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안에 이 것이 계속 날뛰는 거죠, 아저씨?”

 “-준호야.”

 “어떡해야 이것이 나갈까요. 저 스스로 죽으면 될까요.”

 

 

 헛웃음 치는 와중에도 제 손이 묵주를 감아쥐는 것을 느꼈다. 마리아님, 자비를 베푸소서. 혀끝에 맴도는 감상 같은 기도를 뇌까리면서 준호는 눈을 감았다. 차라리 죽어버리자. 여동생을 죽이고도 또 다른 생명을 잡아먹으려 하는 나는 짐승도 무엇도 못될지어다.

 

 

 저주 같은 눈물이 꾸역꾸역 목구멍을 치받고 있을 때 범신이 내민 손이 묵주를 감은 준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런 말 하지 말어라, 아가. 분명히 길이 있을 것이다. , 준비를 하마.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말어라.”

 

 

 안타까우면서도 또한 짙은 눈이었다. 그리도 강건했던 눈에 언뜻 비치는 눈물과, 그리도 짙고 성숙한 눈 안에 선명하게 어리는 슬픔과 당부에 준호는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주저하였다. 제 가족을 잡아먹고도 다시금 다른 이를 죽이려 드는 저는 당연히 죽어야 하건만, 이렇게 저를 붙잡아두는 네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다.

 

 

 “아저씨.”

 “그래.”

 “베드로.”

 “불렀느냐.”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유독 뚜렷한 그 눈에는 가릴 수 없는 고통과 공포가 뒤범벅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지러진 곳 없이 투명했다. 가리지 못한 투명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범신은 손에 힘을 주었다. 준호가 들고 있던 장미 묵주가 제 손 안에 자국을 남겼다.

 

 

 “네가 포기해달라고 할 때에도, 포기하지 않을 터이다.”

 

 

 이번에도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준호였다. 별을 잉태한 밤을 애써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준호는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고집 좀 그만 부려요, 춘추관의 개망나니.”

 “하느님께는 그저 온순한 한 마리의 개가 될 지어니.”

 

 

 그제야 나직한 웃음을 터뜨리며 준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준호가 입술을 달싹였다.

 

 

 “세례, 받을게요.”

 

 

 눈이 마주쳤다. 빛나지 않는 눈물이 고인 눈이었다.

 

 

 “-그러면, 제 안의 이것도 조금은, 얌전해질까요.”

 

 

 차마 대답할 수 없는 범신에게 멋쩍게 웃어 보인 것은 제 나름이 가진 배려였을 터였다.

 

 

 

 준호가 세례명으로 고른 것은 아가토였다. 범신과 문모와의 상의 끝에 정한 이름이었다. 과거 구마자였다던 이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은 그만큼 준호가 구마 의식을 잘 견뎌내기를 바라는 범신의 희망이 섞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낯선 발음이 어색한지 몇 번이나 혼자서 중얼거리던 준호는 범신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가토.”

 “, .”

 “걱정 하지 말아라.”

 

 

 그제야 제가 쥐고 있던 묵주를 내려다본다. 이제는 붉은 색을 세는 편이 더 빠른 검은 장미 묵주, 쥘 때마다 악의 서린 속삭임이 점점 커져감에도 불구하고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것. 제 나이보다도 훨씬 어리게 흔들리는 홍채에 범신은 그 머리카락을 향해 뻗어 가는 손가락을 애써 참으며 미소를 짓는다.

 

 

 “다 잘 될 것이다. 괜찮아.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으마.”

 “어떻게 아저씰 믿어요.”

 

 

 부루퉁하게 대답하면서도 그 입술에 희미하게 웃음이 어린다. 그 날 이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입술에서 슬쩍 시선을 떼어낸다. 가슴에 얹히는 무거운 죄책감과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부러 말을 이어나간다.

 

 

 “실패에서 배운다지 않더냐. 잘할 자신이 있다. 곧 보름이니 그 때에 맞추어 날을 잡도록 하자.”

 

 

 흔들리던 동공조차 당신 앞에서는 올곧아진다. 그러나, 올곧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실은 본디 성정으로부터 발현된 것이라. 범신은 물기가 물크러지는 준호의 눈길에 시선을 피하지 않고 뜻하지 않은 미소마저 띄운다. 두터운 손을 뻗어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나직하게 읊는다.

 

 

 “걱정 말아라. 내 약조하지 않았더냐. 너를 포기하지 않기로.”

 

 

 그 한 마디에, 온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다. 숙부인 치헌 앞에서도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심부들이 당신 앞에서는 한없이 부풀어 오른다. 무서워요, 아저씨. 살려주세요, 감사해요. 지현아. 후두 너머 갈 곳 잃은 말들, 열 살 이래로 꾸준히 삼켜 이제는 심장 어딘가 굳은살로 낱낱이 박힌 언어들이, 네 앞에서는 녹아 넘쳐흐른다. 애써 입술을 내리누르며 가만히 고개만 끄덕거리자 손바닥만 했던 온기가 어깨로 내려온다.

 

 

 “믿어다오, 준호야. -, 아가토.”

 

 

 바람결에 흘러가는 말처럼 따라붙는 그 호칭에 퍼뜩 고개를 들었지만 여지껏 그랬던 것처럼 이미 범신은 큰 걸음으로 성큼 성큼 멀어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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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느름하게 뜬 눈이 저를 쳐다보자 준호는 제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을 억지로 가라앉힌다. 저도 제 입에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드밀어진 말에 오히려 용기가 생긴다.

 

 

 “, 만날 자기가 좋아하는 데만 가고, 나 가고 싶은 데는 한 번도 안 데려갔잖아요.”

 “허 참, 네가 먼저 말한 적은 있더냐? , 생떼만 쓰던 녀석이 말은 많구나.”

 

 

 그러면서도 딱히 거부하는 기색은 없다. 저를 보지만 동공보다 안 쪽을 살피는 듯한 그 눈에 일순 한 마디가 툭 내뱉어지려는 것을, 헛기침으로 겨우 막아낸다. 그를 무엇으로 알아차린 것인지 범신은 동백선을 펼쳐 제 입매를 가린다.

 

 

 “그래, , 꽃을 보고프다는 말이지.”

 “, 여자 같은, , 기생집 이런 데 말구요. , ! 진짜 꽃! 우리가 그 때, 빨간 동백 봤던 거기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괜스레 화가 치밀어 그렇게 버럭 소리를 내지르자 범신이 오히려 황당한 웃음소리를 낸다.

 

 

 “허허, 아니, 누가 기생집엘 간다든? 저 혼자 화가 나 그 야단이구나. 오냐, 알았다. 내가 명색이 동지사인데, 너 가고픈 데 한 군데 못 데려가겠느냐.”

 

 

 동백선을 소리가 나게 접더니 준호의 곁에서 반 발자국 앞서 걷는다. 찰랑이는 갓끈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곳, 스치는 옷감 소리가 제 심장 소리를 가리어 차라리 다행이었다. 캄캄하게 이울지는 그 어둠 속에서 붉은 동백이 보이기나 하겠느냐마는, 사실 준호에게 동백 구경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눈매가 처연하게 고왔다. 기름하게 한쪽만 쌍꺼풀이 진 눈에는 물기가 번져갔다. 평소에도 사내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섬세한 선이 두드러지는 얼굴에 나른한 색기가 퍼져나갔다. 풀린 채 나부끼는 검은 머리카락이 희게 질린 얼굴과 어울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적막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때문이었을 것이다. 죄 없이 붉은 입술이 제 입술로 다가오는 것을 보면서도 피하지 못했던 이유가. 찢겨진 꽃잎처럼 부드러우면서도 애달픈 입술이 찰나로 닿아오고, 암흑 속에서도 별을 품었노라 믿게 하는 네 동공을 마주하면서 사실 범신은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제 목덜미를 부드럽게도 훑어 내리는 그 손끝이 주는 감각에 몸이 떨리기도 전에 순간, 너와 함께라면 죽어도 좋다 생각하였다.

 

 

 “, 신 차려, 최준호!”

 

 

 멈칫하던 순간에 노성이 터져 나왔다. 둘 다 흠뻑 젖은 생쥐 꼴이 누가 보았다면 웃음을 금치 못할 광경이기는 했으나 두 사람 모두 지극히 진지했다. 준호는 여전히 예의 요염하면서도 나른한 미소를 지우지 못 한 채였다. 물에 젖은 것인지, 혹은 제 타액에 젖은 것인지 물 위에 비친 붉은 초승달을 입술에 떠올리면서 준호는 다시 범신을 끌어안았다.

 

 

 “추워요, 아저씨. , 너무, 추워요. -무서워요, 아저씨.”

 

 

 일순 눈이 마주쳤다.

 

 

 흰자와 홍채의 경계가 뚜렷한 무구한 눈에, 그리고 이어지는 그 끝말에 범신은 판단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래, 아가. 준호야. 네 무섭다면 내가, 그런 너를 어찌 버리겠느냐.

 

 

 피가 번졌다.

 

 

 황망하게 범신을 밀쳐낸 것은 준호 스스로였다. 제 입술에서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면서 비틀거리는 불안정한 걸음으로나마 범신에게서 멀어진다. 교태 어린 자태는 어디로 가고, 비명이라도 지르듯 거칠게 울음 섞인 포효를 내뱉는다.

 

 

 “제기랄, , 돼요! 그러지 마!”

 

 

 여린 입술을 무참하게도 짓씹은 고통이 준 대가였다. 겨우 정신을 차린 준호는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몸으로 억지로 기어가며 범신에게 소리를 질렀다.

 

 

 “귀신 들린 몸이에요, 당신과는 관계, 없잖아! 도망가, 도망가요! 이러다 우리 둘, , 죽어!”

 

 

 안개라도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진 머릿속으로 광경이 스쳐갔다. 유달리도 믿음직해 보이는 강건한 네 얼굴을 감싸 입을 맞추고, 젖은 혀를 섞고, 그리고 너를 끌어안은 채 붉은 동백이 한 아름 꽃을 피워낸 차가운 호수로 곧장 뛰어들던 나.

 

 

 그 모든 순간 중에서 역겨운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너를 죽이려던 내가, 너를 죽이려는 내 안의 마귀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준호는 고장 난 것처럼 턱으로 줄줄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무작정 범신에게서 멀어져갔다. 벗겨진 신발을 손아귀에 우겨 쥔 채 얼굴을 진창에 처박으면서도 기어가는 무릎은 멈추지 않는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한 치라도 더. 너를 죽이려는 나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다.

 

 

 “-아가, 준호야.”

 

 

 다시금 혼미해져가는 정신 속에서 네 목소리가 구원처럼 울렸다. 아니, 그저 너만이 나의 구원이었다. 까무룩 기절해버린 준호의 입술에서 달게 비친 피를 지워 등에 업으며 범신은 그저 묵묵히, 달도 없는 그 밤 속에 익사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걸어 나갈 뿐이었다.

 

 

 당신이 서렸다. 당신이 아닐 리 없었다. 자정이 웅크린 장지문 너머 익숙한 그 그림자는 당신이었다. 사향보다 짙으면서도 묵직한 그 향기는 당신이었지만, 나는 눈을 감았다. 저도 모르게 낮게 읊조리면서 짙은 당신의 향기를 애써 폐부에서 몰아내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날뛰듯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빌어먹을 심장은 여전히 가슴 속에서 나직하지도, 작지도 않게 멋대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이 모두 희게 새어버릴 때까지.

 

 

 너와 나는 서로가 거기에 있음을 알면서도 차마 한 마디조차 내지 못하던, 그런 찰나들이 너무나도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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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셨습니까.”

 

 

 이제는 왜 그리 조용히, 그리고도 잰 걸음으로 대문 뒤로 들어가야 했던 이유도, 저 온화한 인상의 선비가 누구인지도 안다. 그런 만큼 제 표정을 가지고 뭐라 할 사람은 없으리라 믿고 준호는 미간에 새긴 세로줄을 펴지 않았다. 설득 당해 오기는 왔다만 생리적으로 드는 불편함과 이질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이를 이해하는 것인지 문모는 자연스러운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했다.

 

 

 “먼저 말씀드리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통 저에게 말씀을 많이 하셔서, 대체 어떤 학문이기에 이리 열심히 말씀을 하시나, 들어나 보는 심경으로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무례가 뚝뚝 떨어지는 말투에 범신이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리나 싶었지만 문모도 여전히 그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인다.

 

 

 “, 마음 이해합니다. 그럼 편히 계시다 가십시오. 저는 미사가 있어서 이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혹여 궁금하시다면 지금으로부터 한 식경 뒤에 예배당, 아니 뒤뜰에 있는 안채로 오시지요.”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뜬다. 제가 혹여 나쁜 마음을 먹고 여기를 뒤지거나 하면 어쩌려고, 꺼리는 기색도 없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던 준호 또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범신을 쳐다본다.

 

 

 “원래 이렇습니까?”

 “네가 무엇을 물어보는지는 모르겠다만 오늘은 좀 특이하긴 하구나.”

 “역시 그렇,”

 “평소에는 굳이 사람을 내보내지도 않으신다.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는 곳이지. 다만 그래도 들키면 곤란한 곳이라, 사람을 가리기는 하신다만.”

 

 

 당혹스런 표정으로 저를 보는 준호를 아는지 모르는지 범신은 느긋한 표정으로 제 옷자락을 다듬기도 하고, 손목에 걸어두었던 팔찌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청에서 들어온 신기한 문물이 집에 잔뜩이라 하던 세간의 평이 틀린 것은 아닌지 제 소맷자락에서 세세한 눈금이 잔뜩 새겨진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어 본 범신이 몸을 일으킨다. 가늠할 수 없던 어둠은 어느 새 꼬리를 끌며 감추고, 그 눈 안에는 무구한 순진이 들어차 있었다.

 

 

 “가자, 핏덩아. 이제 미사 시간이로구나.”

 

 

 그 순간과 그 시간들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준호 자신도 몰랐다. 다만 그는 남녀 할 것 없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그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고, 신분 구별 없이 앉은 그 자리에 제가 알던 우주가 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제가 지금 구름 위를 걷는 것인지 뒤집힌 하늘을 걷는 것인지도 모르는 채 몽롱하게 걸음을 옮기는 준호를 알아챈 범신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다음 날부터는 굳이 제가 찾으러 가지 않아도 저가 찾으러 오겠거니, 하는 웃음이었다.

 

 

 

 “세례, 안 받을래요.”

 

 

 높지는 않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쩡하고, 공기를 연소시켰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문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준호와 범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준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범신은 문모에게 눈짓을 하고 곰방대로 준호의 어깨를 톡 치더니 먼저 문을 나섰다. 뒤따라 나온 준호의 앞에서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든다. 성격대로라면 곰방대로 어깨라도 힘껏 내리치려나, 어깨를 움츠렸던 준호는 아무리 기다려도 범신이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지 않자 고개를 들어올린다.

 

 

 “힘이 드느냐.”

 

 

 나직한 한 마디였다. 동시에 제 발언을 이해하는 말이기도 했다. 울컥, 홍채가 아려와 준호는 고요하게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 날 이후 문모에게서 교리 공부를 받을 때마다 준호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더랬다. 태어난 것이 죄라 한들, 그 어여쁘고 어린 제 동생은 어떠한 연유로 개에게 물려야 했는지. 개에게 물려죽었다는 이유로, 왜 그 착하디착한 아이가 연옥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지. -차라리 저를 죽일 것이지. 검고도 큰 개가 무서워 제 어린 동생이 짓이겨지는 것을 빤히 보고도 혼자 살겠노라 도망친 큰 죄인이 바로 여기, 제 코 앞에 당도했음에도.

 

 

 세상의 모든 죄를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되기를 원하셨다던 예수님. 그 숭고하고도 아름다운 마음을 흠숭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리도 불쑥 불쑥 치받는 물음은 결국 준호를 세례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한참을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준호를 기다려주던 범신은 느릿하게 손을 들더니 그 커다란 손으로 준호의 목덜미를 다정히도 두드려주었다.

 

 

 “네 잘못도 아니고, 네 동생-, 지현이 잘못도 아니다.”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왔다. 몰려오는 감정들을 참느라 새빨개진 눈을 보고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네가 미워 준호는 네 손을 걷어내지도 못하고 숨죽여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딘 햇살을 담아 아롱지는 눈물이 부드러우면서도 예리한 뺨에 투명한 선으로 이울진다. 그리고 준호는 제 귓가를 침범하는 차가운 기운에 잠깐 움찔, 귓가를 매만지며 얌전히 범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고민해도 괜찮다. 네게 세례를 강요하는 것 또한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와, 야고보 신부님을 믿고 교리 공부는 더 해보는 것은 어떠냐.”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준호는 턱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아무렇지도 않게 닦아내면서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차마 놓지 못한 소맷자락을 그저 손가락 새 얽은 채로, 그 눈에 맺힌 눈물과 모든 슬픔은 여직 지우지 못한 채로, 준호는 오래, 그 소맷자락과 그 소맷자락에 엉긴 동백선을 놓지 못했다.

 

 

 결국 준호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이만 정리하고 몸을 일으킨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둘 중 먼저 입을 연 쪽은 의외로 낯이 창백해졌던 준호였다.

 

 

 “아저씨, , 꽃 좀 보여주면 안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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