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1. 17:53 2차 끄적/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검은 사제들/범신준호]발치에 떨어진 동백 꽃잎보다 작은 것이 -17
“닥치거라.”
두터운 눈썹이 움틀거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단매의 입술이 쉼 없이 여닫힌다.
“사랑한다던 네 놈 입은 거짓만 핥아먹는 입으로구나. 그 혀에서 나는 썩은 내에 내 코가 비뚤어지겠다.”
긴 지팡이를 틀어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사모한다더니, 경애한다더니, 그 말들은 모두 겉멋만 치장한 거짓이었구나, 영감쟁이. 그대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던 네 그 알량한 말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느냐. 사랑하던 여인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네 이름을 부르짖을 때, 너는 어디에 가있었느냔 말이다.”
일순 수줍게 미소 짓는다.
“-감사해요. 그대를 사모하겠노라는 그 말,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붉게 핏줄이 드러난 손이 가녀리게 허공을 휘젓는다. 침상의 네 귀퉁이에 묶인 채로 하늘하늘, 손가락을 움직이다 말고 발작적인 웃음이 터진다.
“사람 잡아먹은 네놈들이 도대체 나와 무엇이 다르냔 말이냐. 어떤 자격으로 나를 쫓아내겠노라 하느냐. 입이 있다면 말을 해보거라,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사람 잡아 먹은 귀신 놈들아!”
“할 말 없다, 마귀.”
놀랍게도 평온한 얼굴로, 긴 봉을 단매의 목으로 들이댄다. 봉의 끝에는 반원형의 둥근 테가 붙어 있어 그 둥근 테 안으로 단매의 목이 꼼짝없이 갇힌다.
“나는 죄를 지은 몸이고, 너와 다르지 않은 짐승보다 못한 놈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흔들리던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 나직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하여 나는 평생에 걸쳐 죄를 이고 나갈 것이다. 내가 따르는 분께서는 인류의 죄를 온몸에 걸머지고 가셨는데, 나는 겨우 내 죄만을 지고 살아 갈 테니 누구에겐들 무어라 원망할 말이 남아 있겠느냐.”
단매의 이가 무섭게 맞부딪친다. 말이 빨라지며 이국의 언어들이 튀어나온다.
“诅咒你,又老又健的伪君子.(너를 저주한다, 늙고 건방진 위선자). Sterben Sie jeden Tag.(하루라도 빨리 뒈져버려라). 世界のどこにも君が歓迎されるところはない.(세상 어디에도 네가 환영받을 곳은 없다.)”
“알고 있다.”
짧게 말하더니 강하게 봉을 짓누른다. 그 기세에 괴로운 듯 몸부림치며 짧은 숨만을 다급히 내쉬지만 입술에 걸린 미소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도 굳이 강한 자를 노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니, 위선자.”
급작스럽도록 고요해진다. 썩은 숨결마저 사라진 착각에 빠졌지만, 범신은 반쯤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뒤돌아본다. 아까 단매를 제압하던 묵주가 준호의 것임을, 그리하여 준호에게는 어떠한 신성한 도구도 없음을 그제야 깨달은 탓이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던 준호는 고개를 떨구어, 숨을 가다듬을 때마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어깨만이 범신의 눈에 들어찬다.
“최, 준호.”
평소 준호의 목소리보다 훨씬 낮은 목소리가 그 어깨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범신은 아차하는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름은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짧은 증거였다. 그리하여 일부러 저와 준호의 이름을 단매 앞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그였다. 그러나-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새로 보이는 단정한 턱선과 살짝 구부러진 듯한 콧날은 그대로인데,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끌어올려지는 입술에 결국 범신은 숨기지 못한 장탄을 토해낸다.
“여리디 여린 놈이로구나. 여직 그 여동생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눈이 마주쳤다. 일순, 바닥없는 새까만 눈에 심장이 떨어졌다. 준호야. 차마 혀끝으로 올리지 못한 이름을 되뇌며 움켜쥔 손목에 장미 묵주를 감아주었다. 손목에 묵주가 감기자마자 발작적으로 몸이 떨리다 말고 사그라지지 못한 악의를 토해낸다.
“그래보았자. 믿음도, 자신도 없는 놈이다. 어디 마음껏 발버둥치거라. 그러나 이놈은-, 내 것이다.”
미소가 활짝 벙그러진다. 눈물에 젖어 초승달보다 곱게 휘어진 두 눈에 붉은 입술이 그리는 호선이 만개한 모란보다 아름답다. 이성을 초월하는 감각에 아득함을 느끼면서 범신은 준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묵주를 감은 두 손을 쥐고서 기도를 시작한다. 찰나의 미소가 뇌리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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