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모가 한숨을 내쉬며 마주친 선량한 눈에는 걱정스러운 빛이 여실했다. 범신의 등 뒤에서 애꿎은 제 옷자락만 내려다보던 준호는 어젯밤 범신이 행한 일이 그리도 위험했던 행위였는지 다시금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대로 잠든 저에게는 마치 악몽이라도 꾼 느낌이었지만 하기야, 생각해보니 젊은 여인의 몸이 인간의 움직임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이 움직인 것을 보면 저와 범신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것이었기는 한 듯 하다.

 

 

 “그리 되었습니다, 신부님. 어쩌면 좋겠습니까.”

 “-지금 이 분 몸에 계시다구요.”

 

 

 투명한 준호의 눈에 선의로 가득한 눈이 몰아친다. 문모는 맑은 눈으로 가는 준호의 손목을 끌어다 거기에 얽힌 장미 묵주를 느릿하게 바라본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구마 의식을 하는 수 외엔. 그리고 이 분도, 반드시 믿음을 가지셔야 할 터입니다.”

 “?!”

 

 

 갑작스러운 말에 한심하게 뒤집어진 목소리가 나왔지만 누구도 웃음을 터뜨린 사람은 없었다. 범신은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준호를 빤히 돌아본다.

 

 

 “들었지?”

 “,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그리고 이어진 것은 형조의 망나니가 내지르는 긴 부정의 비명이었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내 목숨이라도 바쳐 너를 구해주겠노라 하지 않았느냐.”

 “그러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사이비 신자라고 밀고 당하는 것이 먼저겠습니다! 대관절 왜! 어제처럼 그, 단매라는 기생처럼 기마 의식인가 구마 의식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왜 믿어야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십시오!”

 “어제 실패한 것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더냐. 단매라는 기생에게 믿음이 없었고, 함께 그 의식에 있던 너 또한 믿음이 없으니 그리로 옮겨간 것 아니겠냔 말이다.”

 

 

 전략을 조금 바꾼다.

 

 

 “아가, 준호야. 너도 전략서를 읽어본 적 있지 않느냐. 네가 그 분을 믿지 않는 상태로 구마 의식을 한다는 것은 적진에 어떠한 무기나 갑옷도 없이 싸우러 간다는 말과 같다. , 혼자 적진 한가운데서 적장의 목을 가져올 수 있겠느냐?”

 “, 그건, 그렇지만...”

 “또한 본디 이 것은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온 학문의 일종이기도 하다. 신문물을 받아들인다는 셈 치고 시작해보는 건 어떠하냐.”

 “, 렇다고 한들, 저는 형조의 정랑이,”

 

 

 우물쭈물, 아까와 같은 기세는 많이 수그러들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허리를 잡아챈다.

 

 

 “처음에는 내가 도와줄 수도 있을 터.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내가 너를 저녁마다 찾아가마. 치헌이와 너의 집에도 내가 잘 말해둘 수 있다.”

 

 

 여기까지 몰아붙이자 차마 더는 거절할 수 없겠는지, 말을 안으로 삼켜가며 푹 수그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귓불이 엷은 붉은색으로 물들어간 것은 승기를 잡았다는 기쁨에 도취된 범신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범신은 뻔질나게도 형조와 준호의 주변에 맴돌았다. 형조에서 만나지 못한 날에는 준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목덜미를 감싼 동정 깃을 들어 올려 주막이나 저 좋아하는 장소로 데리고 가기 일쑤라, 처음에는 기대하며 범신을 기다리던 준호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도망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래서, 이거 의미가 있습니까?”

 

 

 또다시 이어진 납치 행각에 도저히 참지 못한 준호가 상을 내리쳤지만, 시끄러운 주변에서는 이미 그런 일이 흔한 듯 눈길만 한 번 흘끗 주고는 다시 주거니 받거니 술잔이 오간다. 첫 만남, 두 사람이 동백 호수로 가는 길에 들렀던 바로 그 주막이었다.

 

 

 “너는, 의미가 없느냐?”

 “아니, , 저번에 들어보니 책도 읽고 공부도 해야 한다는 것 같던데, 그냥 아저씨가 술 마시고 싶어서 나 꼬시는 거 같으니까 물어보는 거죠!”

 

 

 눈썹을 찌푸리며 물어보는 준호의 손목에 휘감긴 묵주는 저번과 비교하여 확연히 검은 장미의 수가 늘어나 있었다. 막걸리를 벌컥 벌컥 들이키며 그를 잠깐 훑어본 범신은 준호의 물음에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마저 목울대를 일렁인다. 잔에 남은 술을 모조리 마신 후에도 한 동안 입을 떼지 않던 범신은 참을성 있게 제 대답만 기다리는 준호를 향해 씩 미소를 짓는다.

 

 

 “, 이제 그럼 우리들의 하나뿐인 하느님을 믿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랍니까.”

 “네가 그러하니 이런다.”

 

 

 뚱딴지같은 소리에 준호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묻는다. 벌겋게 버무린 배추 겉절이를 크게 한 입에 털어 넣은 범신은 우물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무작정 믿지도 않는 너를 앉히고 책이나 읽혀보았자 네 마음에 가닿기나 하겠느냐.”

 “그렇다고 이리도 무작정 술이나 퍼마시면 제가 그 학문을 퍽이나 잘 이해하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리도 너에게 술을 사주며 잘 구슬리고 있지 않느냐. , 이 아저씨가 주는 잔이나 넘치게 받거라.”

 

 

 그때 보았던 기세나 다짐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능글맞게 말을 받아치며 준호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툴툴거리면서도 술을 버리기는 아까운지, 홀짝 홀짝 마셔대며 불신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는다.

 

 

 “너는 우리가 공부하려는 학문이 무어라고 생각하느냐?”

 “? -갑자기 물어보시어도. , 그러니까 유교의 근간을 흔드는 것?”

 “그러하면 유교는 무엇이냐?”

 “춘추 전국 시절 공자님께서 주창하신 학문으로 인을 가장 근간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인이라는 것은-, 제 몸을 수양하고, 그를 통해 제 주변의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라고-, 생각은 했었습니다.”

 

 

 뜻밖의 대답에 범신의 눈썹이 올라갔다 내려앉는다.

 

 

 “공자께서는 제자들이 이 무엇이냐고 묻자 여러 가지 설명을 해주셨다고 했는데, 저는 그이라는 것이 결국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인이 없으면 효도 없고, 애도 없고, 덕도 없지요. 결국, 인이라는 것은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만드는 테두리-정도로. 그게 제가 납득한 이라는 것입니다.”

 

 

 술에 취한 것인지 이제는 범신이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말을 이어나간다.

 

 

 “그리허면 네가 말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이 무엇이냐니요. 사람이, 사람이지요. 이 지상에 태어나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이 사람이지요. 우스운 질문을 다 받습니다.”

 “너희 집에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복길이도 사람이더냐.”

 “사람이지요.”

 “그럼 복길이가 따라가는 삶은 무엇이냐. 제 본디의 행복이냐, 주인인 너희의 행복이냐.”

 

 

 그제야 잔에서 눈을 떼어 범신을 바라본다. 느긋하게 입가에 드리웠던 미소가 자취를 감추고 엄격한 눈길이 저를 사로잡는다.

 

 

 “집안에 갇히어 화초처럼 저를 찾아주는 이만 오매불망 기다리며 제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녀자들도 따르는 삶이 있더냐. 그에게도 인이라는 것을 베풀어주느냐. 애초에, 인이라는 것은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말문이 막힌 준호가 대답하지 못하자 범신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래, 설령 인이 정말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이라면 왜 누구는 평생을 행복하지 못하게 살아가면서도 행복을 추구할 방법조차 주어지지 않았느냐. 다 제각각 행복이 다를진대, 누군가는 평생을 타인의 밑에서만 일해야 하느냐. 그뿐이랴, 인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조차 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이다. 이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인 것인지.”

 

 

 범신 또한 술이 오른 것인지 준호에게랄 것도 없는 말을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동백선을 쥔 손가락에 힘이 올라 하얗게 핏기가 가시는 것을 본 준호가 말없이 술잔을 들이킨다.

 

 

 “-좋습니다. 가봅시다. ‘사람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한다는 그게 뭔지, 한 번 제 눈으로 직접 봐야겠습니다.”

 

 

 호기롭게 술잔을 내려놓은 준호가 말을 끝내자 범신이 얼핏 시선을 들어 맞춘다. 짙으면서도 광막한, 알 수 없는 어둠이 슬픔처럼 드리운 눈. 그 눈에 홀리듯 준호는 입술을 깨물고, 빽빽한 슬픔이 새벽처럼 밝아지기를 조용히 기다려본다.

Posted by habanera_

2020. 6. 12. 14:17 끄적

[창작]꽃이 부서지다

오랜만의 손풀기용 :D*

 

 

 아침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이는 유월의 그림자 속에서도 짙은 장미 향기는 숨길 수 없었다. 선명한 그리움을 안은 붉은색이기도 하고, 도톰하게 고운 진분홍빛깔을 그러모은 듯한 장미는 말 그대로 눈이 부신 자태로 담벼락을 흉폭하게 채색하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이마 위로 사정없이 내려앉는 햇빛에 손을 가려 그늘을 만들고서는 잠깐 우두커니 멈추어 장미 울타리를 바라본다. 낯설게 옅은 갈색 홍채에 진한 장미 향기가 물결처럼 아로새겨졌다.

 

 

 언제였더라, 이토록 많은 장미를 보았던 것이. 열린 동공을 굽어 살피던 장미꽃잎은 머리 안쪽으로 밀려 피어나듯이 어린 기억을 자극했다. 이마에 얹히는 이 햇볕과 강렬한 향기, 폭력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장미 무리는 분명, 미지의 것은 아니었다.

 

 

 문득, 장미 꽃잎 하나가 바람도 없이 느릿하게 발치로 떨어진다.

 

 

 벌거벗은 발톱 끝에 부드럽고도 생생한 꽃잎이 와닿았을 때, 나는 도망치듯 걸음을 빨리했다. 이미지는 두근거림. 그러나 결코 긍정적인 느낌의 설렘은 아닌. 부엌 찬장에 숨겨져 있던 간식을 몰래 꺼내어 먹은 뒤 입맛 없던 저녁식사 자리, 혹은 우연히 지나치는 골목길 한 구석에 펼쳐진 도색 잡지를 훔쳐본 듯이, 기분 나쁘게 심장을 쿵쿵 뛰게 하는 그런 두근거림이었다. 왜일까,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이토록 버려진 느낌이 드는 이유가.

 

 

 -율하야. 같이 가자!

 

 

 낯설지 않은 그 울림에 경악을 애써 참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샌가 낮아진 시선 안에 방글 방글 웃으며 뛰어오는 소녀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술을 그제야 자각한다.

 

 

 -지민아.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해보이는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소녀. 유난히도 홍채가 크고 까만 눈은 반짝거리는 흰자와 경계를 이루어 더더욱 맑은 눈빛을 타인에게 보내주곤 했다. 폭신해보이는 머리카락, 어린 아이에게서 나는 우유에 적신 쿠키 향기 같은 것들은 지민이 가진 특유의 분위기에 느낌을 더해주었다. 물론 지민이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에는 그 사랑스러운 외모 덕분도 있었겠지만 그녀가 그토록 아름답지 않더라도 모두가 그녀를 사랑했을 거라는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서 귀로 퍼져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서 멀뚱히 선 나는, 지민과 가장 친한 존재이기도 했으나 동시에 가장 그녀를 빛내주기도 하는 존재였다.

 

 

 구부러든 등에 어눌한 말투.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의 대부분을 가려 타인과 제대로 시선조차 맞추지 못하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민의 절친한 친구였다. 음험한 첫인상에 저절로 뒷걸음질 치는 다른 사람과 비교해 햇살보다 환하게 웃어주는 지민에게 나는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지민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 시커먼 감정들을 여과없이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금세 서로에게 매료되었다.

 

 

 사랑스러운 지민. 누구나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지민. 그랬기에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존재에게는 필연적인 환상이 덧씌워지기 마련이다. 타인이 꿈꿔왔던 사랑의 이상향에서 결코 도망칠 수 없었던 지민은 그 모습 그대로 보아주는 나에게만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했느냐고. 우리는 사람으로서의 감정을 나누었다. 나는 지민이 악을 쓰며 우는 것을 보았다. 이를 갈며 쌍욕을 하는 것도 보았다. 목젖이 보이도록 깔깔거리며 웃다가 침이 흐르는 것도, 전날밤부터 저녁을 먹지 않아 그다음날 점심에야 입가에 케첩과 소스를 묻히며 탐욕스레 정신없이 햄버거를 먹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것은 지민이 나에게만 보인 것이었다. 그리고 지민은 나에게 귀엽다고 말해주었다. 눈가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정성스레 잘라주기도 하였고,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감탄해주었고, 말수가 적은 내 성향을 두고 사려 깊고 배려심이 많은 아이라고 주변에 칭찬해주었다. 이 모든 것은 지민만 나에게서 본 것들이었다. 나는 나조차 내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었는데 오직 지민만이 나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래서 나는 지민을 속였다. 지민은 사람들을 모두 속이고 있었다. 울고 웃고 화내는 인간인 주제에 감히 저는 그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듯 항상 사랑스럽고 완벽한 미소만 짓고 있었다. 내 등에 기대어 훌쩍거리며 욕을 퍼붓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어서 그 완벽한 표정과 몸짓으로 멀어져가는 지민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조차 모르는 내가 되게끔 타인들을 속이는 지민이니까, 나도 지민을 속일 자격 정도는 있다고 생각했다.

 

 

 시작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다. 지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복도를 걷다가 나를 향해 웃어주자, 나는 어두운 쾌감이 등골을 내달리는 흥분을 느꼈다.

 

 

 -선생님이 부르신 적 없다고 하시네.

 -어? 아까 부르시는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들은 건가봐, 미안해.

 -아니야, 착각할 수도 있지 뭐. 다음 시간은 음악시간이지, 율하야?

 

 

 아무렇지도 않게 음악책을 챙기러 교실의 제 자리를 찾아가는 지민의 뒷모습을 보자 오싹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처음에는 그걸로 만족했다. 지민이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것처럼 나도 그녀를 속인다는 건, 내 스스로의 그럴싸한 명분이었다.

 

 

 그 뒤부터는 더욱 쉬웠다. 사소한 거짓말과 미묘한 속임수에 지민은 쉽게도 넘어갔다. 교묘한 칭찬과 사실을 섞은 거짓은 진실보다도 쉽게 지민의 경계를 통과했다. 어느 반 남학생이 지민이 너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좀 모자라보인다는 식으로 말을 했다던지, 선생님들끼리 얘기하는 걸 몰래 들었는데 이번 시험에서 지민 네가 생각 외로 성적을 잘 받지 못해 조금 실망하셨다던지의 이야기들. 그 남학생이 지민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던 지민의 성적이 썩 좋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내 입 속에서 튀어나온 은밀한 거짓들이 지민의 귀에서 만개할 때마다 지민은 조그만 주먹을 꼭 쥐며 분개한 듯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결론적으로 지민의 완벽함은 조금씩 무너져갔다. 완전하게 사랑스러운 소녀는 가끔씩 지나치는 남학생들을 쏘아보기도 했고, 도와달라는 선생님의 부탁을 모르는 척 내 팔짱을 끼며 지나가기도 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웠던 소녀는 이제 없었다. 조금 무너져 더더욱 인간적이 된 사랑스러움은, 사실은 내가 인위적으로 만든 작품이기도 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도 않을 그 사실에 기묘하고도 은밀한 쾌감을 느끼며 작은 진실을 섞은 거짓을 자랑스레 쌓아갔다.

 

 

 우리가 자주 가던 공원이 있었다. 학교 가까이에 있었지만 한밤중의 공원은 놀라울 정도로 적막하면서도 동시에 밤의 기품으로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우리는 커다란 나무 아래 마련된 벤치에 걸터 앉아 불꺼진 교정을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거기서 완벽한 소녀는 사라지고, 제 감정에 충실한 생기발랄한 소녀 두 명이 마음껏 떠들곤 했다. 공원에 흩어놓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는 모두 청아하게 몸을 뒤틀며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기로 했던 시간보다 삼십분을 먼저 공원에 나와서 기다렸던 날, 그리고서는 그녀에게 왜 잘못 기억했느냐고 거짓말을 하려고 했던 날 지민은 나에게 내 거짓말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밤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하얀 종아리께에서 침묵이 부서졌다. 회오리치는 그 검은 정적을 응시하다가 간신히 한 마디를 꺼내었다.

 

 

 -다 알고 있으면서, 왜, 왜 속아줬어...?

 -그냥.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바랐던 것일까. 지민의 담담한 고백은 줄곧 그녀를 속였다고 생각했던 나의 자만심을 부서뜨리기에는 너무나도 충분한 발언이었다. 어떠한 미움이나 증오도 없이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이하고도 또한 단정해, 차마 그녀와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지민을 미워한 적 없었다. 증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는데 왜 나는 그녀를 속이고 싶었을까. 속여야만 했을까.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물음표들을 채반에 받치듯 잡아끌며 나는 애써 생각을 진전시켰다. 그렇다면 지민은 왜 나에게 속아줬을까. 잠자코 내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다 알면서도 왜 나에게 속은 듯 불완전한 소녀가 되었을까.

 

 

나는 왜. 너는 왜. 우리는 왜.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배신자였고, 그럼으로써 믿음을 주었다. 서로가, 서로를 결코 믿지 않으리라는 모순된 믿음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에게 진심일 수 있었겠지. 우리가 가지고 있던 믿음은 온전히 서로를 향한 등뿐이었다. 그러나-, 그랬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우리의 등을 기댔던 것일지도 모른다. 부서지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언젠가 꽃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므로, 몰락하는 꽃을 바라보기보다는 먼저 무너뜨리는 상냥함도 있기에.

 

 

 바람이 분다. 시계를 가득 채우던 장미가 물보라처럼 산산히 부서져 바닥으로 추락하는 꽃잎들은 으깨어지기 전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버린다. 너도 나도 모를, 미지의 어느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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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아침이 되었고, 뜬 눈과 기도로 밤을 지새운 범신은 벌건 두 눈으로 첫 닭이 울자마자 잠든 준호를 걸머지고 단매의 처소 문을 열어젖힌다. 하품을 참지 못하고 청소를 하던 머슴이, 놀란 토끼 눈으로 두 사람의 태를 번갈아 바라보자 저와 마찬가지로 아마 한숨도 자지 못했을 채련에게 전갈을 한다.

 

 

 “채련에게 전하거라. 단매는 괜찮을 것이다. 오늘 부로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을 것이라.”

 

 

 새벽이라고는 하나 아직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길이었다.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이 발자국마다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움직임에 업혀 있던 준호가 웅얼거리며 그 등에 깊이 고개를 파묻는다.

 

 

 “아저씨, -괜찮아요?”

 “그래, 너 괜찮다.”

 “아니요, 아저씨 말이에요. 밤새, 누가 손을 잡아줬어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꿈결처럼 범신의 귀를 수놓는다. 나른하고, 낮지만 동시에 무구한 목소리다. 범신의 등에 파묻혀 몽롱한 목소리로 이야기 타래를 풀어놓는다.

 

 

 “아저씨 맞죠? 지현이가, 그렇게 된 다음에는 혼자 잤거든요.”

 “다 컸구나.”

 “아니에요, 혼자 자는 거 무서웠어요. 근데요, 같이 자달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 치헌이한테라도 같이 자달라고 하지.”

 “안 돼요. 지현이는, 지현이는 혼자, 매일 혼자 자야 하잖아요.”

 “...”

 “지현이를 혼자 보내놓고, 오빠인 내가 어떻게, 그래요.”

 “그래, 우리 준호. 장하다.”

 “근데 사실 너무 무서웠어요. 매일 밤, 지현이를, 괴롭힌, 개가 나왔어요.”

 “준호야.”

 “도망치려고 해도, 꿈이니까, 항상 신발이 없어서 발이 너무 아팠어요. 도와달라는 목소리도 안 나왔어요.”

 “마음속으로라도 불러보지.”

 “매일 불렀어요. 누구든지 좋으니 와달라고.”

 “안 와줬어?”

 “. 근데요, 어젯밤에야 겨우 왔어요.”

 “...”

 “누가 우는 내 손을 잡고, 밤새도록 내내 괜찮다고 해줬어요. 10년 만에.”

 “최준호.”

 “그거, 아저씨 맞죠?”

 “...”

 “아저씨 맞는 거죠?”

 

 

 대답 없는 그 뒤로 고른 숨결이 새근새근 내려앉는다. 범신의 등에서 마치 생전 처음으로 단잠을 자게 된 사람처럼 단정하고도 편안한 숨을 내쉬는 준호에게 범신은 들리지 않는 한숨을 길게 내쉰다. 허위허위 걸어가는 등 뒤로 천천히 태양이 떠오른다. 빠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제 집에 도착한 범신은 다시 한 번 더 자명루에 사람을 보내야 했다. 제 동백문 접선을 깜박, 단매의 처소에 두고 온 탓이었다.

 

 

 

 “듣기에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너는 혼자가 아니다.”

 

 

 ‘또 무슨 헛소리랍니까.’하며 한심해하는 눈빛을 보낼 줄 알았지만, 제 눈으로 보았던 어제 광경이 잊히지 않았던 준호는 순순히 범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어제 결국 준호가 들어오지 않았던지라 밤새 잠 한 숨 못 자고 준호를 기다리던 치헌에게는 자명루를 나서는 길에 이미 전갈을 주었고,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범신의 집도 아닌, 크지 않지만 안팎이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는 초가집이었다.

 

 

 “어제, 구마를 하던 도중에 마귀가 가까이에 있던 네 몸으로 들어가 버렸다.”

 “...?”

 

 

 아무래도 그 말만큼은 믿기지 않았던지 반문한 준호는 새삼스레 제 손등과 몸을 둘러본다. 굽혀지는 긴 손가락과 하얀 팔뚝.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감각에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범신은 그 손목을 끌어 소매를 조금 걷어준다. 손목에는 문모에게서 받았던 붉은 장미 묵주가 겹겹이 감겨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검은 색 장미가 군데군데 섞여든 묵주였다.

 

 

 “이 묵주가 네 안에 있는 놈을 자제시키고 있는 듯 싶으나, 얼마만큼 갈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 있다간 네가 그 놈에게 삼켜질 것은 자명한 이치라는 것이다.”

 “-그럼, 죽어요?”

 “악마에게 삼켜진 영혼은 천국에도 연옥에도 가지 못한다. -미안하다, 준호야.”

 “아저씨가 왜...?”

 “내가 네 이름을 부른 탓에, 들어가 버린 듯 하다.”

 

 

 준호가 지닌 눈빛을 차마 마주 하지 못하고 범신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린다. 당황해 만류하는 준호를 무시하고 장을 끊어내는 듯한 목소리로 맹세한다.

 

 

 “내 너를 책임지고 반드시 그 마귀에게서 되찾아 내겠다. 내 목숨을 걸어서라도 찾아내마. 그러니, 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올 수 있겠느냐.”

 

 

 고개를 들어 마주한 눈은 무저갱. 빛을 품을 수 없는 어둠 속에 담긴 것은 의지와 단호함뿐이었다. 말 그대로, 제 목숨을 담보로 해서라도 이루어내겠다는 결연한 세계. 한 점 반문도 허락지 않는 그 기세에 준호는 결국 그 날 오후 범신과 함께 문모에게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너무 위험합니다. 베드로 형제님. 어쩌자고 그리 무모한 일을 행하셨단 말입니까. 자칫 베드로 형제님의 목숨까지도 위험했습니다. 아니, 이미 뒤엣분에게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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