곳 무너진 데 없이 맑고 투명한 눈이 연거푸 엎드린 심연과 마주한다.

 

 

 “저랑 자명루, 한 번 안 가실래요?”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를 이곳까지 데려온 이유가 있을 것이란 짐작처럼, 이윽고 신탁처럼 무겁게 사발을 소리도 없이 상 위로 내려놓는다.

 

 

 “내 형조로 너를 데리러 가마. 그 때까지는 아무런 일도 일으키지 말거라, 핏덩이야.”

 “내가, 아무리 형조의 망나니라고 한들 동지사께 대겠습니까? 걱정 마시지요.”

 

 

 , 뱉듯 말을 잇고 빈 사발을 보며 슬쩍 입술을 핥는다. 결국 너털웃음을 터뜨린 범신은 꽤나 유쾌한 표정으로 다시 탁주 한 되를 주문한다.

 

 

 “아가, 너 이 일을 무에라 생각하느냐.”

 “아가라니, 소름끼칩니다.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 엄연히 준호라는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술이 올라 불콰해진 얼굴로 고운 눈썹을 찡그리나 싶더니 쌍꺼풀이 지지 않은 쪽 눈을 치뜬다. 도홧빛으로 붉어진 눈가에 어지러운 생각이 맴도는 양이었지만 범신은 말을 달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기다림에는 이골이 난 어떤 것처럼.

 

 

 “앞서 말했다시피 약초의 오남용에 관련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 같지 않은 힘도 그렇고, 꼭 동물을 닮은 눈이라니, 저는 아무래도 의심이 갑니다.”

 “그러하냐.”

 

 

 한동안 말이 없다. 쿨렁대는 물소리를 들으니 사발 째 들이키는 술이다. 어쩐 일로 제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술만 마셔대는 걸 보아하니 호기심이 동한다. 멍한 시선의 끝을 따라가 보니 만난 지 몇 번 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들고 다니는 동백문 접선이라 준호는 불쑥 입 꼬리에 말을 담는다.

 

 

 “동지사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동백꽃처럼 어여쁜 아가씨라니, 마음에 걸리시나 봅니다.”

 

 

 농이라면 농이었지만, 그 한 마디에 저를 쳐다보는 시선은 등골이 싸하게 만든다. 마신 술이 단숨에 일깨워지는 듯 날카롭게 벼린 시선. 숨을 삼키게끔 만드는 그 홍채의 만남에 준호는 흠칫 어깨를 굳힌다.

 

 

 “아가, -핏덩이야. 너는 모를 테다.”

 

 

 굳게 다물린 입술에는 단 한 모금의 미소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준호에게 그 말을 꺼낸 것조차 후회하는 듯 몸을 일으킨 범신은 남겨진 준호에게 단호하게 등을 돌린 채 도포 자락을 펄럭인다.

 

 

 그래서인지 준호는 범신이 그 접선을 가지고 평소처럼 쌓인 송사 서간 더미를 무너뜨렸을 때 오히려 안도해버렸다. 마치 그렇게 헤어진 적이 없었던 마냥 느긋한 여유를 눈가에 띄운 채 파묻혀 있는 듯한 준호의 두루마리 서간들을 툭, , 지치지도 않고 건드린다.

 

 

 “아가, 이거 언제쯤 끝나느냐.”

 “-그러니까, 아가라 부르지 말라니까요. 아니, 저번에도 여쭈었지만 일을 하시기는 하십니까?”

 

 

 일부러 퉁명스레 대답했지만 찾아온 것이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저도 모르게 옅은 미소가 눈매에 떠오른다. 준호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숫제 자리를 잡아버린 범신은 제가 건드린 두루마리를 쭉 펴 눈으로 읽어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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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니 여긴 또 어쩐 일이시랍니까, ? , 동지사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하루가 멀다 하고 형조로 오시다니요.”

 

 

 저도 모르게 짜증스럽게 접선을 쳐내고 제가 보던 두루마리를 멀찍이 밀쳐둔다. 그렇지 않아도 일이 넘쳐나는 와중에 굳이 끝난 사건을 다시 끌어오는 제 성정이 상사들이 좋아할 만한 군상은 못 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과연, 치헌이 핏줄이 맞기는 한가 보구나.”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준호의 섬세한 턱선과 눈을 맞추며 껄껄 웃어젖힌 범신은 기어이 걸상을 끌어 그 앞에 자리를 잡아 단매의 사건 기록을 읽어본다.

 

 

 “요상하긴 하구나. 같은 여자가 다만 한 손으로 여자의 팔뚝을 부러뜨리다니, 기이하고 기이하도다.”

 “-그렇긴 하죠? 영 신경이 쓰여서요. 아무래도 저는 약초나 독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범신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뺏으려 했던 준호였지만 제 짐작과 비슷한 발언을 하자 금세 얼굴을 환하게 밝히며 범신을 쳐다본다. 제가 여러 번 놀려 먹기는 했으나 제 말마따나 이제야 약관을 겨우 지난 핏덩이였다. 제 나이처럼 맑게 투명한 시선에 낮게 헛기침을 뱉은 범신이 무슨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슬쩍 미소를 띠며 접어내린 접선을 소리가 나게 펼친다. 미색 화선지에 붉은 동백이 올라앉은 고급스러운 접선 너머 묵직한 홍채가 가라앉는다.

 

 

 “아가, 이 문제가 궁금하더냐?”

 

 

 

 “아니, 어째 한동안 안 보이시나 싶더니, 어찌하여 또 주막이랍니까? 제가 정말로 숙부님께 혼쭐이 나는 꼴을 보고 싶으시단 말입니까?”

 

 

 끌려온 제가 또 잘못이다. 그 날 제가 캐물을 때에는 영문 모를 미소만 날리나 싶더니 칼날처럼 발길이 뚝 끊겼다. 아무리 제멋대로라지만 너무한 것 아니냐고 불평하면서도 은근히 그의 연락을 기다리길 보름, 연일 이어지는 격무에 지친 준호가 귀가하는 길에 막무가내로 끌고 온 곳은 단매나 항아가 있는 금화루가 아닌, 허름한 주막이었다.

 

 

 “이놈아, 귀 안 먹었다. 우선 앉아라.”

 

 

 울컥해서 소리를 지른 준호였기에 시선을 돌린 뒤 금세 다시 자리로 돌아앉는다. 능청스럽게 주모에게 술 두 사발과 간단한 국밥을 주문한 범신은 준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막걸리 사발을 단박에 쭉 들이키더니 손등으로 짙은 입술을 슥 훑는다. 아무 것도 아닌 몸짓 하나에도 두터운 존재감과 연륜이 드러나 준호는 결국 아무 말도 못하고 엉거주춤 그 앞에 자리를 잡는다.

 

 

 시큼털털한 땀 냄새에, 왁자지껄한 사람들 소리. 때 묻은 앞치마를 두른 주모가 내던지듯 내려놓은 국밥은 그리 맛있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모를 진한 그리움과 친밀감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막걸리 사발을 쥐자 그제야 범신의 눈썹 한 쪽이 꿈틀거린다.

 

 

 “핏덩이 너, 술도 먹느냐?”

 “먹는다는 말은 안했지만, 안 먹는다는 말씀도 안 드렸습니다.”

 

 

 끊어내듯 말을 하고 맹랑하게도 사발을 앞으로 쑥 민다. 그 서슬에 범신은 낮게 웃음을 터뜨리나 싶더니 그릇이 철철 넘치도록 탁주를 들이붓는다.

 

 

 “예민한 것이 과연 형조의 애기씨라는 말을 들을 법도 하구나.”

 “예민하면, 안 됩니까?”

 

 

 기어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준호를 유심히 바라본다. 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범신에게 애써 눈을 피하며 한 사발을 다 들이마신 준호 또한 젖은 입술을 닦아낸다. 갓 피어난 꽃처럼 붉게 젖은 입술을 바라보다 툭, 한 마디 던져놓는다.

 

 

 “아가, 너 월경 하느냐?”

 “, 무스...!?”

 

 뱉어내려던 막걸리를 겨우 삼키고 눈을 크게 뜬다. 당황한 것이 빤한 준호를 바라보며 접선으로 입가를 가리고 이죽거리는 눈가에 준호는 결국 어깨에 힘을 뺀다. 아무 소리도 안 한 양 그새 두 개의 사발에 막걸리를 채워놓고 제게 잔을 들어보이자 어이없다는 시선을 보내었지만 이내 말없이 사발을 부딪친다. 사발끼리 부딪치는 소리 너머로 땀 냄새 들큰한 농민들의 대화 소리도 들려왔다.

 

 

 “봤어?”

 “이 사람은, 뭘 봤느냐 물어도 안 보고 다짜고짜 말부터 하는 이 버릇을 좀, 고쳐놔야 해. 그래, 봤다, 이 사람아.”

 “아니 글쎄, 미안함세. 그런데 말이야, 진짜 봤느냐는 말이지.”

 “그래 무얼 말인가. 이제는 좀 말이나 하게. 들어나 봅세.”

 

 

 듣기만 해도 우스운 대화에 준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걸린다. 대대로 지체 높은 양반 집 자제라지만 숙부인 치헌은 신분제의 모순을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를 전복시킬 의도도, 생각도 없었지만 그 미묘한 기류는 준호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었다. 덕분에라고 해야 할지, 준호 또한 형조의 정랑이라는 직책까지 올라 있었지만 형조의 노비인 무심과도 친하게 지낼 만큼 허물이 없었다. 모두가 저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오히려 노골적이라 생각될 만큼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상민들의 대화가 즐겁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니까, 자명루 단매말일세.”

 

 

 준호의 손이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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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과 논다고 하여도 기껏해야 자주 가던 주막에서 국밥에 막걸리 너 댓 병이 그만인 준호였다. 옆에 기생을 낀 채 호화로운 안주가 나오는 곳은 처음인지라 습관처럼 소매 안에 넣어둔 붉은 장미 묵주를 매만진다. 간만에 회식자리를 가진 탓에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저들끼리 얘기하는 선배 사이에는 끼지 못하고 연신 굳은 미소만 짓던 준호는 분내와 사향내를 풍기며 제게 교태를 부리는 기생에게서 짐짓 어색하게 팔을 빼며 곱게 화장한 여인들의 낯을 살폈다. 1년에 두 어 번 있는 형조의 회식 자리가 단매라는 기생이 있다는 자명루가 된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던 만큼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해도 단매를 찾을 숫기가 있을 리 없는 준호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제 소맷부리 속 묵주만 움켜잡고 있는 것이다. 이를 민감하게 알아챈 기생 중 하나가 살며시 준호의 팔짱을 끼며 생글 생글 눈치를 본다.

 

 

 “어머, -생기신 선비님이셔. 제가 오늘 함께 자리해도 괜찮겠사옵니까?”

 “, 아니, , -.”

 “허허, 역시 젊은이는 다를세. 벌써 아가씨 하나가 달겨들었구만. 잘생기고 볼 일이야.”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육조에서 제일 예쁜 사내 아닌가.”

 

 

 장난처럼 이어지는 좌랑들과 참의의 말에 준호는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수그린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 기생은 형조의 어른들에게 눈웃음을 쳤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새빨개지는 준호의 귓불에 여인은 생긋 웃으면서 콧소리 섞인 목소리를 낸다.

 

 

 “어머, 선비님. 부끄러움이 많으시다~ 괜찮사옵니다. 주령이라 하옵니다. 편히 놀다 가소서.”

 

 

 싱글 싱글 웃는 낯이 애교스럽다. 주령에게 끌려가다시피 자리에 앉았으면서도 주령의 젓가락으로 옮겨지는 고기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다. 권하는 대로 마시면서 술이 조금 올라 용기가 났는지 준호는 슬쩍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본다.

 

 

 “, , 주령. , 혹시 단매, 라는 기생을 아는지?”

 

 

 썩 좋은 대화 주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단매라는 말에 순간적이지만 단박에 주령의 눈썹이 위로 솟아오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는 기생인만큼 금세 익숙하게 표정을 풀면서 빈 술잔에 술을 채운다. 맑은 술이 채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준호는 제 손가락에 얽은 묵주를 그제야 깨닫는다.

 

 

 “아이 참, 선비님도,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이야기 꺼내는 것이 아닌데. 이 주령, 속상하옵니다.”

 “, 아니, . 저기, 그게 아니라 형조에, 사건 서간이 와 있길래.”

 

 

 허둥지둥 말을 고치다 별 수 없이 채워진 잔을 비운다. 오히려 그것이 정답이었던지 아까보다 조금은 다정하고 심술궂어진 표정으로 주령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 그 항아 팔을 부러뜨린 것 때문에 그러시옵니까? 하긴, 저희도 보면서도 어이가 없었사옵니다. 아니 무슨, 제 두 배나 되는 계집 팔을 단박에 부러뜨리다니요. 항아 고것도 높으신 분들이 이뻐한다 기고만장이어서 솔직히 속은 시원했지만요, 아무리 봐도 요새 단매 고년이 이상하다니까요.”

 

 

 훨씬 더 편해진 말투였다.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빈 술잔과 접시에 음식을 담아내며 종알 종알 말을 이어나간다.

 

 

 “사실 단매 고게 썩 이쁜 얼굴은 아니거든요. 삐쩍 말라가지구, 말수도 없구요. 꼭 자기처럼 말 없는 분들께서 좀 찾나 싶더니 두 달 전쯤부턴가? 갑자기 저희 단골손님들 자리에 상도도 없이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더니 어느 새 고것한테 홀랑 빠져 버리셨다더라구요. 속상해 죽겠어요! 거기다 힘은 어찌나 센 지, 우리끼리 조금 제 흉을 봤다고 이렇게 손톱을 세우지 뭐예요? 아무리 분으로 찍어도 가려지지가 않아서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요.”

 

 

 소맷부리로 거짓 눈물을 찍어내는 척 하면서 슬쩍 제 손등을 내민다. 과연 제 말마따나 하얗게 분칠한 그 손등 위에는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흉터가 푹 패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작지 않은 상처에 의혹은 더해만 갔다. 단기간에 성격이 확 바뀌었다던가, 갑자기 힘이 세졌다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변화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약초의 오남용과 관련된 듯한 느낌에 준호는 이 일만큼은 반드시 다시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고 곱씹어본다.

 

 

 어젯밤 일을 되새김질하다가 결국 목덜미를 북북 긁어냈다. 햇빛을 보지 못해 하얀 목덜미에 붉은 손톱자국이 장미 덩굴처럼 피어났다가 조금씩 삭아간다. 머리통을 싸매 쥔 채 괴로워하는 준호를 보던 무심은 책상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서간을 쌓아 올리면서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요거 오늘 안에 안 하시면 이번에야말로 참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겝니다.”

 

 

 퍼뜩 정신을 차리다 말고 제 앞에 쌓인 서간 더미에 결국 울상이 되어버린다. 어제 마신 술 때문에 숙취는 머리를 울리지, 오늘 안에 정리해야 하는 사건 서간은 저렇게나 밀려있다. 거기다 어제 회식의 여파인지 늦는 사람들이 많아 그렇지 않아도 형조참의는 그야말로 심기불편 그 자체였다. 부지런히 서간을 나르며 어지러운 형조 안을 정리하던 무심조차 무거운 공기에 조심스럽게 혀를 차고는 몸을 사린다.

 

 

 “거 아직 덜 됐는감?”

 “, . 아닙니다, 영감님. , 하고 있습니다. 하하, , 사건이 많은 지라.”

 “에잉. 그거 하나 빨리 빨리 못하남? 그리 뚫어지게 보고 있노라면 서간이 술술 쓰이기라도 하는지!”

 

 

 짜증서린 상사의 말에 준호는 허둥지둥 정신 줄을 잡고 작업에 골몰한다. 아직 신출내기에 불과한 준호에게 어차피 단매와 관련 있는 사건을 단기간에 해결하기는 어려워보였으므로, 먼저 제게 주어진 일과부터 해결한 뒤 찬찬히 확인해보자고 마음속으로 결론을 낸 참이기도 했다.

 

 

 “아가, , 뭐에 신경을 쓰고 있더냐?”

 

 

 평소라면 참판 어른이 일어나자마자 집이나 주막으로 줄행랑을 쳐버렸을 준호였지만 아까 마음먹은 대로 조금이나마 그 사건을 더 알아보려 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접선으로 준호의 보드라운 뺨을 톡톡 친 범신은 준호가 펼쳐놓은 두루마리를 보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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